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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준경전도사 |
1891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에서 태어난 문준경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70년대 초 학생 운동에 뛰어 들던 시절입니다.
그 때 CCC 선교 단체의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인용하셨습니다.
자세한 기억이 살아나지 않았지만 11개의 섬들을 나룻배로 하루 종일 찾아 그야말로 삶을 나누며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와 문 전도사님 개인의 애절한 집안 환경의 설명들입니다.
최근에 수소문 끝에 헌책방에서 ‘순교자 문준경’이라는 책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설레임 반 기대 반으로 선뜻 책뚜껑을 열지 못했지만 하룻밤을 지새우며 눈물로 읽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하리 만큼, 삶은 신앙, 신앙은 곧 삶으로 살았던 순교자입니다. 어찌보면 무명의 순교자입니다.
나룻배에 몸을 싣고 해가 저문 저녁에야 나약한 여인의 안식이 있었을 만큼 매일 11개의 섬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들어 선 일 없는 교육의 배경이지만 당시 이성봉 목사님이 즐겨 부르시던 희망가, 천당가, 부흥 성가를 부를 때면 그 낭랑한 음성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집 마당에 가득 했습니다. 평생에 6개 교회를 세웠을 정도로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원래 친정도 시집도 꽤 잘사는 집안이었습니다. 열일곱살 때 시집가는 결혼 초야부터 버림받고 며칠 후에는 신랑이 다른 섬에서 소실을 얻고 살림하면서부터 세상에서는 잊혀진 여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 없는 시집 살이 20년, 길쌈하고 바느질하면서 극진히 시부모를 모셔서 마을 사람 모두가 효부라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삯바느질로 번 돈은 송아지를 사서 여러 집에 나누어 주고 혹 이익이 생기면 남편이 와서 소실과 사는 살림 비용으로 가져 가곤 했습니다.
글을 몰랐기에 땅바닥에 글을 쓰고 지우며 한글을 터득하고 후에는 경성 성서학원(성결교 신학교 전신)에 가서 일년을 공부했습니다.
물론 피눈물 나는 고학이었습니다. 바늘 장수, 물장수, 삯 바느질, 허드렛 일을 하면서도 그의 기숙사 방은 ‘사랑방’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재학생들이 어머니처럼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사도행전적인 원색적 믿음 생활을 하면서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한 번은 홀 어머니 병환 때문에 울고 있던 여학생의 사정을 듣고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재봉틀을 팔아서 백원을 마련해 주고 훌쩍 그 자리를 떠난 적도 있습니다.
문전도사의 영적 슬하에서 성결교의 중견 이만신 목사, 이봉성 목사 등 십 여명의 중진 목사가 배출되었고, 섬겼던 교회 중의 하나인 진리 교회에서는 그가 자식처럼 양육한 제자 중에 열 세 명의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교회에서 살았던 그의 집은 ‘목민센터’ 였습니다. 오갈 곳 없는 이들, 병든 사람, 신불신자 할 것 없이 소외된 식객들로 가득했습니다.
항상 커다란 가방을 메고 다녔는데 그 속에는 감기약, 연고, 민간 비방약 누룽지 등이 채워진 만물상 보따리였습니다. 그는 산파는 아니었으나 아기를 받는 데는 소문이 멀리까지 나 있을 정도였습니다.
1950년 10월 5일 하늘에는 먹장 구름 덮였고 파도 소리마저 침묵하던 밤, 30년을 살았던 백사장에서 공산당에게 죽창에 찔리고 발길에 채이며 59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반열에 섰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의 뒤안길에 밑거름처럼 가리웠던 한 여성 순교자, 그는 우리 시대의 믿음의 어머님입니다.
그 믿음 씨앗이 21세기 한국 교회의 꽃처럼 피어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06. 12. 23. 아멘넷 / 이종승 목사)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에 대한 성결교회사적 평가와 과제
순교는 흔히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 폭정과 부정의에 대한 항거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순교의 거룩성과 아름다움은 신앙의 수호를 위해 총칼보다는 사랑의 죽음을 택했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 신앙의 순교는 역사 속에 하늘의 별처럼 찬연히 빛나고 그러한 이야기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거룩한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경, 소란스럽던 증동리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갑자기 “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작지만 또렷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공산 폭도들의 무자비한 총칼 아래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문준경 전도사가 내뱉었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은 오늘도 거룩한 메아리가 되어 수많은 심령 가운데 울리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가 갖는 성결교회사적 의의를 생각해 봄으로써 그 의미를 반추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성결교회의 여성 사역자로는 첫 순교의 자리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성결교회의 역사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께 헌신했던 수많은 여성사역자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수난으로 점철된 성결교회의 숨결을 함께 호흡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단의 부흥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40세의 늦깎이 나이에 헌신했지만 유난히도 많은 시련을 겪었던 문준경 전도사 또한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섬 교회의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섬 지역의 복음화에 헌신하였다. 경성성서학원에 재학 중에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임자도 진리교회는 그 지역 최초의 교회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 지역과 주변은 복음의 처녀지(處女地)였으며, 그녀의 전도에 의해 비로소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공산 폭도들이 문준경 전도사를 무참히 살해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녀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며 “그냥 놔두면 더 많은 새끼를 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문준경 전도사는 한국성결교회, 더 나아가 한국교회 전도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동시에 그녀는 성결교회 최초의 여성 순교자로서 한국교회 및 성결교회 여성사의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고 있다.
둘째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가시밭의 백합화’로 상징되는 성결교회의 신앙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즉 한국성결교회는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는데,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그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성결교회가 걸어온 역사의 발자취는 ‘가시밭의 백합화’라는 상징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 상징에 내포된 뜻 가운데 하나가 찢겨진 상처로 인해 더욱 진한 향기를 발하는 백합꽃의 속성처럼 성결인의 신앙은 세상의 시련 가운데서 더욱 강렬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다는 것이다.
성결의 복음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던 선교 초기부터 한국성결교회는 수난의 험난한 행로를 걸어야했다. 때로는 친일파라는 오해로, 때로는 상종 못할 이단사설이라는 오해로 여기저기가 뜯기고 찢어졌다. 더욱이 국가시책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되면서 성결교회는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형국이 되었다.
이 와중에 문준경 전도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에 일제에 불려가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사역하던 증동리교회도 경방단에 매각되고 그 대금 또한 국방헌금의 명목으로 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수난의 질곡 속에서도 성결인들의 신앙은 쇠하지 않고 더욱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성결인들의 그러한 신앙은 이 민족의 해방과 함께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일제에 의해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한편 각처에 새로운 제단들을 설립하면서 힘차게 약진해 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약진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 민족이 동족상잔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서 한국 성결인들 또한 그 아픔을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절정에는 순교의 사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의 박멸을 꾀하는 공산도배들의 폭거에 항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다 맞게 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도 그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전쟁의 와중에 저질러진 공산주의자들에 만행은 말로 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든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상하려 했다. 그로 인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여기저기서 자행되었으며, 한국 성결인들 또한 그 십자가를 져야 했다.
전남 임자도의 진리교회에서는 48명이,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66명이, 전북 정읍의 두암교회에서는 22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 전쟁으로 성결교회는 110여 개의 교회가 파손되었으며, 목사 9명, 전도사 2명, 장로 5명을 포함해 160여 명이 순교를 당해야 했다.
여기에 납북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아진다.
셋째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십자가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 목자 됨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모든 목양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를 통해 초기 성결교회 사역자들이 가졌던 그러한 정신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에게는 이 순교를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양떼들을 홀로 고통 속에 둘 수 없다는 목자의 심정으로 증동리교회를 찾아갔다가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순교의 사건이 있기 전 문준경 전도사는 양도천, 이봉성 전도사 등과 함께 특별 감시 및 교육대상에 차출되어 증동리에서 목포 정치보위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이미 목포에는 국군이 상륙하여 공산당들은 모조리 철수하고 없었다. 이에 세 사람을 압송하던 내무서원들은 세 전도사에게 친척집 등으로 가라고 이르고는 도망가 버렸다. 양도천 전도사는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포에 머물렀고, 문준경 전도사는 잠시 친정을 방문한 뒤 공산당들을 피해 숨어 있던 이성봉 목사를 찾아가 증동리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다.
그때 이성봉 목사는 증동리에도 국군이 들어가 공산당을 완전히 토벌한 뒤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다. 하지만 문준경 전도사는 증동리에 있는 신자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제가 죽을지언정 저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백 전도사가 제 대신 남아 모진 수모를 당할 텐데, 어서 돌아가야지요. 한시라도 빨리요”라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증동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이러한 자기희생적 사랑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문준경 전도사와 함께 백사장의 처형장으로 끌려온 양민들의 행렬 속에는 백정희 전도사도 함께 있었다. 백 전도사는 평소에 문준경 전도사를 어머니처럼 섬기며 따랐고, 문준경 전도사도 백 전도사를 딸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이러한 그녀였기에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 폭도들이 자신을 죽창으로 찌르고 총대를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제발 저 백 전도사만은 살려주시오. 제발...” 하며 애원하였다. 결국 이러한 문준경 전도사의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백 전도사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가 갖는 성결교회사적 의의를 반추해 펴보았다. 그녀의 순교 속에서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의 신비와 또 다른 생명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아름다운 헌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제는 그러한 순교자적 정신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통해 교단의 자긍심을 높이고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로 순교자들의 사적과 신앙에 대한 조명 작업이 교단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이러한 사업은 주로 관련 있는 몇몇 사람이나 혹은 기념사업회 등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아름다운 순교자적 신앙전통이 가족사 혹은 개교회사적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후손들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순교자들에 대한 조명 작업이 한쪽으로 편향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교단의 상징인 순교자적 신앙의 전통을 제고하기 위해 교단적인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사실 전통적으로 성결교회는 역사를 만드는 데는 여타 교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정리 보존하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면에는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성결교회의 소중한 전통 가운데 하나인 이러한 순교자적 신앙전통의 보존 및 승계를 위해 교단적인 차원에서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대중화하는 작업을 통해 교단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는 사람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은 보고 느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와 학생들 그리고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바다를 쉴 사이 없이 클릭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감동시키는 만화, 영화, 공연 등의 볼거리를 찾아 몰려다니고 있다. 교회는 잘만 계발하여 사용하면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신앙적 자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순교자들의 생애와 신앙은 그 대표적인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소재들을 만화, 영화, 인터넷 동영상 등으로 제작하여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이러한 순교자들의 사적지에 대한 보존 및 복구와 성지화 작업을 비롯하여 순교자기념관 등의 건립이 시급하다. 그리고 개교회의 야외활동, 청년 학생들의 수련회를 비롯한 각종 활동과 이들 장소를 연계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나 장로교 등에서는 이러한 작업들이 많이 진척되고 있다. 가끔 필자에게 성결교회의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몇몇 장소를 안내하기는 하지만 매우 당혹스럽다. 마땅히 추천할 만한 장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성결교단은 이제 창립 1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제 역사의 정리와 보존 그리고 승계를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허명섭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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