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본질/전도(선교)

문준경전도사 동영상

하마사 2007. 9. 14. 22:18

http://video.naver.com/2007081216565249815

 

 

섬 교회의 어머니 문준경    



↑ 문준경전도사  
믿음 생활하면서도 세상에 익히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91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에서 태어난 문준경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70년대 초 학생 운동에 뛰어 들던 시절입니다.
그 때 CCC 선교 단체의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인용하셨습니다.
자세한 기억이 살아나지 않았지만 11개의 섬들을 나룻배로 하루 종일 찾아 그야말로 삶을 나누며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와 문 전도사님 개인의 애절한 집안 환경의 설명들입니다.

최근에 수소문 끝에 헌책방에서 ‘순교자 문준경’이라는 책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설레임 반 기대 반으로 선뜻 책뚜껑을 열지 못했지만 하룻밤을 지새우며 눈물로 읽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하리 만큼, 삶은 신앙, 신앙은 곧 삶으로 살았던 순교자입니다. 어찌보면 무명의 순교자입니다.
나룻배에 몸을 싣고 해가 저문 저녁에야 나약한 여인의 안식이 있었을 만큼 매일 11개의 섬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들어 선 일 없는 교육의 배경이지만 당시 이성봉 목사님이 즐겨 부르시던 희망가, 천당가, 부흥 성가를 부를 때면 그 낭랑한 음성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집 마당에 가득 했습니다. 평생에 6개 교회를 세웠을 정도로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원래 친정도 시집도 꽤 잘사는 집안이었습니다. 열일곱살 때 시집가는 결혼 초야부터 버림받고 며칠 후에는 신랑이 다른 섬에서 소실을 얻고 살림하면서부터 세상에서는 잊혀진 여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 없는 시집 살이 20년, 길쌈하고 바느질하면서 극진히 시부모를 모셔서 마을 사람 모두가 효부라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삯바느질로 번 돈은 송아지를 사서 여러 집에 나누어 주고 혹 이익이 생기면 남편이 와서 소실과 사는 살림 비용으로 가져 가곤 했습니다.

글을 몰랐기에 땅바닥에 글을 쓰고 지우며 한글을 터득하고 후에는 경성 성서학원(성결교 신학교 전신)에 가서 일년을 공부했습니다.
물론 피눈물 나는 고학이었습니다. 바늘 장수, 물장수, 삯 바느질, 허드렛 일을 하면서도 그의 기숙사 방은 ‘사랑방’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재학생들이 어머니처럼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사도행전적인 원색적 믿음 생활을 하면서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한 번은 홀 어머니 병환 때문에 울고 있던 여학생의 사정을 듣고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재봉틀을 팔아서 백원을 마련해 주고 훌쩍 그 자리를 떠난 적도 있습니다.

문전도사의 영적 슬하에서 성결교의 중견 이만신 목사, 이봉성 목사 등 십 여명의 중진 목사가 배출되었고, 섬겼던 교회 중의 하나인 진리 교회에서는 그가 자식처럼 양육한 제자 중에 열 세 명의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교회에서 살았던 그의 집은 ‘목민센터’ 였습니다. 오갈 곳 없는 이들, 병든 사람, 신불신자 할 것 없이 소외된 식객들로 가득했습니다.

항상 커다란 가방을 메고 다녔는데 그 속에는 감기약, 연고, 민간 비방약 누룽지 등이 채워진 만물상 보따리였습니다. 그는 산파는 아니었으나 아기를 받는 데는 소문이 멀리까지 나 있을 정도였습니다.

1950년 10월 5일 하늘에는 먹장 구름 덮였고 파도 소리마저 침묵하던 밤, 30년을 살았던 백사장에서 공산당에게 죽창에 찔리고 발길에 채이며 59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반열에 섰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의 뒤안길에 밑거름처럼 가리웠던 한 여성 순교자, 그는 우리 시대의 믿음의 어머님입니다.
그 믿음 씨앗이 21세기 한국 교회의 꽃처럼 피어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06. 12. 23. 아멘넷 / 이종승 목사)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에 대한 성결교회사적 평가와 과제
순교는 흔히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 폭정과 부정의에 대한 항거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순교의 거룩성과 아름다움은 신앙의 수호를 위해 총칼보다는 사랑의 죽음을 택했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 신앙의 순교는 역사 속에 하늘의 별처럼 찬연히 빛나고 그러한 이야기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거룩한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경, 소란스럽던 증동리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갑자기 “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작지만 또렷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공산 폭도들의 무자비한 총칼 아래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문준경 전도사가 내뱉었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은 오늘도 거룩한 메아리가 되어 수많은 심령 가운데 울리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가 갖는 성결교회사적 의의를 생각해 봄으로써 그 의미를 반추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성결교회의 여성 사역자로는 첫 순교의 자리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성결교회의 역사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께 헌신했던 수많은 여성사역자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수난으로 점철된 성결교회의 숨결을 함께 호흡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단의 부흥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40세의 늦깎이 나이에 헌신했지만 유난히도 많은 시련을 겪었던 문준경 전도사 또한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섬 교회의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섬 지역의 복음화에 헌신하였다. 경성성서학원에 재학 중에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임자도 진리교회는 그 지역 최초의 교회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 지역과 주변은 복음의 처녀지(處女地)였으며, 그녀의 전도에 의해 비로소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공산 폭도들이 문준경 전도사를 무참히 살해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녀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며 “그냥 놔두면 더 많은 새끼를 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문준경 전도사는 한국성결교회, 더 나아가 한국교회 전도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동시에 그녀는 성결교회 최초의 여성 순교자로서 한국교회 및 성결교회 여성사의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고 있다.

둘째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가시밭의 백합화’로 상징되는 성결교회의 신앙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즉 한국성결교회는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는데,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그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성결교회가 걸어온 역사의 발자취는 ‘가시밭의 백합화’라는 상징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 상징에 내포된 뜻 가운데 하나가 찢겨진 상처로 인해 더욱 진한 향기를 발하는 백합꽃의 속성처럼 성결인의 신앙은 세상의 시련 가운데서 더욱 강렬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다는 것이다.

성결의 복음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던 선교 초기부터 한국성결교회는 수난의 험난한 행로를 걸어야했다. 때로는 친일파라는 오해로, 때로는 상종 못할 이단사설이라는 오해로 여기저기가 뜯기고 찢어졌다. 더욱이 국가시책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되면서 성결교회는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형국이 되었다.
이 와중에 문준경 전도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에 일제에 불려가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사역하던 증동리교회도 경방단에 매각되고 그 대금 또한 국방헌금의 명목으로 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수난의 질곡 속에서도 성결인들의 신앙은 쇠하지 않고 더욱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성결인들의 그러한 신앙은 이 민족의 해방과 함께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일제에 의해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한편 각처에 새로운 제단들을 설립하면서 힘차게 약진해 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약진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 민족이 동족상잔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서 한국 성결인들 또한 그 아픔을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절정에는 순교의 사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의 박멸을 꾀하는 공산도배들의 폭거에 항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다 맞게 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도 그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전쟁의 와중에 저질러진 공산주의자들에 만행은 말로 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든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상하려 했다. 그로 인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여기저기서 자행되었으며, 한국 성결인들 또한 그 십자가를 져야 했다.
전남 임자도의 진리교회에서는 48명이,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66명이, 전북 정읍의 두암교회에서는 22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 전쟁으로 성결교회는 110여 개의 교회가 파손되었으며, 목사 9명, 전도사 2명, 장로 5명을 포함해 160여 명이 순교를 당해야 했다.
여기에 납북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아진다.

셋째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십자가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 목자 됨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모든 목양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를 통해 초기 성결교회 사역자들이 가졌던 그러한 정신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에게는 이 순교를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양떼들을 홀로 고통 속에 둘 수 없다는 목자의 심정으로 증동리교회를 찾아갔다가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순교의 사건이 있기 전 문준경 전도사는 양도천, 이봉성 전도사 등과 함께 특별 감시 및 교육대상에 차출되어 증동리에서 목포 정치보위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이미 목포에는 국군이 상륙하여 공산당들은 모조리 철수하고 없었다. 이에 세 사람을 압송하던 내무서원들은 세 전도사에게 친척집 등으로 가라고 이르고는 도망가 버렸다. 양도천 전도사는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포에 머물렀고, 문준경 전도사는 잠시 친정을 방문한 뒤 공산당들을 피해 숨어 있던 이성봉 목사를 찾아가 증동리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다.
그때 이성봉 목사는 증동리에도 국군이 들어가 공산당을 완전히 토벌한 뒤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다. 하지만 문준경 전도사는 증동리에 있는 신자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제가 죽을지언정 저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백 전도사가 제 대신 남아 모진 수모를 당할 텐데, 어서 돌아가야지요. 한시라도 빨리요”라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증동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이러한 자기희생적 사랑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문준경 전도사와 함께 백사장의 처형장으로 끌려온 양민들의 행렬 속에는 백정희 전도사도 함께 있었다. 백 전도사는 평소에 문준경 전도사를 어머니처럼 섬기며 따랐고, 문준경 전도사도 백 전도사를 딸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이러한 그녀였기에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 폭도들이 자신을 죽창으로 찌르고 총대를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제발 저 백 전도사만은 살려주시오. 제발...” 하며 애원하였다. 결국 이러한 문준경 전도사의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백 전도사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가 갖는 성결교회사적 의의를 반추해 펴보았다. 그녀의 순교 속에서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의 신비와 또 다른 생명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아름다운 헌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제는 그러한 순교자적 정신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통해 교단의 자긍심을 높이고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로 순교자들의 사적과 신앙에 대한 조명 작업이 교단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이러한 사업은 주로 관련 있는 몇몇 사람이나 혹은 기념사업회 등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아름다운 순교자적 신앙전통이 가족사 혹은 개교회사적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후손들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순교자들에 대한 조명 작업이 한쪽으로 편향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교단의 상징인 순교자적 신앙의 전통을 제고하기 위해 교단적인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사실 전통적으로 성결교회는 역사를 만드는 데는 여타 교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정리 보존하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면에는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성결교회의 소중한 전통 가운데 하나인 이러한 순교자적 신앙전통의 보존 및 승계를 위해 교단적인 차원에서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대중화하는 작업을 통해 교단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는 사람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은 보고 느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와 학생들 그리고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바다를 쉴 사이 없이 클릭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감동시키는 만화, 영화, 공연 등의 볼거리를 찾아 몰려다니고 있다. 교회는 잘만 계발하여 사용하면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신앙적 자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순교자들의 생애와 신앙은 그 대표적인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소재들을 만화, 영화, 인터넷 동영상 등으로 제작하여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이러한 순교자들의 사적지에 대한 보존 및 복구와 성지화 작업을 비롯하여 순교자기념관 등의 건립이 시급하다. 그리고 개교회의 야외활동, 청년 학생들의 수련회를 비롯한 각종 활동과 이들 장소를 연계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나 장로교 등에서는 이러한 작업들이 많이 진척되고 있다. 가끔 필자에게 성결교회의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몇몇 장소를 안내하기는 하지만 매우 당혹스럽다. 마땅히 추천할 만한 장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성결교단은 이제 창립 1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제 역사의 정리와 보존 그리고 승계를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허명섭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원)



문준경 전도사    


내 신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신앙의 선배는 누구일까? 책에서 만난 많은 성자들, 내가 모시고 배운 흠모하는 스승들, 주님의 제자같은 사람들 가운데서 복합된 모자이크처럼 나의 신앙의식의 상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심층심리를 분석해보면 각 사람의 의식의 뿌리는 인류의식의 공동의 호수에 맞닿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인류 전체와 크리스천 전원의 산물일 것이다. 물론 내가 소개하고 싶은 존경하는 스승들이 있다. 그러나 그 분들은 너무 많이 알려졌고, 만인의 사표인지라, 나와의 관계를 개인화시키면 오히려 그 분들을 격하시키지나 않을까 염려도 되어 숨겨져 있는 무명의 순교자 한 분을 소개하고 싶다.


내 신앙의 원초적 뿌리
문준경 전도사님은 성결교단에는 알려져 있지만, 한국 교회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6.25사변 때 공산당에게 전남의 낙도 증동리 모래사장에서 59세의 일기로 순교하신 분이다.

그 분은 내 아버지의 외사촌과 결혼하신, 우리 가족의 친척이셨다. 그 분은 지금은 예수님만으로 밤마다 철야로 지새우는 권사님이신 나의 어머니와 함께, 세상에서 나에게 맨처음으로 예수님을 소개해주신 내 시골 이모님같은 분이시고,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나를 맞아주실 것 같은 분이시다.
또한 나의 가족이 학살되고 나도 죽다가 살아난 6.25때, 하마터면 같은 섬에서 순교의 동기생이 될 뻔했던 분이시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나룻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와야 하는 우리 집에 그 분은 종종 찾아오셔서, 몹시 외롭게 하시던 우리 어머니와 머물면서 전도집회를 열곤 하셨다. 수수한 아주머니처럼 고무신을 신고 과자 선물을 듬뿍 가지고 오셔서 껴안고 기도해주시곤 하셨다.

초등학교도 다닌 일이 없고, 도레미파를 배운 적도 없지만, 그 분 특유의 낭랑한 목청으로 당시 이성봉 목사님이 많이 부르시던 허사가나 부흥성가, 천당가를 부르면, 우리 집 마당으로 동네 아낙네들과 어린이들과 강아지까지 다 모였다. 그러면 그 분은 일장(一場) 전도설교를 시작하곤 했다.

나는 당시에 그 분이 무식한 말을 한다고 생가했다. 예수는 4대 성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가르쳤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이 오시면 잔치같은 분위기가 되는 것이 왠지 모르게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내 신앙의 혈액검사를 하고 원초적 뿌리찾기를 해보면 그 분은 내 신앙의 지하실에 예수의 씨앗을 최초로 심어준 분으로 발견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죽임당한 여인은 가엾다. 버림받은 여인은 더 측은하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다."라고. 문전도사님은 친정도 시댁도 꽤 잘사는 집안이었다. 열일곱살 때 암태 문씨 집안에서 증동리 정씨 집안으로 시집왔는데, 결혼 초야(初夜)부터 버림받고 며칠 안되어 신랑이 집을 나가 다른 섬에서 소실을 얻고 살림하면서부터 잊혀진 여인이 되었다.

시집에서 20년을 살 때, 길쌈하고 바느질하며 들일하고 부엌일하며 극진히 시부모님을 모셨다. 효부라고 소문이 자자했으나 피눈물나는 시집살이도 참아야 했다. 손재봉틀로 삯바느질 해서 송아지를 여러 마리 사서는 여러 집에 나누어 주었다가 크면 이익을 서로 나눴는데, 모은 돈은 남편이 가져다가 딴 살림하여 소실과사는데 써버렸다. 하도 한이 맺혀서 기도문을 써서 천지신명에게 소지(燒紙)를 올린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불쌍한 딸자식처럼 측은하게 사랑해주었던 시아버지가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땅바닥에 글을 쓰고 지우며 글을 익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가운데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삼년상(喪)을 치르고 목포에 사는 오라버니의 권유로 셋방 하나를 얻어, 20년 시집생활을 청산하고 손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도시로 올라왔다.


예수님과의 만남
그 무렵 성결교단에는 오순절같은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목포에는 북교동교회에서 이성봉 목사님이 부임하여 축호전도니 하며 부흥성회에 불이 붙은 때였다. 문준경 전도사님이 그 전도팀의 그물에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님을 만났다. 이성봉 목사님이 그에게는 직접적인 천사였다. 천국이 있었다. 눈물의 샘이 터졌다. 항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의 뒤로 발 곁에 서서 울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머리털로 씻고 입맞추었던 여인 속에서 문 전도사님의 삶의 영상을 찾을 수 있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기에 그토록 오래인 그리움이여!"(어거스틴의 고백). 늦게야 님을 만나나 그 분에게는 밤낮의 구별이 없었다. 밤을 살고 새벽을 살며 열심히 배우고 교회를 섬기며 전도를 했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다.
그 나이 37세 때였다. 신앙성장의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교회집회, 장례식, 혼인식 때면 문 집사님은 그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특송을 했다.

일가 친척, 친지들 집을 칡넝쿨같은 연줄을 타고 행상여인같이 축호전도로 누볐다. 첫 전도여행을 암태면의 친정으로 떠났다. 20년만에 집을 찾은 불쌍한 생과부 딸을 맞은 부모님의 가슴은 아팠다. 골수 유교전통의 아버지께 전도하기란 무리한 일이었다.

"네가 시집가서 고생하더니 서양귀신 들려 실성했구나."하고 오물을 퍼다 머리 위로 퍼부으면서 "썩 물러가라."할 정도였다. 길을 가며 찬송하고 꿈 속에서도 찬송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한 맺힌 인생 때문에 눈물의 샘은 마를 날이 없었다.

경성성경학교는 성결교신학교였다. 6개월은 전도실천하고, 6개월은 공부하는 6년제 학교였다. 문 전도사님은 처음에는 청강생이었으나 뒤에 원입생이 되었다. 물론 고학이었다. 마늘장수, 물장수, 삯바느질 등 온갖 일을 했다. 고되고 허기졌지만 꿈만 같았다.

그의 기숙사 방은 '사랑의 방'으로 소문이 났다. 여학생들이 어머니처럼 따랐다. 그의 삶은 항상 사도행전의 원색적인 신앙생활이었다. 한 번은 병든 홀어머니 때문에 울고 있는 여학생을 보고 단 하나의 재산인 손재봉틀을 들고 나가 팔아서 100원을 마련해주었다. 또 한번은 유일의 유산인 명화병풍을 200원에 팔아 딱한 신학생을 도왔다.

이런 일화도 있다. 6개월의 인턴 실습을 마치고 목포역으로 돈 없이 가고 있었다. 학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과 행상하는 여집사님이 "돈도 없이 나왔지라우?"라고 말했다. 여집사는 문 전도사님에게 돈 한푼 없음을 알고 있었다.

문 전도사님은 "사람이 가지, 돈이 간당가?'라고 대답했다. 그 여집사님이 학비를 마련해주었다. 이것이 그 분 삶의 연속이었다.


씨앗의 씨앗은 셀 수가 없다
열한 개 섬을 24시간 이 섬에서 저섬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나룻배를 타고 건너다니셨다. 그 분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나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섬사람들에게 그 분은 예수의 증인이었고 편지였다.

증동리교회를 세울 때에는 시숙(媤叔)과 전도받은 시집 친척들, 이만신 목사님 자당(慈堂)을 포함하여 20여 명 성도들과 함께 한 달동안 목재와 기와를 이어 나르고, 터닦고 흙 일구느라 손발이 터졌다. 그렇게 하여 대초리, 방충리, 우전리, 병풍리, 진리, 재원 등 많은 교회들이 그 분의 몸으로 세워졌고 또 지교회들도 세웠다.

그 분이 전도해서 키운 성결교 중진 목사인 이만신, 이봉성 목사 외 10여 명의 목사님들, 그들의 제자의 제자들이 오늘도 그 순교정신을 이어 복음의 씨앗을 부리고 있다. 진리교회에서는 그가 키운 이판일 장로, 이판성 집사의 두 가정, 열세 명이 순교했고, 유일한 유족인 이인재 목사님은 그 뒤를 이어 목회를 하고 있다.

렘브란트의 명화 「십자가형」에는 그 현장의 다양한 인물들의 독특한 개성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가장자리에 그림자처럼 희미한 인물 하나가 숨어있다. 렘브란트는 그가 바로 렘브란트 자신이라고 시사한다. 문준경 전도사님 가족들 가운데 나는 저만치 멀리 서있는 렘브란트 같은 존재다. 그러나 내 속에서도 씨앗은 심겨져 퍼지고 있다.

"사과 한 알의 씨앗을 셀 수 있어도 씨앗의 씨앗은 셀 수가 없다."
그가 세운 교회들은 일제 때 성결교단 폐쇄령으로 친일 앞잡이들이 빼앗아 경방단 본부로 사용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로 시달림을 받았다.
성도들이 비밀 예배를 드릴라치면 골목에서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는 과로와 영양실조로 심한 각혈을 하며 사경을 헤메이기도 했다.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은 빨갱이로 변신하여 온갖 박해와 폭행을 자행했다. 6.25 직전에는 예레미야의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끓는 가마'의 경고를 하며 어느 여인보다 많은 우국의 눈물을 흘렸다. 그 분은 자신의 순교를 예감했는지 미리 관을 짜놓고 수의를 손수 만들어 놓았었다.


마을의 사제, 만인의 목자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자 몸이 약하니 공기 좋은 섬에 와서 좀 휴양하라고 권해서 나는 친구 목사를 데리고 문 전도사님 댁에서 3개월 동안 식객(食客)이 된 일이 있었다. 그 분의 교회나 사택은 차라리 목민센타였다.
무엇이나 의논하고 돌봐주는 곳이었다. 그 집은 항상 너댓 명씩 귀신들린 여인, 반신불수되어 쫓겨난 오갈 데 없이 버려진 여인들의 숙소였다.
대소변을 받아내느라 방에서는 악취가 났다.

문 전도사님은 밤낮을 교회에서 살면서 새벽같이 큰 바랑같은 것을 들쳐메고 나가 누룽지나 잔치집, 제삿집의 음식을 걷어서 가난한 집에 나눠주는 '대신 거지'였다. 바랑 속에는 김기약이나 연고, 민간비방약 같은 것이 듬뿍 있어서 병자들을 심방해 부담없이 약을 먹이고 발라주고는 만져주고 기도를 하였다. 병이 소문나게 잘 나왔다. 신 불신(信 不信)을 가리지 않았다.

초상집도 찾아가고 싸움하는 집도 찾아갔다. 모두의 가난과 고통에 자기 피부를 맞대고 살았다. 그 분은 산파는 아니었으나 아기를 받는 데는 누구보다 명수였다.

그 마을은 미신이 많은 곳이었다. 재앙을 입고 동티가 나면 무당을 불러 굿하는 것이 행인데도 많은 집에서 무당 대신 문 전도사님에게 기도를 청했다.
내 친구는 그가 무당같다고 했다. 나는 "이보다 더 거룩한 무당도 있는가?"라고 했다. 그는 그 마을의사제(司祭)였고 간호사, 산파, 목자, 만인의 어머니였다.

일제시대 이 마을에 장질부사(염병)가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전염이 무서워 버려진 환자들이 많았다. 가족들조차 시체 치우는 일을 기피했는데, 문 전도사님이 "나는 어차피 홀몸이니 죽어도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보고 시체를 매장한 이야기는 소문난 미담으로 전해진다.

내가 신학교에 간 것을 누구보다 기뻐하신 분은 문 전도사님이셨다. 한 번은 내게 찾아와 돈이 있는지 물으셨다. "어떻게 되겠지요."하고선, 그때 마침 미군부대에 다니던 친구가 가져다준 다이야찐 고약 수천개를 목회하는 데 쓰십사고 드렸다. 그런게 그것을 집집마다 팔아서 근1년 학비를 만들어 보내주신 일도 있었다. 나와 친구가 그 집에 머물던 석달 동안, 기뻐하시며 펄펄 뛰는 생선요리, 젓갈, 풋나물 등으로 지성을 다해 끼니 때마다 메뉴를 바꾸어 잔치상을 베푸셨다.


백사장의 순교
6.25 대는 남편과 소실이 붙잡혀 있는 감옥에 매일같이 세탁이니 음식이니 뒷바라지를 해 모두를 감격시키셨다. 지방 빨갱이들은 문 전도사님이 모두의 존경이 크므로 직결 처분을 못하고 상부인 목포 내무서로 이송했는데, 목포는 이미 빨갱이들이 도망가고 없어서 자동 석방이 되었다.

그런데 문 전도사님은 교인들을 못잊고 특히 양딸 삼은 백 전도사님을 못잊어 모두가 말리는데도 도살장같은 증동리로 되돌아와서 붙잡혀 모래밭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죄목은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이란 것이었다.
찔리고 맞으며 개처럼 끌려갔다. 가상(架上)의 칠언(七言)처럼 사뭇 기도를 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전도사님이 백 전도사님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형지(刑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분의 모습은 십자가상에서 어머니를 부탁하신 주님을 연상케 했다. 백 전도사님은 그 분을 못잊어 3년 동안 흰 소복을 입었고, 지금도 새벽마다 눈물로 교회 마룻바닥을 적신다. 그 백 전도사님은 낙도 중의 낙도, 문 전도사님이 세운 재원교회를 지키고 계신다.

1950년 10월 5일,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고 파도소리도 침묵하는 칠흙의 심야에 그 분이 30년을 살았던 백사장으로 끌려갔다.
죽창으로 찔리고 발길로 채이고 총대로 찍히어 반죽음이 되면서도 사뭇 저들을 용서하라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스데반과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몸이 벌집이 되기 전 "주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했다. 문 전도사님이 순교현장에서 드린 최후의 기도였다. 이 때 문준경 전도사님은 59세였다.


못잊어하는 사람들
1951년 순교 1주년 되는 그 분의 환갑날, 장례추도식이 있었다. 호남지방 성결교 남녀 교역자들이 다 모여 건을 쓰고 상복을 입었다.
전도받은 교인들, 도움받고 못잊어하는 사람들, 전도받은 시가집 사람들, 친정 일가 친척들, 그를 죽였으나 용서받은 식구들, 동네사람들 등 흰옷 입은 구름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상여 뒤를 따랐다. 서울에서 온 어느 성도는 "김구 선생 장례식보다 추모 인파가 많다."고 했다.

증동리교회당은 순교의 피묻은 현장의 모래로 만든 벽돌로 신축되었다. 평소에 그 분은 양딸인 백 전도사님에게 자기는 정씨 문중 선산에 묻힐 수 없으니, 자기가 죽으면 그 산 아래 밭의 한 모퉁이에 묻어달라고 했다.
순교 1주기 때 이 얘기를 들은 정씨 문중에서는 전도받은 분들도 많아 문중회의를 열었다. 결국 그 분은 문중을 빛낸 분이니 선상 중앙에 모시자고 만장일치로 결의해서 지금 그 분의 묘는 정씨 문중 선상 한가운데에 있다.

한국 교회의 밑거름처럼 숨겨져 있는 한 여성 순교자, 한하운의 가도 가도 전라도길, 황토길을 더 가서 노두길 나룻배길 낙도길가에 핀 진달래같은 우리들의 룻이여, 에스더여, 마리아여! 어머니라고 불러버리고 싶은 나의 아주머니. 어느 집으로 시집을 갔더라도 현모양처였을 분. 착하디 착하신 집사님,

충성스런 여 전도사님, 갈릴리에 태어났더라면 막달라 마리아와 수산나와 요안나와 함께 주님을 섬기다가 십자가 밑에서, 주의 무덤가에서 울고 있었을 분. 내가 부탁하면 대신 죽기라도 해주셨을 문준경 전도사님... 증동리 백사장에 피흘려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가 중국 땅에 일억 배로 퍼지소서.

이 작은 글을 통해 나의 추모와 사랑과 존경을 문준경 전도사님의 영전에 드립니다. 또한 문 전도사님이 제게 심으신 믿음의 씨앗을 퍼뜨려 10면명 대학생을 중국 땅에 보내고 싶습니다. 김준곤 목사(한국CCC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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