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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사 2007. 3. 15. 10:03
김영성 장로 부부 “야소로 독립운동…” 옛 역사 지켜야죠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청량산 줄기의 산골마을 척곡리에 자리잡은 98년 전통의 척곡교회(예장통합 영주노회). 인구가 줄어들면서 14명의 성도만 남은 작은 교회로 퇴락했지만 김영성(80) 장로와 안난희(75) 권사 부부의 헌신으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되찾고 있다.

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김 장로가 척곡마을로 내려온 것은 지난해 6월. 10리를 걸어가야 버스를 탈 수 있고 휴대전화도 제대로 걸리지 않는 오지 마을이지만 할아버지 김종숙 목사가 세운 척곡교회를 지키기 위해 낙향을 결심했다.

김 장로는 “해외로 이민 간 아들들이 빨리 들어오라고 난리지만 할아버지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교회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면서 “지금도 우리가 떠나버리면 교회가 금세 허물어질 것 같아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장로 부부는 낙향하자마자 담임목사도 없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교회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수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새벽예배와 금요기도회를 인도하며 작은 산골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주일예배 때는 김 장로가 직접 피아노 반주까지 맡았다.

문서고에 보관돼 있던 오래된 서류와 책자들을 정리하는 일도 김장로의 몫. 먼지 쌓인 옛 교적부를 뒤적이다가 교회 창립 당시의 기록을 발견하는 뜻밖에 소득도 거뒀다.

척곡교회가 1908년 세워졌다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내용과 달리 1907년 11월에 교인들이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사로부터 학습을 받았다는 기록을 찾아낸 것. 이로써 척곡교회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영주 내매교회,봉화 문촌교회와 함께 경북 북부지방 초대교회사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척곡교회를 세운 김종숙 목사의 발자취를 복원해낸 것도 큰 소득이었다.

김 목사는 대한제국 탁지부 관리를 지냈지만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와 강연을 듣고 ‘야소교를 믿어야 조국을 개명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 목사는 이듬해 가솔들을 이끌고 처가가 있던 봉화군으로 낙향,전도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0리를 걸어 상운면 문촌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다니던 김 목사는 척곡마을 성도들과 함께 기도실을 세웠고 1907년 이를 교회로 발전시켰다.

교회 바로 옆에 ‘명동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조국 독립을 위한 후진 양성에도 뛰어들었다.

1926년에는 경안노회 목사 및 성도들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일경에 적발돼 모진 고초를 겪었고 광복 직전인 1945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사실도 확인됐다.

김 장로는 이런 성과에 힘입어 척곡교회를 지키고 가꾸기 위한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

현재 ‘척곡교회 98년 사료집’을 펴내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김 목사에 대한 독립유공자 선정과 교회 예배당 및 서숙 건물에 대한 지방문화재 등록도 추진중이다.

9칸 규모의 기와집 예배당과 6칸 규모의 초가집 서숙으로 건축된 척곡교회는 일부 보수공사가 이뤄지긴 했으나 원형이 대부분 보존돼 있다.

특히 예배당의 경우 기역(ㄱ)자 내지 일(一)자 형 교회가 대부분인 초대교회와 달리 정사각형으로 지어져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 장로는 “교회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척곡교회 100년사를 발간하고 김종숙목사 기념관을 교회 옆에 짓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송세영기자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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