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내매교회

내매교회 출신 강문구목사 관련 기사

하마사 2007. 3. 15. 10:18

순교자 강문구목사

 

 

“아, 글쎄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를 거센 파도가 삼키듯이 덤벼드는 것이 아닌
가요? 휘이이-잉” “그때 예수님이 파도에게 호통을 치셨어요. 파도야! 잠잠해
라!”
주일학교 학생들은 젊은 교사의 이야기에 그만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이렇듯 강
문구는 기가 막힌 소리를 흉내내며 유머넘치는 이야기로 이미 학생때부터 어린이
부흥사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1910년 1월 20일 경북 영주군 이산면 신천리에서 내매교회 강석초 장로와
이중평 권사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해 책을
많이 읽어 그의 부모는 그가 학자가 되길 은근히 기대했다고 한다. 그후 대구 계성
중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숭실전문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학생시절 그는 주일학교
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구연동화는 물론 시청각교재를 사용한 교육에도 일가
견이 있어 방학이면 전국 교회를 돌며 강습회 지도자를 하기도 했다. 그후 1935
년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목양의 뜻을 두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다.
강문구는 신학교에서 ‘겨자씨’라는 신앙잡지를 방지일, 박윤선 등과 함께 발행
하였다. 이 잡지가 후에 ‘신앙세계’이다. 그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신학
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잔인한
압박으로 인해 그의 재능은 점점 위축되어만 갔다.

일제의 악랄한 탄압을 이겨낸 강목사는 1945년 해방을 맞으며 비로소 활기를 띠
기 시작한다. 그가 해방을 맞아 먼저 한 것은 폐교당한 교단의 신학교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는 새로 조직된 신학교수의 한 사람으로 평양신학을 민족교회의 보
루로 만들겠다고 동분서주했다.
당시 교장은 미국 유니온 신학대를 졸업한 김인준 목사였다.
해방 이후 이북을 강점한 공산정권에도 그는 당당했다. 급기야 1947년 정월에 시
베리아로 압송되어 버렸고 이성휘 박사가 그 뒤를 잇게 된다.

강문구 목사를 비롯한 신학교의 목사들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공산
당과 팽팽히 맞섰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다해 오직 하나님을 붙잡은 그들은 과연 십자가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1950년 3월 이른 새벽에 강목사는 신학생들을
향해 설교한다. “사명자의 목소리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 시대를 선도해야 합니
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설교를 마지막으로 공산
당에게 체포되어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아내와 제자들에게 한마디
작별의 인사도 없이…

'교회역사 > 내매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매교회  (0) 2009.10.04
내매교회 강록구 장로님의 말  (0) 2008.12.06
내매교회 관련기사  (0) 2007.03.15
내매교회 100주년 감사예배 순서지  (0) 2006.10.19
내매교회  (0) 2006.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