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사회봉사의 신학적 근거
김용복/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1. 서론
우리가 하는 행동은 우리의 믿음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그 처한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정확한 척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William L. Hendricks, "A Theological Basis for Christian Social Ministries," Review & Expositor, 85, 2 (Spring 1988), 221.
교회에서 사회봉사를 강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앙과 행동의 상호관련성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요구하는 행동하는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행동반경을 사회봉사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봉사는 교회의 주요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1) 사회봉사의 의미
사회봉사(social services)란 용어는 사회복지(social welfare), 사회사업(social work), 사회정책(social policy) 등과 같은 범주에서 대체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통합개념으로 쓰이는 개념은 사회복지일 것이다. 김영모, 「사회복지학」 (서울: 한국복지정책연구소, 1997), 1.
사회정책이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과 그 결과물을 의미한다면, 사회복지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정부와 민간이 정책과 필요한 서비스를 통해 사회적 역기능을 예방하고 경감시키기 위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손인웅, “교회 사회복지 참여의 신학적 근거,” 「교회의 사회복지 참여하고 실천하기」,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사회복지위원회 편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27.
여기서 사회복지는 좁은 의미에서 비영리적인 활동을, 넓은 의미에서는 영리적 목적을 위해 실행하는 활동까지 모두 포함한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사회복지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근본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건강상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국가의 프로그램이나 구제 및 봉사 체계”를 말하고, 좁은 의미에서 보면, “재난과 가난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적이거나 자원봉사적인 사회의 비영리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Ralph Dolgoff, Donald Feldstein, Undestanding Social Welfare (Needham Heights, MA.: Allyn and Bacon, 2000), 111-2.
그런데 사회사업이 사회복지 기관들이나 사회봉사 구조 안에서 실행되는 하나의 전문화된 직업을 의미한다면, 사회봉사는 개인봉사(personal services)와 기관봉사(institutional services)를 모두 포괄하면서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넓게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 사회복지 기관으로 인식되지 않은 단체나 기관에 의해서도 실행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회봉사든 그것은 단순히 문제를 대체하거나 바로 잡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상황에 따라 새로운 반응을 제시하는 목표를 가져야 할 것이다. Dolgoff, 114-5.
이 글에서 사용된 사회봉사란 의미는 “교회의” 사회봉사라는 수식어를 필요로 하는 좀더 신학적 차원에서 협의적으로 접근된 것이다. 그 점에서 교회의 사회봉사는 목적, 대상, 방법 면에서 일반 사회사업이나 사회봉사와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교회의 사회봉사는 반드시 전문적인 영역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사회봉사가 비전문적인 성향을 띤다는 이유로 굳이 “교회 사회복지”란 용어를 선호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박경숙, “역사적 측면에서 본 교회의 사회복지 실천의 필요성과 교회의 자원활동,” 「교회의 사회복지 참여하고 실천하기」, 44. 박영호는 같은 이유로 “기독교사회복지”란 용어를 사용한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17.
교회의 사회봉사는 전문성과 비전문성을 모두 포괄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교인들이 주변에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비전문적 자원봉사도 사회봉사의 한 영역으로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봉사는 곧 섬김이다. 둘째, 일반 사회복지나 사회봉사는 주로 인간의 신체적이고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집중한다면, 교회의 사회봉사는 모든 피조물의 영적,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마련해주는데 목표를 둔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봉사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라 이 땅에서 각자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폭넓게 지원하는 교회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존재다. 셋째, 일반 사회복지나 사회봉사의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박애와 같은 휴머니즘에서 출발하지만, 교회의 사회봉사는 이웃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에 근거한다. 손인웅, “교회 사회복지 참여의 신학적 근거,” 「교회의 사회복지 참여하고 실천하기」, 25-30 참조.
2) 한국 교회의 사회봉사 실태와 필요성
초창기 한국 교회는 이 땅에서 사회봉사를 주도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들은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왔다. 19세기 말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시작한 학교들은 대개 고아나 불우한 여성 등을 대상으로 실시된 것이었고, 빈민구제나 맹농아 사업, 의료사업, 사회악 쇄신 운동 등도 대부분 교회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박경숙, 48-9.
특히 한국 감리교회는 1919년 16개조의 “사회신경”(Social Creed)을 채택하여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1997년)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1998), 45.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사회봉사에 너무 인색하다. 그것은 교회에 대한 일반 사회인의 무관심과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을 일러 한국 교회가 “개체교회 성장 제일주의라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한국 교회가 평균적으로 전체 재정 가운데 3.8%만을 사회봉사비로 사용하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김준우, “「21세기 기독교총서」를 발간하면서,” John B. Cobb, Jr.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이경호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11.
한국 갤럽이 조사한 「1998년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 활동 및 신앙의식에 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개신교에 대한 한국인의 평가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이 가운데 비종교인이 종교를 택할 때 개신교를 선택하겠다는 사람은 27.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불교 36.9%, 천주교 35.4%). 또 같은 보고서에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희망 단체”를 선택하는 질문에서 교회를 택한 사람은 비종교인 가운데 1.3%에 그치고 말았다(성당 6.4%, 사찰 6.7%, 사회단체 14.4%, 없다 70.6%). 또한 한국의 비종교인 가운데 자신의 인근 교회에서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는 12.4%에 불과했다. 이상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1가지 이유」 (서울: 기독신문사, 2000), 14, 65, 79 참조.
이런 수치는 단적으로 한국 교회가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으며, 신뢰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으며 또 선호하지 않는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회에 대한 교회의 의식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한 원인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젊은 층과 고학력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외적 성장과 기복신앙을 강조한 채, 사회 문제에 눈과 귀를 감고 있는 현실 때문이라는 지적을 무시하기 어렵다.
한국 교회가 다시 건강하게 부흥하기 위해서는 소홀했던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복음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동시에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바로 잡는 일 모두에 적용되어야 한다. 어느 하나가 외면 당한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사실 교회가 사회봉사나 구제에 나선 것은 초대 교회부터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7명의 집사 선출은 교회의 체계적인 사회봉사를 위한 첫 걸음이었다. 그 뒤 교회는 지금까지 자선활동이나 사회봉사를 주도적으로 해나갔다. 그러다가 18세기 산업화 이후 사회복지의 책임은 교회가 아닌 국가가 담당하게 되면서, 교회의 역할이 차츰 약화되었다. 이제는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될 정도에 이르렀다. 마땅히 주력해야 할 선교사업의 영역임에도 지나치게 개인중심적이고 교회지향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교회는 예전과 같이 사회봉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봉사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교회는 물론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현장에서 교회가 그 일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는가 하는데 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교회의 신학이 제대로 뒷받침해주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당위성을 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회봉사가 교회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동안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외형적으로 성장하기에 급급했고, 교회 밖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쏟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우리는 전반적으로 사회봉사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그림을 짜야 할 필요를 느낀다. 사회봉사에 관한 신학의 정립은 사회봉사의 동기를 부여해주고 그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3) 연구목적과 방법
이 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교회와 사회봉사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봉사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고, 그 방법론적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6하 원칙에 따라 사회봉사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연구는 누가(Who), 무엇을(What), 언제(When), 어디서(Where), 왜(Why), 그리고 어떻게(How) 사회봉사에 임해야 하는가를 신학적 차원에서 살펴봄으로써, 사회봉사의 주체와 대상, 목적과 방법적 원리 등에 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목표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일차적 초점이 있으므로 사회봉사의 기술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2. 사회봉사의 주체: Who?
누가 사회봉사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삶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말과 결코 다른 말이 아니다. 삶이란 사람의 준말이다. 마땅히 삶의 주체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회봉사는 삶을 삶답게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하나의 운동이다. 이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사회봉사의 주체는 사람이다.
1) 교회의 사명
사람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를 따르는 지체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란 뜻이다. 따라서 교회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그분의 사역을 이어서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살리는 일을 하신 분이다. 마땅히 교회도 사람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이요 본질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봉사를 부수적인 사업의 하나로 곁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봉사를 교회의 본질적인 실천 사업 가운데 하나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봉사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회참여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의미한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364.
폴 스티븐스(Paul Stevens)는 하비 콕스가 「세속도시」에서 사회를 향한 교회의 선교를 디아코니아(diakonia, 섬김), 코이노니아(koinonia, 교제), 케리그마(kerygma, 선포)로 구분한 것을 교회의 선교적 차원에서 세 가지 영적 은사로 해석했다. Paul Stevens,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김성오 옮김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2), 123.
교회는 사람을 섬기고,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책임이 있다. 이 섬김과 나눔, 그리고 선포는 실제적인 사회봉사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스티븐스는 교회가 지금까지 실제적인 사회봉사로 인해 좋은 평판을 받아왔다고 말하면서, “역사상 교회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단순히 개인적인 구제와 긍휼과 선한 의지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한 사회 기관의 개혁”이라고 평가한다. Ibid., 125.
교회가 제 몸 불리기에 급급하고 남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 한국 교회가 교회의 외형적 성장과 거대한 교회당 건축에는 전력을 다하면서 사회봉사는 외면한다면, 교회의 신뢰도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교회는 선교를 하는 하나의 기관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곧 선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마치 불의 존재 가치는 타오르는 데 있듯이 교회는 선교에 그 존재 가치가 있다. 특히 오늘날 교회가 관심을 표방하는 선교는 이른바 “통전적”(holistic) 선교다. 대개 통전적 선교는 “교회의 선교”(Missio Ecclaesiarum)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통합한 선교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는 영혼 구원과 개종 등에 목적을 둠으로써, “제도화한 교회와 그 기구의 확장 자체가 곧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해석되고, “교회 자체가 선교의 목적이 되는 과오”를 범했다. 또한 “개인의 영혼 구원에 편중함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하여 소극적 자세”로 임하였으며,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적 자세, 교회와 사회의 이원론적 구분이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전통적 선교 자세는 독백의 성격을 지니는 선포와 다원적 세계에서 교회가 우위를 점하려는 패권주의를 불원간 드러내게 된다는 약점”을 노출시켰다. 반대로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교”는 “사회적 개혁과 완성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생각”으로 “선교의 사회 갱신과 해방적 의미에 편중”했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편파적으로 선호”함으로써 “보이는 교회에 대한 소홀” 등이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통전적 선교는 교회의 선교와 하나님의 선교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지양하고 장점을 종합하여 “개인의 개종에 대한 부르심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행동에 대한 부르심” 모두에 관심을 쏟는 선교방법을 의미한다. 심광섭, “사회봉사의 신학적 이해,” [인터넷자료]; http://home.hanmir.com/~kykcys/신학적이해.htm. 2002년 1월 27일 접속.
오늘날 사회봉사의 주체가 될 교회가 펼쳐나가야 할 선교의 방향은 바로 이와 같은 통전적 선교에서 찾아야 한다.
더불어 교회의 사회봉사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성령의 역사에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성령은 “사회봉사 실천의 원동력”이다. 손인웅, 40.
일반 사회복지는 휴머니즘의 발로로 가능할 수 있지만, 교회의 사회봉사는 단지 인간적 측면에서의 노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각자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은 신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행2:44-47).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봉사는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주체가 될 때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전문적인 사회단체의 방법을 차용할 수도 있고, 자기 교회의 실정에 맞는 방법을 독자적으로 계발할 필요도 있다. 또한 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근거가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 등 신학적 내용으로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2)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성화
구원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봉사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교회가 사회봉사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교회 구성원 각자가 사회봉사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곧 그리스도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회봉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순종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당신의 봉사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와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게 그리고 대가없이 주어진 것을 믿는 사람이다. 나눔의 삶은 이 구원의 기쁨을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Hendricks, 222-3.
또한 그리스도인의 사회봉사는 성화(sanctification)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화의 문제를 명쾌하고 설득력있는 주장한 신학자는 아마도 존 웨슬리(John Wesley)일 것이다. 그는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성화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 협동한다는 이른바 신인협동설(synergism)을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이 먼저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로 그에 대해 응답할 수 있고, 또 응답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점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신학적 기초가 되는 대목이다. 웨슬리에게 회개는 종교에 들어가는 현관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이며 성화는 종교 그 자체다. 그는 신앙의 본질이란 내면적이지만, 신앙의 증거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John Wesley, The Works of John Wesley, XIV, ed. Thomas Jaxson (Peabody: Hendrickson Publisshers, 1986), 321.
그러므로 사회적 성화를 말하지 않고 개인 성화를 말할 수 없고, 내면적인 구원만을 말한 채 사회적인 구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웨슬리의 강조점이다. 이런 강조점은 먼저 자기 자신을 닦고 다른 사람을 돌보라는 이른바 수기안인(修己安人)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사회봉사는 바로 사회적 성화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십자가 사랑을 성취해 나가야 한다(요일4:8-21).
침례교 신학자 데일 무디는 웨슬리에 대해서, “[그는] 로마 가톨릭이 칭의에 대해 무지했고, 루터교는 성화에 대해 무지했다고 확신했다. 비록 칼빈주의자들이 점진적 성화를 말하는 그 부분에 대해 인정한다 하더라도, 웨슬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인 성화’의 가능성에 대해 확실히 믿었다”고 평가했다. Dale Moody, The Truth of the Word: A Summary of Christian Doctrine Based on Biblical Revelation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1981), 325.
가톨릭이 인간의 성화와 선행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했고, 루터나 칼빈은 너무 하나님의 칭의에 무게 중심은 두었기 때문에, 전자는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고, 후자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데일 무디가 봉사와 소명과 구원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다양한 신분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봉사를 위한 소명은 구원을 위한 소명과 동일한 것이다([고전]7:20-22). 오직 몇 사람만이 봉사하도록 소명 받았다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위해 소명을 받았다고 가르치는 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다. Ibid., 314.
봉사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소명을 받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봉사의 소명을 받는 것이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사회봉사에서도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
3. 사회봉사의 목적: Why?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서 사회봉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실행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사회봉사의 활동이유와 신학적 근거를 묻는 질문이다. 우리는 왜 사회봉사를 해야 하는가?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활동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회봉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 사회봉사를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사회봉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역에 순종하는 신앙임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책임을 부여받았다(창1:28).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존하고 가꾸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창조신앙을 파괴하고 말았다. 파괴된 창조신앙을 회복하는 길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과 자연의 대결구조를 화해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동시에 결코 자연을 지배하고 독점해서는 안될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창조신앙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다. 린 화이트(Lynn White)가 생태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변화를 요청한 것은 창조신앙의 회복을 위한 하나의 선지자적 외침이었다. 린 화이트는 성장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려면 기독교적인 진리에 깊이 뿌리박은 자연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반드시 결부지어 생각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성 프란시스의 자연관에 대한 수용을 제안했다. Lynn White, “생태계의 위기에 관한 역사적 근거,” Francis A. Schaeffer, 「공해」, 송준인 옮김(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0), 94.
과거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적 특성 곧 영혼”(Augustinus), 혹은 “인간의 이성적 본성”(Thomas Aquinas)으로 이해했던 것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부분적 이해에 불과하다. 김명용, “창조의 보전과 새로운 창조신학,” 「장신논단」, 제6집(1990), 297.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바른 이해는 20세기 신학 속에서 본격화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땅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의미가 그 핵심에 놓여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은 자연세계의 질서를 세우고, 이 세계를 돌보며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봉사는 넓은 의미에서 창조신앙을 회복하는 한 방편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섭리(providence)와 보존(preservation), 구속(redemption)과 완성(consummation)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며 보존하신다. 사회봉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신적 활동에 순응하는 행위다. 특별히 사회봉사는 타락한 인간과 자연을 회복하시기 위해 무한한 아가페적 사랑으로 구속의 길을 예비하신 성부 하나님, 섬김과 죽음으로 새로운 존재양식과 질서를 선포하신 성자 하나님, 믿는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로 만드시고 모든 피조물을 썩어짐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시켜 완성의 날을 맞이하게 하는(롬8:20-21)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교회가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사역에 대한 응답으로서 사회를 향해 봉사하며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43.
여기서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은 사회봉사의 방법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충만함과 본성이 인간의 모습으로 구체화하신 것이다. 이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성과 활동을 모두 드러낸 사건이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적 섬김을 드러내신 것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성육신은 기독교 사회봉사의 동기와 형태를 제공한다. Hendricks, 226-7.
특히 해방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는 사회봉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한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삼위일체와 사회」(Trinity and Society, 1988)에서 “사회적 개념의 삼위일체는 지구 위에서 해방적이고 상호 협조적인 사회를 구축하는 천상적인 모델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인간도 이를 따라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온전한 사회적 존재로서 공동체적 삶을 누려야 한다.” Ibid., 46, 48.
우리가 사회봉사를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사회적 삼위일체의 천상적 모델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2) 복음의 사회화: 사회구원
사회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봉사는 개인과 사회 전체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첫 단계의 교회 활동이다. 침례교 신학자 가운데 사회복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다.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란 말이 가장 먼저 사용된 것은 1886년 찰스 브라운이 헨리 조지의 「진보와 가난」(Progress and Poverty)에 대해 반응할 때였다. Bill J. Leonard, "The Modern Church and Social Action," Review and Expositor, 85 (1988): 249.
전통적인 원죄를 인정하면서도 개별적인 죄에 대한 이해와는 구별되는 죄의 사회성을 간파한 라우쉔부쉬는 “집단적인 악”과 사회적인 죄의 전승에 대해 눈을 돌리고, 급기야는 “악의 왕국”에 대해 언급한다: “악의 사회적 이상화란 인간의 집단이나 공동체의 권위에 의해 개인의 윤리적 표준을 그르치게 하고 개인이나 공동체의 양심에 대한 성령의 음성을 마비시키는 것으로...이들은 초인간적인 힘을 통해 사회적인 악과 결합하여 더욱 더 큰 죄의 세력을 강화한다.” W. Rauschenbusch,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New York: The Macmillan Co., 1917), 78.
따라서 그는 악의 왕국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재이며 죄를 전적으로 쥐고 있고 연대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복음만이 현대인의 심성 속에서 악의 왕국을 깨우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영향력이라고 말한다. Ibid., 87.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회복음의 가장 초보적인 이해는 악의 사회화에 대항한 “복음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은 단순히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죄와 구원의 개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의 본질과 범주가 개인의 영혼을 넘어서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될 경우, 그에 따라 구원의 본질과 범위도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따라서 라우쉔부쉬는 이 둘의 관계를 단적으로 이렇게 천명한다: “만일 죄와 악의 왕국이 초인간적인 대리인으로서 작용한다고 하는 우리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영혼과 개인적 관심으로 국한된 구원은 명백히 불완전한 것이며 단지 부분적으로만 효력이 있는 구원이 될 것이다.” Ibid., 95.
그러므로 라우쉔부쉬에 있어서 완전한 구원이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주시는 사랑의 원동력에 순종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동료들의 삶과 자연스럽게 협력함으로써 상호 봉사하는 하나님의 유기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Ibid., 98.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게 될 때 우리는 최상의 공동선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영혼을 자발적으로 사회화하는 것이고, Ibid., 99.
성령은 이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랑과 평화와 인내를 일으키게 하는 “혁명적인 힘”이다. 동시에 신앙도 단순히 과거에 형성된 사상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대요 확신이며, 정의롭고 우애있는 사회질서의 실현을 위해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Ibid., 101-02.
물론 라우쉔부쉬의 사회구원론이 개인구원을 무시하고 사회구원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에서 개인구원은 반드시 최우선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에게 개인의 영적 중생이 빠진,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변혁은 궁극적으로 효과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Stephen Brachlow, “Walter Rauschenbusch,” ed. by Timothy George and David S. Dockery, Baptist Theologians (Nashville: Broadman Press, 1990), 374.
다만 그는 “개인의 구원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반드시 사회적 구원이 따라야 한다”고 함으로써 구원받은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도한호, “라우센부쉬와 사회복음,” 「복음과 실천」, 11집 (1988), 125.
그러므로 할포드 루코크(Halford Luccock)가 “만일 마을의 모든 사람이 자기 집 뒷마당에 우물을 파더라도 결과가 그 마을의 수도 시설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한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Stevens, 125.
사회구원은 사회봉사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런 개념은 침례교 신학자 멀린스(Edgar Y. Mullins)에 의해서도 적극 지지된다. “개인의 중생은 복음전도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에게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첫 번째 단계를 내 딛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거룩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삶 전제를 포함할 것을 요구한다. 그 일은 변화된 개인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Herschel H. Hobbs and Edgar Y. Mullins, The Axioms of Religion, revised edition (Nashville: Broadman Press, 1978), 150-1.
3) 하나님 나라 실현: 사회정의와 평화 구현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사회봉사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교회의 사회봉사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도 사회봉사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 안에서 보여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회봉사는 기독교적 사회봉사가 아니다. 박영환, “사회봉사(Diakonie)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신학적 접근,” 「神學과 宣敎」, 24집 (1999): 26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처럼,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실현될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를 말하는 것인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신학자들이 이해한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가 하는 것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질서(시103:19; 대상29:11), 이스라엘의 신정국(신33:4-5)을 암시하는 다분히 현세적이고 민족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반면에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대체로 영적이고 우주적인 특징으로 설명되고 있다: “예수의 영적 나라는 이스라엘의 신정왕국의 성취이며, 예수님 자신은 구세주-왕이다”(W. W. Stevens).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이 그 안에서 사랑의 교제 가운데서 연합되어 있는 하나의 신적 사회이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 의하여 행하여지며, 사랑이 그들 서로간의 관계와 행위의 표현이며, 하나님이 그의 은혜의 충만 안에서 인간에게 자비롭게 자신을 천명하시는 곳이다”(E. Y. Mullins). 하나님 나라는 “영생으로 구성되는 영적인 선(善)”이고 “국가적, 정치적 제한이 없는 우주적인 것이다”(Albert C. Knudson). W. W. Stevens, 「조직신학개론」, 허긴 역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1997), 389.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미래에 저 세상에서 이루어질 세계만(마26:29)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이미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세계를 포함하기도 한다(마12:28). 결국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과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나라다(요18:36; 눅17:21).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양면성을 가지고 나타난다. 현재성과 미래성, 이 세상성과 저 세상성, 가시적인 면과 비가시적인 면을 동시에 안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 세상성, 가시적인 면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사회봉사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한 단면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수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교회가 노력해야 할 이유다.
4. 사회봉사의 대상: What?
누가 사회봉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일차적으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위해 사회봉사가 요구되지만, 사람의 삶은 사람의 삶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실이고, 우리의 운명이다. 따라서 마땅히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사회봉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 소외된 약자
인간론적 관점에서 볼 때, 우선 사회봉사의 일차적 대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두는 것은 타당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환경이나 신분이나 인종에 관계없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자기의 일부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는(to have)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전부가, 아니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형상(to be)”이기 때문이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34.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죄 때문에 가장 심각하게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존재다. 데일 무디는 인간의 파괴된 형상이 빚은 결과를 두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다스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두 방향으로 곡해되었다([창]1:28). 땅에 충만함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과잉 출산과 과잉 인구를 초래하고, 땅을 정복하라는데 대한 지나친 강조는 자원 개발과 약탈로 이어지면서, 인간은 피조물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재앙이 따르는 것은 인간의 다스림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이루어져야 함을 잊을 때뿐이다. 신학이 없는 기술은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 위에 폭정을 초래한다. Moody, 226-7.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시작했다. 그 뒤부터 이 세상에는 불평등과 부조리가 상존해 왔다. 부자와 가난한 자, 힘있는 자와 약한 자, 어른과 아이, 비장애인과 장애인, 젊은이와 노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 구도가 존재한다. 사회봉사는 이 가운데 특히 소외되기 쉽고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하기 쉬운 약자들에게 일차적인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적 시각은 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봉사는 마땅히 파괴된 인간성 회복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사회계약법(출21:1-23:13), 안식일 제도(신5:12-15), 십일조 제도(신26:12-15), 그리고 예수의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막2:23-28)과 병자와 소외된 사람에 대한 관심(막3:1-6; 막2:17), 은혜의 해 선포(눅4:18-19) 등은 사회봉사가 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율법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30-37)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도움을 베푸는 것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런 사랑의 실천을 우리는 문둥병자 치유 사건(마8:1-3)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이 하늘의 저주를 받아 생긴 병이라 불결하다하여 가까이 가지도 않으려 했는데, 예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지는 일은 유대법에도 어긋나는 일이거니와, 본인에게 끔찍한 병이 전염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에게 손을 대셨다. 헬라어로 “손을 대다”는 단어는 대충 손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절벽에 매달려 있는 누군가를 끌어당길 때 필요할 정도의 압력(grip)”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Jim Thomas, 「까페에서 즐기는 신학」, 김광남 옮김 (서울: UCN, 2002), 168.
이것은 “온전한 포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봉사는 바로 예수께서 하신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최종적으로 선언한 것은 바로 제자도 정신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이 명령은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종교적인 계명준수나 습관적인 율법준수를 원치 않으셨다. 종교적 의례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적 윤리였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형식적인 율법의 자구 준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사회봉사는 이 점에서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소외된 이웃에게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사회봉사를 실천하고자 하는 교회는 이런 예수의 사랑과 관심을 배워야 한다. 예수는 특별히 가난한 백성들, 병든 백성들, 옥에 갇힌 백성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다(마25:40). 예수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다(골1:15).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는 히브리서 기자의 부탁도 예수의 관심에 교회가 귀를 기울이라는 권면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봉사의 존재 이유”가 된다. 예수의 사랑은 “사회봉사의 동기”가 된다.
2) 모든 피조물
소외된 약자가 일차적인 사회봉사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자연, 즉 모든 피조물이 사회봉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창조주가 의도한 바”이기 때문이다. Hendricks, 221.
그러므로 사회봉사는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차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는 일차적으로 인간으로 구성된 공동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사회가 인간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인간과 동물과 자연으로 구성된다. 자연이 파괴되면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도 파멸한다.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봉사의 영역은 좀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생태계 위기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세계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근본사상을 근거로 하여, 인간과 자연은 모두 이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정립이 필요하다. 창세기 1장 26절의 “다스리라”는 명령은 결코 착취와 약탈을 위한 다스림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선한 관리의 책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스린다”는 것은 본래 파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자의 행복을 위하여 “돌본다”는 것을 뜻한다.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101.
동시에 땅을 “정복하라”(창1:28)는 말은 땅을 파괴하고 약탈해도 무방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땅을 다스려서 땅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형식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Ibid., 103.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회복은 자연에 대한 창조신앙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접근 가능하게 되며,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상호소외의 반(反)창조신앙”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우주적 보편성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는 사11:6-9; 시103:19,22; 고전15:20-28; 엡1:22-23; 골1:15-20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온 우주의 화해, 곧 구원의 사건은 이러한 창조신앙을 더욱 자리매김하는 복음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의 죄 용서, 마음의 평화를 넘어서서 온 우주의 평화, 자연과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김균진, 151.
스티븐스는 하나님이 선교의 명령을 주신 것은 창조의 명령을 회복하기 의함이라고 말한다. “복음전도의 목적은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또한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Stevens,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115.
이것이 사회봉사가 의미하는 우주적 차원이다.
5. 사회봉사의 시간과 장소: When and Where?
1) 지금
때[時]에 맞추어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시중(時中) 사상이라 했다. 예수께서도 때가 차매 복음을 증거하셨다. 그런데 교회가 언제부터 사회봉사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실제적인 질문이다. 사회봉사와 교회의 존재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시작하는 그 때부터 사회봉사는 시작되어야 한다. 어떤 교회는 거창하게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세워놓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 교회가 그 일을 수행할 만큼 자립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교회의 자체 건물을 짓고 교인들이 어느 선까지 증원된 다음, 본격적인 사회봉사든 복지사업이든 하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스스로 빠져 들어가는 함정일 뿐이다. 지금 시작하지 않는 교회는 나중에도 할 수 없다. 언제나 교회의 예산은 부족하기 마련이다.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교회의 예산이 들어갈 곳은 더 많아진다. 개척교회 때부터 일정 비율을 사회봉사로 떼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교회가 커지더라도 제대로 사회봉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마찬가지다. 사회봉사는 마음만 먹고 있다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해야 할 삶의 한 부분이다.
고아원을 세우고 재활원을 운영하겠다는 교회가 결국 꿈만 먹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재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대개 마음자세와 태도의 문제 때문이다. 사실 교회의 사회봉사는 꼭 많은 교인과 재정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참여가 바로 사회봉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교회가 커진 다음에 하겠다는 것은 사회봉사의 의지가 없이, 생색내기 위한 혹은 명분 만들기에 불과하다. 지금 시작해야 한다.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첫 걸음을 떼는 것이 중요하다.
2) 여기
사회봉사를 어디서 할 것인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대한 신학적 문제에 속한다. 사회봉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신학적 대원칙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 있는 교회 안과 밖이 모두 사회봉사의 대상지역이기 때문이다. 라우쉔부쉬는 「기독교와 사회 위기」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라는 책에서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직된 교회는 인간의 공동된 삶 속에 깊이 뿌리 내린 가장 위대한 사회 제도다. 만일 다른 사람들의 삶이 어떤 항구적인 악에 의해 고통을 당한다면 교회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눌 의무가 있다.” Walter Rauschenbusch,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 (Macmillian Company, 1907;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1), 287.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교회도 하나의 사회다. 그러므로 사회봉사는 교회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사회봉사라 해서 꼭 교회밖으로만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 있는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을 외면한 채 교회 밖으로 사회봉사를 나가는 것은 위선이다. 먼저 교회 안에서 사회봉사가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교회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가 끝나고 다른 하나를 시작하는 시간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도, 즉 우선순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회 안과 밖에서의 사회봉사는 언제나 병행되어야 한다.
사회봉사가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요청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저 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만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나, 구원의 관점에서 보나 “지금과 여기”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대단히 강조되는 복음의 핵심이다. 사실 현재가 빠진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모든 시간은 현재적이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현재요, 미래는 다가오지 않은 현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보다 늘 현재에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성을 무시한 채, 과거만 회상하거나 미래만 바라보고 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데일 무디는 구원과 시간의 문제를 논하면서 사도 바울의 신학을 이렇게 평가한다:
사도 바울의 신학은 대부분 과거, 현재, 미래로서 구원의 유형을 떠나서는 논의될 수 없다.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사용한 대부분의 단어들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술어들이다.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는 것은 구원의 전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Moody, 311.
그러므로 현재를 망각하고 이 땅을 외면한 채, 저 세상에서 미래에 경험하게 될 구원을 말하는 것은 정상적인 기독교신앙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그 시대마다 현안으로 떠오는 문제들에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각 시대마다 필요한 봉사의 방식이 서로 달랐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구제하고 노예를 보살피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면, 현대교회는 생태계의 위기를 구제하고 핵문제를 논의하고 세계의 가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심을 모은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교회가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6. 사회봉사의 방법: How?
그렇다면 어떻게 사회봉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여기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보다 선행되어야 할 실천방안의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교회의 예산 편성의 문제라든지, 구체적인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1) 개인의 삶 속에서 나눔: 일상성과 지속성
각 교단 차원에서 사회복지재단 등을 설립해서 체계적으로 사회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중요하고 교회들이 사회복지시설을 세우고 지원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절실한 것은 각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 의식을 고취하는 일이다. 문제는 사회봉사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이를 위해 먼저 바로 잡아야 할 문제는 사회봉사나 사회참여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비본질적인 문제로 취급되는 현실이다. 사회봉사는 그 자체로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지, 복음전도의 한 수단으로서 간주될 수 없다.
참된 영성은 반드시 교회 안에서 예배나 기도시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심(日常心)과 신앙심(信仰心)은 결코 별개가 될 수 없다. 주일이면 신앙심으로 무장되었다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상심으로 돌변해 버리는 이중적인 마음은 정상이 아니다. 어디에 있으나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 즉 일상심이 신앙심이 되어야 한다. 스티븐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된 영성은 우리 삶 전체와 관련돼 있으며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참된 영성은 예배 시간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이런 현실적인 영성과 관계된 것으로 가득하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계된 구절은 거의 없다. 반대로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요구하고 있다(롬 12:1; 약 1:27; 마 10:47; 히 11:11-16; 벧전 3:7; 골 3:17). Stevens,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182.
굳이 봉사하기 위해 일부러 먼 이국까지 갈 필요는 없다. 바로 우리 이웃에 우리의 “캘커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봉사를 하기 위해 주말마다 멀리 떨어진 시설을 방문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자기 자신의 일상 속에서 봉사하는 마음과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이웃에는 언제나 어디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그들을 향해 섬김의 손길을 펼 수 있으면 된다.
동시에 사회봉사의 지속성이 필요하다. 교회가 주체가 되든, 개개인이 그 일을 하든, 사회봉사는 지속적으로 계획을 가지고 추진되어야 한다. 일회성 이벤트 행사에 그치는 사회봉사는 오히려 그 정신과 효과를 퇴색시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
교회의 사회봉사가 지속성을 가지려면 교회의 적극적인 의지와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화된 삶에 대한 강조다.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홀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라면 우리는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삶 자체에 신앙의 의미가 부여될 때, 그리고 그 삶이 봉사하는 삶, 나누는 삶으로 인식될 때 사회봉사는 지속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2)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조화 속에서
교회가 사회봉사를 활발히 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교회(institutional church)에서 벗어나 기능적 교회(functional church)로 전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지역사회 활동」(The Church in Community Action)의 저자 하비 세이퍼트(Harvey Seifert)는 기능적 교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획을 위하여 부단히 목적을 수정한다. 둘째, 인간사랑을 기반으로 하며 사회의식이 강하다. 셋째, 인간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며, 설교 메시지는 현실생활의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넷째,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각종 정치, 경제, 국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윤리적 판단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할 효과적인 기술을 개발한다.” 김동배, “사회봉사 활성화를 통한 참 교회의 모습 찾기,” 「목회와 신학」, 1992년 5월호, 25.
이는 교회가 단지 지역교회(local church)를 넘어서서 지역사회 교회(community church)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교회는 일종의 흩어지는 교회다. 모이는 교회를 에클레시아(ekklesia) 교회라 한다면 흩어지는 교회는 디아스포라(diaspora) 교회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이웃사랑이 가능하려면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웃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소금은 두 가지 치명적인 독약, 즉 나트륨과 염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따로 분리시켜 놓으면 독약이 되지만, 하나로 합성해 놓으면 소금이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에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다른 하나가 빠진 상태에서는 각 요소가 치명적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다. Stevens,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128.
그러므로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를 전제할 때 의미가 있고, 반대로 흩어지는 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선행될 때 가능하다. 데일 무디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곧 사명이며, 사명이 없는 곳에 교회는 없다. 하나님은 메시지와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부르셨다.” Moody, 427.
3) 교회 사명의 균형감각: 사회봉사와 복음증거를 함께
우리는 사회봉사가 복음증거를 외면한 채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데일 무디는 교회의 사명을 증거의 사명(베드로 전통), 봉사의 사명(바울 전통), 교제의 사명(요한 전통)으로 나누면서, 이 세 가지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것에 비해 봉사가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것을 무디는 이렇게 경계한 바 있다: “봉사라는 기치 아래 좌익 급진과 복음 증거와 사명을 가진 우익 보수주의자들은 과거 죽은 교단주의가 그러했듯이 교회의 교제에 큰 위협이 되었다. 만일 교회의 다중적 사명이 회복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세상 속에 서기 위해 세 개의 다리를 가진 탁자가 필요하다: 증거, 봉사, 교제.” Ibid., 433.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봉사는 복음증거와 교제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수행될 수 없는 일이다.
복음증거와 사회봉사의 관계는 매우 민감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둘의 관계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모두 붙드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하나의 커다란 과제다. 흩어지는 교회를 강조한다고 할 때 결코 복음증거를 외면하고 사회활동에만 주력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복음증거를 앞세운다고 할 때 사회봉사를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아니다. 복음증거는 곧 사회봉사가 되고, 사회봉사는 곧 복음증거가 된다. 따라서 마땅히 복음증거와 사회봉사는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
핸드릭 크레머(Hendrik Kraemer)는 타종교들에 대한 복음주의적 접근방법을 말하면서, 사회봉사와 복음증거의 상호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진리를 증거하는 일이 세상과 인간을 섬기고자 깊이 원하는 정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약 일반적으로 섬김이라는 용어로 일컬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일차적인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진정으로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증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결국은 우리들의 사역의[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토대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Hendrik Kraemer,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최정만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430.
복음증거만 강조해도 안되고, 사회봉사만 내세워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크레머는 교회의 세 가지 표현, 즉 예배와 증거와 섬김에 대해 “각각이 본질적인 특성으로 하는 정신에 젖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활동과 문화활동은 그 본질적인 증거 및 복음전도 프로그램의 액세서리가 아니라 그 본성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Ibid., 456.
따라서 사회봉사가 오직 복음증거의 한 수단으로 전락되어서도 안되고, 반대로 복음증거가 빠지고 사회봉사만 남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봉사는 단순한 구제활동 차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회복하는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봉사와 복음증거는 별개의 두 가지 활동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교회 선교라는 통전적 사고로 해석되어야 한다.
7. 결론
이상에서 6하 원칙에 따라 사회봉사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사회봉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감사를 지금 여기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삶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모두 나누어주셨던 것처럼, 교회도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회봉사, 즉 나누는 행위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요 필수적인 문제인 것이다.
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358명이 전체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23억 명이 소유한 부와 동일한 부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그 빈부의 격차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H. J. Karger and D. Stoesz, American Social Welfare Policy, a Pluralist Approach (New York: Longman, 1998) in Mary Ann Suppes and Carolyn C. Wells, The Social Work Experience: An Introduction to Social Work and Social Welfare, Third Edition (Boston: McGraw-Hill, 2000), 100.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나눔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명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난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까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될 때 비로소 그들의 삶에 하느님을 모셔다 드릴 수 있고, 그들 또한 하느님에게 나아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Jose L. Gonzalez-Balado 엮음, 「마더 테레사 말씀」, 황애경 옮김 (서울: 디자인하우스, 1997), 109.
테레사 수녀의 말은 우리가 서로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저 구제하듯 몇 푼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와 감정을 공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Ibid.
사회봉사는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나누는 같아지는 것이다. 독일 사회봉사국 총재로 22년간 일해온 테오도르 쇼버(Theodor Schober)는 「목회와 신학」지의 인터뷰에서 “나눈다는 것은 모든 차별을 극복하는 중요한 계기”라고 말하면서, 그는 독일교회가 1년 전체 예산 가운데 절반 가량을 사회봉사 비용으로 내놓고 있으며, 독일 전체 복지시설의 50-60%를 운영한다고 자랑스레 말한 바 있다. 박지숙, “독일교회 사회봉사국 전총재 테오도르 쇼버,” 「목회와 신학」, 1992년 4월, 11.
이런 사회봉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동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는 삶”이라는 글귀가 더욱 그리스도인에게 의미있게 다가온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51.
이 사랑의 행위는 “추상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인간을 보살피는 실천의 범주에 진입하는 것”으로써, “이러한 태도는 사회, 경제, 정치의 영역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R. Duane Thompson, “사회참여: 하나님 백성의 책임,” 「현대 웨슬리신학 II」, Charles W. Carter 외 엮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310.
사도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고 말했다. 나눔의 정신인 사회봉사는 서로 짐을 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여러 기능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 그 자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사회봉사는 하나의 의무이며 동시에 권리인 것이다.
김용복/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1. 서론
우리가 하는 행동은 우리의 믿음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그 처한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정확한 척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William L. Hendricks, "A Theological Basis for Christian Social Ministries," Review & Expositor, 85, 2 (Spring 1988), 221.
교회에서 사회봉사를 강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앙과 행동의 상호관련성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요구하는 행동하는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행동반경을 사회봉사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봉사는 교회의 주요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1) 사회봉사의 의미
사회봉사(social services)란 용어는 사회복지(social welfare), 사회사업(social work), 사회정책(social policy) 등과 같은 범주에서 대체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통합개념으로 쓰이는 개념은 사회복지일 것이다. 김영모, 「사회복지학」 (서울: 한국복지정책연구소, 1997), 1.
사회정책이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과 그 결과물을 의미한다면, 사회복지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정부와 민간이 정책과 필요한 서비스를 통해 사회적 역기능을 예방하고 경감시키기 위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손인웅, “교회 사회복지 참여의 신학적 근거,” 「교회의 사회복지 참여하고 실천하기」,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사회복지위원회 편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27.
여기서 사회복지는 좁은 의미에서 비영리적인 활동을, 넓은 의미에서는 영리적 목적을 위해 실행하는 활동까지 모두 포함한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사회복지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근본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건강상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국가의 프로그램이나 구제 및 봉사 체계”를 말하고, 좁은 의미에서 보면, “재난과 가난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적이거나 자원봉사적인 사회의 비영리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Ralph Dolgoff, Donald Feldstein, Undestanding Social Welfare (Needham Heights, MA.: Allyn and Bacon, 2000), 111-2.
그런데 사회사업이 사회복지 기관들이나 사회봉사 구조 안에서 실행되는 하나의 전문화된 직업을 의미한다면, 사회봉사는 개인봉사(personal services)와 기관봉사(institutional services)를 모두 포괄하면서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넓게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 사회복지 기관으로 인식되지 않은 단체나 기관에 의해서도 실행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회봉사든 그것은 단순히 문제를 대체하거나 바로 잡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상황에 따라 새로운 반응을 제시하는 목표를 가져야 할 것이다. Dolgoff, 114-5.
이 글에서 사용된 사회봉사란 의미는 “교회의” 사회봉사라는 수식어를 필요로 하는 좀더 신학적 차원에서 협의적으로 접근된 것이다. 그 점에서 교회의 사회봉사는 목적, 대상, 방법 면에서 일반 사회사업이나 사회봉사와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교회의 사회봉사는 반드시 전문적인 영역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사회봉사가 비전문적인 성향을 띤다는 이유로 굳이 “교회 사회복지”란 용어를 선호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박경숙, “역사적 측면에서 본 교회의 사회복지 실천의 필요성과 교회의 자원활동,” 「교회의 사회복지 참여하고 실천하기」, 44. 박영호는 같은 이유로 “기독교사회복지”란 용어를 사용한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17.
교회의 사회봉사는 전문성과 비전문성을 모두 포괄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교인들이 주변에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비전문적 자원봉사도 사회봉사의 한 영역으로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봉사는 곧 섬김이다. 둘째, 일반 사회복지나 사회봉사는 주로 인간의 신체적이고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집중한다면, 교회의 사회봉사는 모든 피조물의 영적,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마련해주는데 목표를 둔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봉사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라 이 땅에서 각자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폭넓게 지원하는 교회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존재다. 셋째, 일반 사회복지나 사회봉사의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박애와 같은 휴머니즘에서 출발하지만, 교회의 사회봉사는 이웃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에 근거한다. 손인웅, “교회 사회복지 참여의 신학적 근거,” 「교회의 사회복지 참여하고 실천하기」, 25-30 참조.
2) 한국 교회의 사회봉사 실태와 필요성
초창기 한국 교회는 이 땅에서 사회봉사를 주도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들은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왔다. 19세기 말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시작한 학교들은 대개 고아나 불우한 여성 등을 대상으로 실시된 것이었고, 빈민구제나 맹농아 사업, 의료사업, 사회악 쇄신 운동 등도 대부분 교회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박경숙, 48-9.
특히 한국 감리교회는 1919년 16개조의 “사회신경”(Social Creed)을 채택하여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1997년)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1998), 45.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사회봉사에 너무 인색하다. 그것은 교회에 대한 일반 사회인의 무관심과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을 일러 한국 교회가 “개체교회 성장 제일주의라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한국 교회가 평균적으로 전체 재정 가운데 3.8%만을 사회봉사비로 사용하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김준우, “「21세기 기독교총서」를 발간하면서,” John B. Cobb, Jr.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이경호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11.
한국 갤럽이 조사한 「1998년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 활동 및 신앙의식에 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개신교에 대한 한국인의 평가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이 가운데 비종교인이 종교를 택할 때 개신교를 선택하겠다는 사람은 27.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불교 36.9%, 천주교 35.4%). 또 같은 보고서에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희망 단체”를 선택하는 질문에서 교회를 택한 사람은 비종교인 가운데 1.3%에 그치고 말았다(성당 6.4%, 사찰 6.7%, 사회단체 14.4%, 없다 70.6%). 또한 한국의 비종교인 가운데 자신의 인근 교회에서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는 12.4%에 불과했다. 이상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1가지 이유」 (서울: 기독신문사, 2000), 14, 65, 79 참조.
이런 수치는 단적으로 한국 교회가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으며, 신뢰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으며 또 선호하지 않는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회에 대한 교회의 의식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한 원인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젊은 층과 고학력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외적 성장과 기복신앙을 강조한 채, 사회 문제에 눈과 귀를 감고 있는 현실 때문이라는 지적을 무시하기 어렵다.
한국 교회가 다시 건강하게 부흥하기 위해서는 소홀했던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복음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동시에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바로 잡는 일 모두에 적용되어야 한다. 어느 하나가 외면 당한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사실 교회가 사회봉사나 구제에 나선 것은 초대 교회부터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7명의 집사 선출은 교회의 체계적인 사회봉사를 위한 첫 걸음이었다. 그 뒤 교회는 지금까지 자선활동이나 사회봉사를 주도적으로 해나갔다. 그러다가 18세기 산업화 이후 사회복지의 책임은 교회가 아닌 국가가 담당하게 되면서, 교회의 역할이 차츰 약화되었다. 이제는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될 정도에 이르렀다. 마땅히 주력해야 할 선교사업의 영역임에도 지나치게 개인중심적이고 교회지향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교회는 예전과 같이 사회봉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봉사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교회는 물론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현장에서 교회가 그 일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는가 하는데 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교회의 신학이 제대로 뒷받침해주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당위성을 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회봉사가 교회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동안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외형적으로 성장하기에 급급했고, 교회 밖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쏟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우리는 전반적으로 사회봉사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그림을 짜야 할 필요를 느낀다. 사회봉사에 관한 신학의 정립은 사회봉사의 동기를 부여해주고 그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3) 연구목적과 방법
이 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교회와 사회봉사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봉사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고, 그 방법론적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6하 원칙에 따라 사회봉사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연구는 누가(Who), 무엇을(What), 언제(When), 어디서(Where), 왜(Why), 그리고 어떻게(How) 사회봉사에 임해야 하는가를 신학적 차원에서 살펴봄으로써, 사회봉사의 주체와 대상, 목적과 방법적 원리 등에 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목표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일차적 초점이 있으므로 사회봉사의 기술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2. 사회봉사의 주체: Who?
누가 사회봉사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삶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말과 결코 다른 말이 아니다. 삶이란 사람의 준말이다. 마땅히 삶의 주체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회봉사는 삶을 삶답게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하나의 운동이다. 이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사회봉사의 주체는 사람이다.
1) 교회의 사명
사람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를 따르는 지체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란 뜻이다. 따라서 교회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그분의 사역을 이어서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살리는 일을 하신 분이다. 마땅히 교회도 사람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이요 본질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봉사를 부수적인 사업의 하나로 곁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봉사를 교회의 본질적인 실천 사업 가운데 하나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봉사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회참여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의미한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364.
폴 스티븐스(Paul Stevens)는 하비 콕스가 「세속도시」에서 사회를 향한 교회의 선교를 디아코니아(diakonia, 섬김), 코이노니아(koinonia, 교제), 케리그마(kerygma, 선포)로 구분한 것을 교회의 선교적 차원에서 세 가지 영적 은사로 해석했다. Paul Stevens,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김성오 옮김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2), 123.
교회는 사람을 섬기고,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책임이 있다. 이 섬김과 나눔, 그리고 선포는 실제적인 사회봉사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스티븐스는 교회가 지금까지 실제적인 사회봉사로 인해 좋은 평판을 받아왔다고 말하면서, “역사상 교회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단순히 개인적인 구제와 긍휼과 선한 의지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한 사회 기관의 개혁”이라고 평가한다. Ibid., 125.
교회가 제 몸 불리기에 급급하고 남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 한국 교회가 교회의 외형적 성장과 거대한 교회당 건축에는 전력을 다하면서 사회봉사는 외면한다면, 교회의 신뢰도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교회는 선교를 하는 하나의 기관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곧 선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마치 불의 존재 가치는 타오르는 데 있듯이 교회는 선교에 그 존재 가치가 있다. 특히 오늘날 교회가 관심을 표방하는 선교는 이른바 “통전적”(holistic) 선교다. 대개 통전적 선교는 “교회의 선교”(Missio Ecclaesiarum)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통합한 선교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는 영혼 구원과 개종 등에 목적을 둠으로써, “제도화한 교회와 그 기구의 확장 자체가 곧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해석되고, “교회 자체가 선교의 목적이 되는 과오”를 범했다. 또한 “개인의 영혼 구원에 편중함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하여 소극적 자세”로 임하였으며,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적 자세, 교회와 사회의 이원론적 구분이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전통적 선교 자세는 독백의 성격을 지니는 선포와 다원적 세계에서 교회가 우위를 점하려는 패권주의를 불원간 드러내게 된다는 약점”을 노출시켰다. 반대로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교”는 “사회적 개혁과 완성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생각”으로 “선교의 사회 갱신과 해방적 의미에 편중”했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편파적으로 선호”함으로써 “보이는 교회에 대한 소홀” 등이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통전적 선교는 교회의 선교와 하나님의 선교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지양하고 장점을 종합하여 “개인의 개종에 대한 부르심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행동에 대한 부르심” 모두에 관심을 쏟는 선교방법을 의미한다. 심광섭, “사회봉사의 신학적 이해,” [인터넷자료]; http://home.hanmir.com/~kykcys/신학적이해.htm. 2002년 1월 27일 접속.
오늘날 사회봉사의 주체가 될 교회가 펼쳐나가야 할 선교의 방향은 바로 이와 같은 통전적 선교에서 찾아야 한다.
더불어 교회의 사회봉사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성령의 역사에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성령은 “사회봉사 실천의 원동력”이다. 손인웅, 40.
일반 사회복지는 휴머니즘의 발로로 가능할 수 있지만, 교회의 사회봉사는 단지 인간적 측면에서의 노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각자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은 신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행2:44-47).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봉사는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주체가 될 때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전문적인 사회단체의 방법을 차용할 수도 있고, 자기 교회의 실정에 맞는 방법을 독자적으로 계발할 필요도 있다. 또한 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근거가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 등 신학적 내용으로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2)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성화
구원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봉사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교회가 사회봉사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교회 구성원 각자가 사회봉사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곧 그리스도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회봉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순종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당신의 봉사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와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게 그리고 대가없이 주어진 것을 믿는 사람이다. 나눔의 삶은 이 구원의 기쁨을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Hendricks, 222-3.
또한 그리스도인의 사회봉사는 성화(sanctification)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화의 문제를 명쾌하고 설득력있는 주장한 신학자는 아마도 존 웨슬리(John Wesley)일 것이다. 그는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성화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 협동한다는 이른바 신인협동설(synergism)을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이 먼저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로 그에 대해 응답할 수 있고, 또 응답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점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신학적 기초가 되는 대목이다. 웨슬리에게 회개는 종교에 들어가는 현관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이며 성화는 종교 그 자체다. 그는 신앙의 본질이란 내면적이지만, 신앙의 증거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John Wesley, The Works of John Wesley, XIV, ed. Thomas Jaxson (Peabody: Hendrickson Publisshers, 1986), 321.
그러므로 사회적 성화를 말하지 않고 개인 성화를 말할 수 없고, 내면적인 구원만을 말한 채 사회적인 구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웨슬리의 강조점이다. 이런 강조점은 먼저 자기 자신을 닦고 다른 사람을 돌보라는 이른바 수기안인(修己安人)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사회봉사는 바로 사회적 성화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십자가 사랑을 성취해 나가야 한다(요일4:8-21).
침례교 신학자 데일 무디는 웨슬리에 대해서, “[그는] 로마 가톨릭이 칭의에 대해 무지했고, 루터교는 성화에 대해 무지했다고 확신했다. 비록 칼빈주의자들이 점진적 성화를 말하는 그 부분에 대해 인정한다 하더라도, 웨슬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인 성화’의 가능성에 대해 확실히 믿었다”고 평가했다. Dale Moody, The Truth of the Word: A Summary of Christian Doctrine Based on Biblical Revelation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1981), 325.
가톨릭이 인간의 성화와 선행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했고, 루터나 칼빈은 너무 하나님의 칭의에 무게 중심은 두었기 때문에, 전자는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고, 후자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데일 무디가 봉사와 소명과 구원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다양한 신분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봉사를 위한 소명은 구원을 위한 소명과 동일한 것이다([고전]7:20-22). 오직 몇 사람만이 봉사하도록 소명 받았다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위해 소명을 받았다고 가르치는 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다. Ibid., 314.
봉사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소명을 받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봉사의 소명을 받는 것이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사회봉사에서도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
3. 사회봉사의 목적: Why?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서 사회봉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실행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사회봉사의 활동이유와 신학적 근거를 묻는 질문이다. 우리는 왜 사회봉사를 해야 하는가?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활동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회봉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 사회봉사를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사회봉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역에 순종하는 신앙임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책임을 부여받았다(창1:28).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존하고 가꾸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창조신앙을 파괴하고 말았다. 파괴된 창조신앙을 회복하는 길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과 자연의 대결구조를 화해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동시에 결코 자연을 지배하고 독점해서는 안될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창조신앙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다. 린 화이트(Lynn White)가 생태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변화를 요청한 것은 창조신앙의 회복을 위한 하나의 선지자적 외침이었다. 린 화이트는 성장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려면 기독교적인 진리에 깊이 뿌리박은 자연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반드시 결부지어 생각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성 프란시스의 자연관에 대한 수용을 제안했다. Lynn White, “생태계의 위기에 관한 역사적 근거,” Francis A. Schaeffer, 「공해」, 송준인 옮김(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0), 94.
과거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적 특성 곧 영혼”(Augustinus), 혹은 “인간의 이성적 본성”(Thomas Aquinas)으로 이해했던 것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부분적 이해에 불과하다. 김명용, “창조의 보전과 새로운 창조신학,” 「장신논단」, 제6집(1990), 297.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바른 이해는 20세기 신학 속에서 본격화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땅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의미가 그 핵심에 놓여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은 자연세계의 질서를 세우고, 이 세계를 돌보며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봉사는 넓은 의미에서 창조신앙을 회복하는 한 방편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섭리(providence)와 보존(preservation), 구속(redemption)과 완성(consummation)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며 보존하신다. 사회봉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신적 활동에 순응하는 행위다. 특별히 사회봉사는 타락한 인간과 자연을 회복하시기 위해 무한한 아가페적 사랑으로 구속의 길을 예비하신 성부 하나님, 섬김과 죽음으로 새로운 존재양식과 질서를 선포하신 성자 하나님, 믿는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로 만드시고 모든 피조물을 썩어짐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시켜 완성의 날을 맞이하게 하는(롬8:20-21)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교회가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사역에 대한 응답으로서 사회를 향해 봉사하며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43.
여기서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은 사회봉사의 방법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충만함과 본성이 인간의 모습으로 구체화하신 것이다. 이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성과 활동을 모두 드러낸 사건이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적 섬김을 드러내신 것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성육신은 기독교 사회봉사의 동기와 형태를 제공한다. Hendricks, 226-7.
특히 해방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는 사회봉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한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삼위일체와 사회」(Trinity and Society, 1988)에서 “사회적 개념의 삼위일체는 지구 위에서 해방적이고 상호 협조적인 사회를 구축하는 천상적인 모델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인간도 이를 따라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온전한 사회적 존재로서 공동체적 삶을 누려야 한다.” Ibid., 46, 48.
우리가 사회봉사를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사회적 삼위일체의 천상적 모델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2) 복음의 사회화: 사회구원
사회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봉사는 개인과 사회 전체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첫 단계의 교회 활동이다. 침례교 신학자 가운데 사회복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다.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란 말이 가장 먼저 사용된 것은 1886년 찰스 브라운이 헨리 조지의 「진보와 가난」(Progress and Poverty)에 대해 반응할 때였다. Bill J. Leonard, "The Modern Church and Social Action," Review and Expositor, 85 (1988): 249.
전통적인 원죄를 인정하면서도 개별적인 죄에 대한 이해와는 구별되는 죄의 사회성을 간파한 라우쉔부쉬는 “집단적인 악”과 사회적인 죄의 전승에 대해 눈을 돌리고, 급기야는 “악의 왕국”에 대해 언급한다: “악의 사회적 이상화란 인간의 집단이나 공동체의 권위에 의해 개인의 윤리적 표준을 그르치게 하고 개인이나 공동체의 양심에 대한 성령의 음성을 마비시키는 것으로...이들은 초인간적인 힘을 통해 사회적인 악과 결합하여 더욱 더 큰 죄의 세력을 강화한다.” W. Rauschenbusch,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New York: The Macmillan Co., 1917), 78.
따라서 그는 악의 왕국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재이며 죄를 전적으로 쥐고 있고 연대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복음만이 현대인의 심성 속에서 악의 왕국을 깨우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영향력이라고 말한다. Ibid., 87.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회복음의 가장 초보적인 이해는 악의 사회화에 대항한 “복음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은 단순히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죄와 구원의 개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의 본질과 범주가 개인의 영혼을 넘어서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될 경우, 그에 따라 구원의 본질과 범위도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따라서 라우쉔부쉬는 이 둘의 관계를 단적으로 이렇게 천명한다: “만일 죄와 악의 왕국이 초인간적인 대리인으로서 작용한다고 하는 우리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영혼과 개인적 관심으로 국한된 구원은 명백히 불완전한 것이며 단지 부분적으로만 효력이 있는 구원이 될 것이다.” Ibid., 95.
그러므로 라우쉔부쉬에 있어서 완전한 구원이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주시는 사랑의 원동력에 순종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동료들의 삶과 자연스럽게 협력함으로써 상호 봉사하는 하나님의 유기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Ibid., 98.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게 될 때 우리는 최상의 공동선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영혼을 자발적으로 사회화하는 것이고, Ibid., 99.
성령은 이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랑과 평화와 인내를 일으키게 하는 “혁명적인 힘”이다. 동시에 신앙도 단순히 과거에 형성된 사상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대요 확신이며, 정의롭고 우애있는 사회질서의 실현을 위해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Ibid., 101-02.
물론 라우쉔부쉬의 사회구원론이 개인구원을 무시하고 사회구원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에서 개인구원은 반드시 최우선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에게 개인의 영적 중생이 빠진,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변혁은 궁극적으로 효과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Stephen Brachlow, “Walter Rauschenbusch,” ed. by Timothy George and David S. Dockery, Baptist Theologians (Nashville: Broadman Press, 1990), 374.
다만 그는 “개인의 구원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반드시 사회적 구원이 따라야 한다”고 함으로써 구원받은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도한호, “라우센부쉬와 사회복음,” 「복음과 실천」, 11집 (1988), 125.
그러므로 할포드 루코크(Halford Luccock)가 “만일 마을의 모든 사람이 자기 집 뒷마당에 우물을 파더라도 결과가 그 마을의 수도 시설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한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Stevens, 125.
사회구원은 사회봉사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런 개념은 침례교 신학자 멀린스(Edgar Y. Mullins)에 의해서도 적극 지지된다. “개인의 중생은 복음전도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에게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첫 번째 단계를 내 딛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거룩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삶 전제를 포함할 것을 요구한다. 그 일은 변화된 개인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Herschel H. Hobbs and Edgar Y. Mullins, The Axioms of Religion, revised edition (Nashville: Broadman Press, 1978), 150-1.
3) 하나님 나라 실현: 사회정의와 평화 구현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사회봉사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교회의 사회봉사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도 사회봉사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 안에서 보여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회봉사는 기독교적 사회봉사가 아니다. 박영환, “사회봉사(Diakonie)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신학적 접근,” 「神學과 宣敎」, 24집 (1999): 26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처럼,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실현될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를 말하는 것인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신학자들이 이해한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가 하는 것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질서(시103:19; 대상29:11), 이스라엘의 신정국(신33:4-5)을 암시하는 다분히 현세적이고 민족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반면에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대체로 영적이고 우주적인 특징으로 설명되고 있다: “예수의 영적 나라는 이스라엘의 신정왕국의 성취이며, 예수님 자신은 구세주-왕이다”(W. W. Stevens).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이 그 안에서 사랑의 교제 가운데서 연합되어 있는 하나의 신적 사회이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 의하여 행하여지며, 사랑이 그들 서로간의 관계와 행위의 표현이며, 하나님이 그의 은혜의 충만 안에서 인간에게 자비롭게 자신을 천명하시는 곳이다”(E. Y. Mullins). 하나님 나라는 “영생으로 구성되는 영적인 선(善)”이고 “국가적, 정치적 제한이 없는 우주적인 것이다”(Albert C. Knudson). W. W. Stevens, 「조직신학개론」, 허긴 역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1997), 389.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미래에 저 세상에서 이루어질 세계만(마26:29)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이미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세계를 포함하기도 한다(마12:28). 결국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과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나라다(요18:36; 눅17:21).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양면성을 가지고 나타난다. 현재성과 미래성, 이 세상성과 저 세상성, 가시적인 면과 비가시적인 면을 동시에 안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 세상성, 가시적인 면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사회봉사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한 단면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수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교회가 노력해야 할 이유다.
4. 사회봉사의 대상: What?
누가 사회봉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일차적으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위해 사회봉사가 요구되지만, 사람의 삶은 사람의 삶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실이고, 우리의 운명이다. 따라서 마땅히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사회봉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 소외된 약자
인간론적 관점에서 볼 때, 우선 사회봉사의 일차적 대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두는 것은 타당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환경이나 신분이나 인종에 관계없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자기의 일부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는(to have)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전부가, 아니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형상(to be)”이기 때문이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34.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죄 때문에 가장 심각하게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존재다. 데일 무디는 인간의 파괴된 형상이 빚은 결과를 두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다스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두 방향으로 곡해되었다([창]1:28). 땅에 충만함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과잉 출산과 과잉 인구를 초래하고, 땅을 정복하라는데 대한 지나친 강조는 자원 개발과 약탈로 이어지면서, 인간은 피조물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재앙이 따르는 것은 인간의 다스림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이루어져야 함을 잊을 때뿐이다. 신학이 없는 기술은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 위에 폭정을 초래한다. Moody, 226-7.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시작했다. 그 뒤부터 이 세상에는 불평등과 부조리가 상존해 왔다. 부자와 가난한 자, 힘있는 자와 약한 자, 어른과 아이, 비장애인과 장애인, 젊은이와 노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 구도가 존재한다. 사회봉사는 이 가운데 특히 소외되기 쉽고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하기 쉬운 약자들에게 일차적인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적 시각은 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봉사는 마땅히 파괴된 인간성 회복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사회계약법(출21:1-23:13), 안식일 제도(신5:12-15), 십일조 제도(신26:12-15), 그리고 예수의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막2:23-28)과 병자와 소외된 사람에 대한 관심(막3:1-6; 막2:17), 은혜의 해 선포(눅4:18-19) 등은 사회봉사가 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율법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30-37)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도움을 베푸는 것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런 사랑의 실천을 우리는 문둥병자 치유 사건(마8:1-3)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이 하늘의 저주를 받아 생긴 병이라 불결하다하여 가까이 가지도 않으려 했는데, 예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지는 일은 유대법에도 어긋나는 일이거니와, 본인에게 끔찍한 병이 전염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에게 손을 대셨다. 헬라어로 “손을 대다”는 단어는 대충 손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절벽에 매달려 있는 누군가를 끌어당길 때 필요할 정도의 압력(grip)”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Jim Thomas, 「까페에서 즐기는 신학」, 김광남 옮김 (서울: UCN, 2002), 168.
이것은 “온전한 포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봉사는 바로 예수께서 하신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최종적으로 선언한 것은 바로 제자도 정신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이 명령은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종교적인 계명준수나 습관적인 율법준수를 원치 않으셨다. 종교적 의례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적 윤리였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형식적인 율법의 자구 준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사회봉사는 이 점에서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소외된 이웃에게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사회봉사를 실천하고자 하는 교회는 이런 예수의 사랑과 관심을 배워야 한다. 예수는 특별히 가난한 백성들, 병든 백성들, 옥에 갇힌 백성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다(마25:40). 예수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다(골1:15).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는 히브리서 기자의 부탁도 예수의 관심에 교회가 귀를 기울이라는 권면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봉사의 존재 이유”가 된다. 예수의 사랑은 “사회봉사의 동기”가 된다.
2) 모든 피조물
소외된 약자가 일차적인 사회봉사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자연, 즉 모든 피조물이 사회봉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창조주가 의도한 바”이기 때문이다. Hendricks, 221.
그러므로 사회봉사는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차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는 일차적으로 인간으로 구성된 공동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사회가 인간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인간과 동물과 자연으로 구성된다. 자연이 파괴되면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도 파멸한다.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봉사의 영역은 좀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생태계 위기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세계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근본사상을 근거로 하여, 인간과 자연은 모두 이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정립이 필요하다. 창세기 1장 26절의 “다스리라”는 명령은 결코 착취와 약탈을 위한 다스림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선한 관리의 책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스린다”는 것은 본래 파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자의 행복을 위하여 “돌본다”는 것을 뜻한다.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101.
동시에 땅을 “정복하라”(창1:28)는 말은 땅을 파괴하고 약탈해도 무방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땅을 다스려서 땅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형식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Ibid., 103.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회복은 자연에 대한 창조신앙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접근 가능하게 되며,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상호소외의 반(反)창조신앙”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우주적 보편성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는 사11:6-9; 시103:19,22; 고전15:20-28; 엡1:22-23; 골1:15-20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온 우주의 화해, 곧 구원의 사건은 이러한 창조신앙을 더욱 자리매김하는 복음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의 죄 용서, 마음의 평화를 넘어서서 온 우주의 평화, 자연과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김균진, 151.
스티븐스는 하나님이 선교의 명령을 주신 것은 창조의 명령을 회복하기 의함이라고 말한다. “복음전도의 목적은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또한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Stevens,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115.
이것이 사회봉사가 의미하는 우주적 차원이다.
5. 사회봉사의 시간과 장소: When and Where?
1) 지금
때[時]에 맞추어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시중(時中) 사상이라 했다. 예수께서도 때가 차매 복음을 증거하셨다. 그런데 교회가 언제부터 사회봉사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실제적인 질문이다. 사회봉사와 교회의 존재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시작하는 그 때부터 사회봉사는 시작되어야 한다. 어떤 교회는 거창하게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세워놓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 교회가 그 일을 수행할 만큼 자립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교회의 자체 건물을 짓고 교인들이 어느 선까지 증원된 다음, 본격적인 사회봉사든 복지사업이든 하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스스로 빠져 들어가는 함정일 뿐이다. 지금 시작하지 않는 교회는 나중에도 할 수 없다. 언제나 교회의 예산은 부족하기 마련이다.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교회의 예산이 들어갈 곳은 더 많아진다. 개척교회 때부터 일정 비율을 사회봉사로 떼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교회가 커지더라도 제대로 사회봉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마찬가지다. 사회봉사는 마음만 먹고 있다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해야 할 삶의 한 부분이다.
고아원을 세우고 재활원을 운영하겠다는 교회가 결국 꿈만 먹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재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대개 마음자세와 태도의 문제 때문이다. 사실 교회의 사회봉사는 꼭 많은 교인과 재정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참여가 바로 사회봉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교회가 커진 다음에 하겠다는 것은 사회봉사의 의지가 없이, 생색내기 위한 혹은 명분 만들기에 불과하다. 지금 시작해야 한다.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첫 걸음을 떼는 것이 중요하다.
2) 여기
사회봉사를 어디서 할 것인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대한 신학적 문제에 속한다. 사회봉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신학적 대원칙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 있는 교회 안과 밖이 모두 사회봉사의 대상지역이기 때문이다. 라우쉔부쉬는 「기독교와 사회 위기」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라는 책에서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직된 교회는 인간의 공동된 삶 속에 깊이 뿌리 내린 가장 위대한 사회 제도다. 만일 다른 사람들의 삶이 어떤 항구적인 악에 의해 고통을 당한다면 교회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눌 의무가 있다.” Walter Rauschenbusch,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 (Macmillian Company, 1907;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1), 287.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교회도 하나의 사회다. 그러므로 사회봉사는 교회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사회봉사라 해서 꼭 교회밖으로만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 있는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을 외면한 채 교회 밖으로 사회봉사를 나가는 것은 위선이다. 먼저 교회 안에서 사회봉사가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교회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가 끝나고 다른 하나를 시작하는 시간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도, 즉 우선순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회 안과 밖에서의 사회봉사는 언제나 병행되어야 한다.
사회봉사가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요청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저 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만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나, 구원의 관점에서 보나 “지금과 여기”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대단히 강조되는 복음의 핵심이다. 사실 현재가 빠진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모든 시간은 현재적이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현재요, 미래는 다가오지 않은 현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보다 늘 현재에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성을 무시한 채, 과거만 회상하거나 미래만 바라보고 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데일 무디는 구원과 시간의 문제를 논하면서 사도 바울의 신학을 이렇게 평가한다:
사도 바울의 신학은 대부분 과거, 현재, 미래로서 구원의 유형을 떠나서는 논의될 수 없다.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사용한 대부분의 단어들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술어들이다.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는 것은 구원의 전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Moody, 311.
그러므로 현재를 망각하고 이 땅을 외면한 채, 저 세상에서 미래에 경험하게 될 구원을 말하는 것은 정상적인 기독교신앙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그 시대마다 현안으로 떠오는 문제들에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각 시대마다 필요한 봉사의 방식이 서로 달랐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구제하고 노예를 보살피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면, 현대교회는 생태계의 위기를 구제하고 핵문제를 논의하고 세계의 가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심을 모은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교회가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6. 사회봉사의 방법: How?
그렇다면 어떻게 사회봉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여기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보다 선행되어야 할 실천방안의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교회의 예산 편성의 문제라든지, 구체적인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1) 개인의 삶 속에서 나눔: 일상성과 지속성
각 교단 차원에서 사회복지재단 등을 설립해서 체계적으로 사회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중요하고 교회들이 사회복지시설을 세우고 지원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절실한 것은 각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 의식을 고취하는 일이다. 문제는 사회봉사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이를 위해 먼저 바로 잡아야 할 문제는 사회봉사나 사회참여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비본질적인 문제로 취급되는 현실이다. 사회봉사는 그 자체로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지, 복음전도의 한 수단으로서 간주될 수 없다.
참된 영성은 반드시 교회 안에서 예배나 기도시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심(日常心)과 신앙심(信仰心)은 결코 별개가 될 수 없다. 주일이면 신앙심으로 무장되었다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상심으로 돌변해 버리는 이중적인 마음은 정상이 아니다. 어디에 있으나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 즉 일상심이 신앙심이 되어야 한다. 스티븐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된 영성은 우리 삶 전체와 관련돼 있으며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참된 영성은 예배 시간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이런 현실적인 영성과 관계된 것으로 가득하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계된 구절은 거의 없다. 반대로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요구하고 있다(롬 12:1; 약 1:27; 마 10:47; 히 11:11-16; 벧전 3:7; 골 3:17). Stevens,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182.
굳이 봉사하기 위해 일부러 먼 이국까지 갈 필요는 없다. 바로 우리 이웃에 우리의 “캘커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봉사를 하기 위해 주말마다 멀리 떨어진 시설을 방문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자기 자신의 일상 속에서 봉사하는 마음과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이웃에는 언제나 어디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그들을 향해 섬김의 손길을 펼 수 있으면 된다.
동시에 사회봉사의 지속성이 필요하다. 교회가 주체가 되든, 개개인이 그 일을 하든, 사회봉사는 지속적으로 계획을 가지고 추진되어야 한다. 일회성 이벤트 행사에 그치는 사회봉사는 오히려 그 정신과 효과를 퇴색시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
교회의 사회봉사가 지속성을 가지려면 교회의 적극적인 의지와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화된 삶에 대한 강조다.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홀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라면 우리는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삶 자체에 신앙의 의미가 부여될 때, 그리고 그 삶이 봉사하는 삶, 나누는 삶으로 인식될 때 사회봉사는 지속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2)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조화 속에서
교회가 사회봉사를 활발히 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교회(institutional church)에서 벗어나 기능적 교회(functional church)로 전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지역사회 활동」(The Church in Community Action)의 저자 하비 세이퍼트(Harvey Seifert)는 기능적 교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획을 위하여 부단히 목적을 수정한다. 둘째, 인간사랑을 기반으로 하며 사회의식이 강하다. 셋째, 인간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며, 설교 메시지는 현실생활의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넷째,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각종 정치, 경제, 국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윤리적 판단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할 효과적인 기술을 개발한다.” 김동배, “사회봉사 활성화를 통한 참 교회의 모습 찾기,” 「목회와 신학」, 1992년 5월호, 25.
이는 교회가 단지 지역교회(local church)를 넘어서서 지역사회 교회(community church)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교회는 일종의 흩어지는 교회다. 모이는 교회를 에클레시아(ekklesia) 교회라 한다면 흩어지는 교회는 디아스포라(diaspora) 교회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이웃사랑이 가능하려면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웃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소금은 두 가지 치명적인 독약, 즉 나트륨과 염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따로 분리시켜 놓으면 독약이 되지만, 하나로 합성해 놓으면 소금이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에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다른 하나가 빠진 상태에서는 각 요소가 치명적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다. Stevens,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128.
그러므로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를 전제할 때 의미가 있고, 반대로 흩어지는 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선행될 때 가능하다. 데일 무디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곧 사명이며, 사명이 없는 곳에 교회는 없다. 하나님은 메시지와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부르셨다.” Moody, 427.
3) 교회 사명의 균형감각: 사회봉사와 복음증거를 함께
우리는 사회봉사가 복음증거를 외면한 채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데일 무디는 교회의 사명을 증거의 사명(베드로 전통), 봉사의 사명(바울 전통), 교제의 사명(요한 전통)으로 나누면서, 이 세 가지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것에 비해 봉사가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것을 무디는 이렇게 경계한 바 있다: “봉사라는 기치 아래 좌익 급진과 복음 증거와 사명을 가진 우익 보수주의자들은 과거 죽은 교단주의가 그러했듯이 교회의 교제에 큰 위협이 되었다. 만일 교회의 다중적 사명이 회복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세상 속에 서기 위해 세 개의 다리를 가진 탁자가 필요하다: 증거, 봉사, 교제.” Ibid., 433.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봉사는 복음증거와 교제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수행될 수 없는 일이다.
복음증거와 사회봉사의 관계는 매우 민감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둘의 관계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모두 붙드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하나의 커다란 과제다. 흩어지는 교회를 강조한다고 할 때 결코 복음증거를 외면하고 사회활동에만 주력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복음증거를 앞세운다고 할 때 사회봉사를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아니다. 복음증거는 곧 사회봉사가 되고, 사회봉사는 곧 복음증거가 된다. 따라서 마땅히 복음증거와 사회봉사는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
핸드릭 크레머(Hendrik Kraemer)는 타종교들에 대한 복음주의적 접근방법을 말하면서, 사회봉사와 복음증거의 상호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진리를 증거하는 일이 세상과 인간을 섬기고자 깊이 원하는 정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약 일반적으로 섬김이라는 용어로 일컬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일차적인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진정으로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증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결국은 우리들의 사역의[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토대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Hendrik Kraemer,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최정만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430.
복음증거만 강조해도 안되고, 사회봉사만 내세워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크레머는 교회의 세 가지 표현, 즉 예배와 증거와 섬김에 대해 “각각이 본질적인 특성으로 하는 정신에 젖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활동과 문화활동은 그 본질적인 증거 및 복음전도 프로그램의 액세서리가 아니라 그 본성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Ibid., 456.
따라서 사회봉사가 오직 복음증거의 한 수단으로 전락되어서도 안되고, 반대로 복음증거가 빠지고 사회봉사만 남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봉사는 단순한 구제활동 차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회복하는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봉사와 복음증거는 별개의 두 가지 활동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교회 선교라는 통전적 사고로 해석되어야 한다.
7. 결론
이상에서 6하 원칙에 따라 사회봉사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사회봉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감사를 지금 여기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삶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모두 나누어주셨던 것처럼, 교회도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회봉사, 즉 나누는 행위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요 필수적인 문제인 것이다.
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358명이 전체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23억 명이 소유한 부와 동일한 부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그 빈부의 격차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H. J. Karger and D. Stoesz, American Social Welfare Policy, a Pluralist Approach (New York: Longman, 1998) in Mary Ann Suppes and Carolyn C. Wells, The Social Work Experience: An Introduction to Social Work and Social Welfare, Third Edition (Boston: McGraw-Hill, 2000), 100.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나눔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명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난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까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될 때 비로소 그들의 삶에 하느님을 모셔다 드릴 수 있고, 그들 또한 하느님에게 나아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Jose L. Gonzalez-Balado 엮음, 「마더 테레사 말씀」, 황애경 옮김 (서울: 디자인하우스, 1997), 109.
테레사 수녀의 말은 우리가 서로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저 구제하듯 몇 푼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와 감정을 공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Ibid.
사회봉사는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나누는 같아지는 것이다. 독일 사회봉사국 총재로 22년간 일해온 테오도르 쇼버(Theodor Schober)는 「목회와 신학」지의 인터뷰에서 “나눈다는 것은 모든 차별을 극복하는 중요한 계기”라고 말하면서, 그는 독일교회가 1년 전체 예산 가운데 절반 가량을 사회봉사 비용으로 내놓고 있으며, 독일 전체 복지시설의 50-60%를 운영한다고 자랑스레 말한 바 있다. 박지숙, “독일교회 사회봉사국 전총재 테오도르 쇼버,” 「목회와 신학」, 1992년 4월, 11.
이런 사회봉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동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는 삶”이라는 글귀가 더욱 그리스도인에게 의미있게 다가온다. 박영호, 「기독교사회복지」, 51.
이 사랑의 행위는 “추상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인간을 보살피는 실천의 범주에 진입하는 것”으로써, “이러한 태도는 사회, 경제, 정치의 영역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R. Duane Thompson, “사회참여: 하나님 백성의 책임,” 「현대 웨슬리신학 II」, Charles W. Carter 외 엮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310.
사도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고 말했다. 나눔의 정신인 사회봉사는 서로 짐을 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여러 기능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 그 자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사회봉사는 하나의 의무이며 동시에 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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