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익과 조덕삼
한국 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한 이 자익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은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끼니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얻어 먹었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고 가출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다니다가 온 곳에 곡창지대 김제였습니다. 그는 어느 부자집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밥만 먹여주면 머슴이 되겠습니다. 시키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머슴으로 써주었습니다. 그는 죽을 둥 살 둥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집을 떠나면 굶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미국 남장로교 최 의덕 선교사가 김제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일찍 들어 간 곳입니다. 이 선교사가 마방을 드나들면서 전도하다가 이 자익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이 자익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 가족도 함께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무식한 이 자익은 주인 아들이 독방에서 한문자 읽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암송하면서 한문자를 배웠습니다. 어깨 넘어로 공부한 것입니다.
최 의덕 선교사는 김제를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점점 늘어 나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금산교회입니다. 선교사는 주인 조 덕삼과 머슴 이 자익을 교회 일군으로 함께 임명하였습니다.
최 의덕 선교사 선교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이 자익 청년을 설교자로 임명하였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맡길 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조덕삼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설교자가 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은혜도 충만히 받았습니다. 조금도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08년이었습니다.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데 조 덕삼과 이 자익이 장로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투표를 하였습니다. 투표 결과 이 자익은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조 덕삼은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때 조 덕삼이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교우들이여!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자익은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젊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열심히 있습니다. 우리 이 자익을 장로로 잘 받들어 교회를 성장시키십시다."
모두가 감격속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1년 후에 조 덕삼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자익 장로는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서 머슴인 이 자익 목사를 잘 받들어 섬겼던 조덕삼 장로는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크게 세움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제13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기에 1924년 총회장이 당선이 되어 회무 처리하는 일
까지만 기록을 남기었다. 총회장이 끝나자 잠시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교회를 시무하는 중에 호
주 장로교 선교부 요청에 의해 1925년 이명서 없이 파견하는 형식으로 가족을 이끌고 경상남
도 거창 선교부 선교사로 활동하게 됐다. 이자익 목사는 순회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27년? 6월
제22회에 모이는 경남노회에서는 그를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됐다. 1927년 9월 함남 원산시 광
석교회에서 모이는 제16회 총회 총대로 노회장 자격으로 이자익 목사와 서기인 최상림 목사,
총대 김길창 목사, 주기철 목사 이렇게 4명이 참석했다. 장로도 4명, 선교사는 2명이 참석했다.
이때 이자익 목사는 총회 신학교육부 부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총회에 적지 않는 영향을 행사했
다. 당시 마산 문창교회 사건은 총회적으로 이름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는 이자익 목사밖에 없다하여 거창 선교부에서는 순회 목사라는 직책을 갖고 어려운 교
회만 찾아다니는 일을 맡아 왔다. 그의 수고를 계속할 수 있도록 다음해에도 경남노회장을 연속
적으로 맡았다.
이러한 관계로 경남노회 내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 둘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극심
한 분규로 어지러웠던 마산 문창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총회장을 역임했던 함태영
목사가 부임해 잘 해결됐으며, 주기철 목사의 모 교회인 웅천교회는 6년 간이나 분규되어 따로
예배를 드렸던 사건이 이자익 목사의 중재로 잘 해결을 보게됐다. 이자익 목사는 함태영 목사의
지도력에 놀라 그를 1929년 6월 제26회 경남노회장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이자익 목사는 거창
선교부의 사역을 마감하고 1936년 9월에 전북노회로 원대 복귀를 하였다. 금산교회와 원평교
회에서는 대 환영을 하였다. 그 동안 금산교회와 원평교회는 곽진근 목사가 시무했다. 하나님께
서는 이자익 목사를 사랑해 주시어 신사참배 하는 총대로 나가지 않도록 해 준 일에 대해서 몇
번이고 감사를 하였다.
1946년 4월 30일 제2회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정동제일교회에서 소집되었으며, 친일 행각에
앞장섰던 김관식 목사, 송창근 목사는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때 대회장에
배은희 목사가 선출되었다. 배은회 목사는 총회를 재건해야 한다면서 1946년 6월 1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재건 총회를 소집하였다. 제33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총회장 배은희 목사
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이때 임원을 선거하는 데 그동안 일본제국주의에 물들지 않고 참신한 지
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면서 모든 총대원들이 금산읍교회 동사 목사로 재작 중인 이자익 목사를
제33회 총회의 수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조선신학교 51명 재학생들이 진정서를 총대원들에게
배포한 일이 있었다. 내용은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평학이 문제였다. 이때 이 문제를 현장에서
처리하지 말고 7인위원회를 선임하여 진정서 내용을 알기 위해서 김재준 교수와의 면담을 요
청하여 그 진상을 파악하기로 했다. 그동안 남부 재건 총회를 32회로 회수를 고치고 역시 남부
총회는 33회로 회수를 바꾸기로 했다.
한국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자익 목사님은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김제의 부자 집에 찾아가 머슴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아 그 자신은 물론 주인집까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그곳에 금산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주인 조덕삼과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영수가 되어 교회를 받들었습니다. 교회를 맡았던 선교사는 여러 교회를 개척하다보니 이곳 금산교회에만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없는 날은 의례히 조덕삼 영수보다 설교에 능한 이자익 조사가 주일 설교를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1908년에 조덕삼과 이자익을 사이에 두고 장로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투표 결과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곧 교회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졌습니다. 이때 자기 집 머슴이 장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덕삼 영수는 일어나 “성도 여러분! 참 감사합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봉사하기가 어려운데, 젊은 이자익 영수를 장로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어 섬겨서 교회를 부흥시킵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교인들이 감동을 받아 그 다음해에 조덕삼 영수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이자익 장로는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에 세 번이나 당선되었습니다. 한편 조덕삼 장로님의 겸손하고 훌륭한 믿음은 자자손손 계승되어 오늘날까지도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1905년에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금산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과거에는“두정교회”라고 했는데 그 교회가 세워진 동기가 아주 은혜롭습니다. 당시 금산에는“조덕삼”이라는 부자가 살고있었습니다. 이분은 전주지방에서도 큰 소리를 칠 정도로 큰 부자였다고합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양반과 천민의 구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별이 분명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조덕삼이라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자 그의 행동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집에서 일을 하고 말을 끌었던“이자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주일이 되면 이 사람을 시켜 집집마다 예배당에 오라고 하여 예배를 드려 교회가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점점 교인이 늘어나고 이 두 사람도 학습, 세례를 다 받고 어느 정도 교회가 커지게 되자 교회의 일군인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시작한 사람은 조덕삼과 그 하인인 이자익이었기 때문에 장로로 지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투표를 했습니다. 누가 되었겠습니까?
부자요 주인인 조덕삼이 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 집의 마부요 하인인 이자익을 그 교회에 첫 번째 장로로 선택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 하인이었던 네가 장로라고? 따로 나가서 교회를 세워야 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자익이 자신의 하인이며 마부지만 많은 교인들에 의해 장로로 선택이 된 날부터 그는 이자익을 얼마나 겸손히 받들어 섬기는지... 너무나 잘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만 해도 천민과 양반의 구별이 확연했던 때인데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만은 양반이나 천민이나, 지주나 소작인이나, 하인이나 노동하는 사람 가릴 것 없이 이 교회에 와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교회가 성장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성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1920년도에 이미 300명이 넘는 교인을 갖을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얘기입니다.
이자익씨는 이후에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두정교회에 부임했고 조덕삼 장로는 그를 더 받들어 섬겨 교회를 부흥시켜 나갔다고 합니다. 또한 조덕삼 장로는 “유광학교”를 설립하여 금산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교육을 하였다고 합니다.
조덕삼 장로의 아들이 조영호 장로라고 하는데 이 분 또한 신앙이 돈독하여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갇혀 시련을 겪었고 해방된 후 많은 사람들이 조영호장로에게 국회의원이 되기를 권유하였지만 그는 자신보다 지역교회의 선배 장로님들 중 선택하자고 하면서 양보하고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그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본을 보이니 자식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조영호 장로의 아들이 여러분 잘 아시는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을 지낸“조세형”씨입니다. 이 분은 무학교회를 잘 섬기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 우리는 역사의 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두사람 가운데 누가 승리자입니까? 하인으로 태어나 장로가 되어 지주를 지도해야 하는 직분을 가지게 된 이 분이 승리자입니까? 아니면 비록 지주지만 그 자신의 노비에게 장로의 자리를 내어주고 그를 섬기며 나중에 장로가 된 사람입니까?
우리가 세상적인 말로 하면 이 사람, 저 사람이다 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을 다 기쁘게 여기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덕삼 장로님이 더 귀한 분인 것 같습니다. 이런 분이 많아야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이런 사람이 있어야 민족이 잘 되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한국 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한 이 자익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은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끼니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얻어 먹었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고 가출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다니다가 온 곳에 곡창지대 김제였습니다. 그는 어느 부자집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밥만 먹여주면 머슴이 되겠습니다. 시키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머슴으로 써주었습니다. 그는 죽을 둥 살 둥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집을 떠나면 굶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미국 남장로교 최 의덕 선교사가 김제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일찍 들어 간 곳입니다. 이 선교사가 마방을 드나들면서 전도하다가 이 자익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이 자익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 가족도 함께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무식한 이 자익은 주인 아들이 독방에서 한문자 읽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암송하면서 한문자를 배웠습니다. 어깨 넘어로 공부한 것입니다.
최 의덕 선교사는 김제를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점점 늘어 나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금산교회입니다. 선교사는 주인 조 덕삼과 머슴 이 자익을 교회 일군으로 함께 임명하였습니다.
최 의덕 선교사 선교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이 자익 청년을 설교자로 임명하였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맡길 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조덕삼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설교자가 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은혜도 충만히 받았습니다. 조금도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08년이었습니다.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데 조 덕삼과 이 자익이 장로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투표를 하였습니다. 투표 결과 이 자익은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조 덕삼은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때 조 덕삼이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교우들이여!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자익은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젊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열심히 있습니다. 우리 이 자익을 장로로 잘 받들어 교회를 성장시키십시다."
모두가 감격속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1년 후에 조 덕삼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자익 장로는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서 머슴인 이 자익 목사를 잘 받들어 섬겼던 조덕삼 장로는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크게 세움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제13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기에 1924년 총회장이 당선이 되어 회무 처리하는 일
까지만 기록을 남기었다. 총회장이 끝나자 잠시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교회를 시무하는 중에 호
주 장로교 선교부 요청에 의해 1925년 이명서 없이 파견하는 형식으로 가족을 이끌고 경상남
도 거창 선교부 선교사로 활동하게 됐다. 이자익 목사는 순회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27년? 6월
제22회에 모이는 경남노회에서는 그를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됐다. 1927년 9월 함남 원산시 광
석교회에서 모이는 제16회 총회 총대로 노회장 자격으로 이자익 목사와 서기인 최상림 목사,
총대 김길창 목사, 주기철 목사 이렇게 4명이 참석했다. 장로도 4명, 선교사는 2명이 참석했다.
이때 이자익 목사는 총회 신학교육부 부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총회에 적지 않는 영향을 행사했
다. 당시 마산 문창교회 사건은 총회적으로 이름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는 이자익 목사밖에 없다하여 거창 선교부에서는 순회 목사라는 직책을 갖고 어려운 교
회만 찾아다니는 일을 맡아 왔다. 그의 수고를 계속할 수 있도록 다음해에도 경남노회장을 연속
적으로 맡았다.
이러한 관계로 경남노회 내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 둘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극심
한 분규로 어지러웠던 마산 문창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총회장을 역임했던 함태영
목사가 부임해 잘 해결됐으며, 주기철 목사의 모 교회인 웅천교회는 6년 간이나 분규되어 따로
예배를 드렸던 사건이 이자익 목사의 중재로 잘 해결을 보게됐다. 이자익 목사는 함태영 목사의
지도력에 놀라 그를 1929년 6월 제26회 경남노회장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이자익 목사는 거창
선교부의 사역을 마감하고 1936년 9월에 전북노회로 원대 복귀를 하였다. 금산교회와 원평교
회에서는 대 환영을 하였다. 그 동안 금산교회와 원평교회는 곽진근 목사가 시무했다. 하나님께
서는 이자익 목사를 사랑해 주시어 신사참배 하는 총대로 나가지 않도록 해 준 일에 대해서 몇
번이고 감사를 하였다.
1946년 4월 30일 제2회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정동제일교회에서 소집되었으며, 친일 행각에
앞장섰던 김관식 목사, 송창근 목사는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때 대회장에
배은희 목사가 선출되었다. 배은회 목사는 총회를 재건해야 한다면서 1946년 6월 1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재건 총회를 소집하였다. 제33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총회장 배은희 목사
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이때 임원을 선거하는 데 그동안 일본제국주의에 물들지 않고 참신한 지
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면서 모든 총대원들이 금산읍교회 동사 목사로 재작 중인 이자익 목사를
제33회 총회의 수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조선신학교 51명 재학생들이 진정서를 총대원들에게
배포한 일이 있었다. 내용은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평학이 문제였다. 이때 이 문제를 현장에서
처리하지 말고 7인위원회를 선임하여 진정서 내용을 알기 위해서 김재준 교수와의 면담을 요
청하여 그 진상을 파악하기로 했다. 그동안 남부 재건 총회를 32회로 회수를 고치고 역시 남부
총회는 33회로 회수를 바꾸기로 했다.
한국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자익 목사님은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김제의 부자 집에 찾아가 머슴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아 그 자신은 물론 주인집까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그곳에 금산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주인 조덕삼과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영수가 되어 교회를 받들었습니다. 교회를 맡았던 선교사는 여러 교회를 개척하다보니 이곳 금산교회에만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없는 날은 의례히 조덕삼 영수보다 설교에 능한 이자익 조사가 주일 설교를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1908년에 조덕삼과 이자익을 사이에 두고 장로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투표 결과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곧 교회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졌습니다. 이때 자기 집 머슴이 장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덕삼 영수는 일어나 “성도 여러분! 참 감사합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봉사하기가 어려운데, 젊은 이자익 영수를 장로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어 섬겨서 교회를 부흥시킵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교인들이 감동을 받아 그 다음해에 조덕삼 영수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이자익 장로는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에 세 번이나 당선되었습니다. 한편 조덕삼 장로님의 겸손하고 훌륭한 믿음은 자자손손 계승되어 오늘날까지도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1905년에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금산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과거에는“두정교회”라고 했는데 그 교회가 세워진 동기가 아주 은혜롭습니다. 당시 금산에는“조덕삼”이라는 부자가 살고있었습니다. 이분은 전주지방에서도 큰 소리를 칠 정도로 큰 부자였다고합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양반과 천민의 구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별이 분명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조덕삼이라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자 그의 행동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집에서 일을 하고 말을 끌었던“이자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주일이 되면 이 사람을 시켜 집집마다 예배당에 오라고 하여 예배를 드려 교회가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점점 교인이 늘어나고 이 두 사람도 학습, 세례를 다 받고 어느 정도 교회가 커지게 되자 교회의 일군인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시작한 사람은 조덕삼과 그 하인인 이자익이었기 때문에 장로로 지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투표를 했습니다. 누가 되었겠습니까?
부자요 주인인 조덕삼이 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 집의 마부요 하인인 이자익을 그 교회에 첫 번째 장로로 선택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 하인이었던 네가 장로라고? 따로 나가서 교회를 세워야 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자익이 자신의 하인이며 마부지만 많은 교인들에 의해 장로로 선택이 된 날부터 그는 이자익을 얼마나 겸손히 받들어 섬기는지... 너무나 잘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만 해도 천민과 양반의 구별이 확연했던 때인데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만은 양반이나 천민이나, 지주나 소작인이나, 하인이나 노동하는 사람 가릴 것 없이 이 교회에 와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교회가 성장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성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1920년도에 이미 300명이 넘는 교인을 갖을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얘기입니다.
이자익씨는 이후에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두정교회에 부임했고 조덕삼 장로는 그를 더 받들어 섬겨 교회를 부흥시켜 나갔다고 합니다. 또한 조덕삼 장로는 “유광학교”를 설립하여 금산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교육을 하였다고 합니다.
조덕삼 장로의 아들이 조영호 장로라고 하는데 이 분 또한 신앙이 돈독하여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갇혀 시련을 겪었고 해방된 후 많은 사람들이 조영호장로에게 국회의원이 되기를 권유하였지만 그는 자신보다 지역교회의 선배 장로님들 중 선택하자고 하면서 양보하고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그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본을 보이니 자식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조영호 장로의 아들이 여러분 잘 아시는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을 지낸“조세형”씨입니다. 이 분은 무학교회를 잘 섬기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 우리는 역사의 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두사람 가운데 누가 승리자입니까? 하인으로 태어나 장로가 되어 지주를 지도해야 하는 직분을 가지게 된 이 분이 승리자입니까? 아니면 비록 지주지만 그 자신의 노비에게 장로의 자리를 내어주고 그를 섬기며 나중에 장로가 된 사람입니까?
우리가 세상적인 말로 하면 이 사람, 저 사람이다 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을 다 기쁘게 여기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덕삼 장로님이 더 귀한 분인 것 같습니다. 이런 분이 많아야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이런 사람이 있어야 민족이 잘 되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설교 > 예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의 두려움만 이긴다면 (0) | 2007.02.12 |
---|---|
원숭이 그림 (0) | 2007.02.12 |
백남준씨 부인의 말 (0) | 2007.01.31 |
고당 조만식선생의 일화 (0) | 2007.01.28 |
짐을 벗어 던져라 (0) | 2007.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