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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난 몸이 쑤시고 아파야 글이 나와요… '토지'의 작가가 털어놓았다

하마사 2018. 2. 13. 15:21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3) 박경리(1926~2008)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일생 동안 투쟁한 그녀
남편을 구치소에서 잃고 사위는 中情 들락날락
애연가였던 폐암 환자는 큰 범행을 저질렀다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 피운 것이다

박경리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작가 박경리의 82년 삶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악령들과 결투의 일생.' 이런 판단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의 일생은 천사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엄숙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박경리는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그런 숨 가쁜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본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진난만한 아름다운 얼굴을 죽는 날까지 간직하면서 이 세상에 가득 찬 사탄을 퇴치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지만, 사탄들의 막강한 힘을 혼자 감당할 수는 없었다. 영국 시인 셸리 말대로 "나 인생의 가시밭에 쓰러져 피 흘리노라" 울부짖으며 쓰러졌지만, 박경리는 자기의 천사 같은 얼굴을 지켜내는 한 가지 일에는 성공했다고 나는 믿는다.

박경리는 1926년 10월의 어느 날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여고를 마치고 시집가서 딸 김영주를 얻었다. 학창 시절 박경리는 무슨 일에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평범한 학생이었다. 일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사람은 중진 작가로서 명성이 자자하던 '무녀도'의 김동리였다. 박경리가 진주여고 동창인 한 친구를 통해 그에게 보여준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몇 편의 시였는데, 박경리에게 시보다는 소설을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한 이가 김동리였다. 그리하여 '현대문학'에 세 차례 그의 단편이 추천 게재되고 박경리는 작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를 마치고 황해도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그에게 시련이 밀어닥쳤다. 겨레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6·25사변이 터진 것이다. 사상 문제로 당국의 감시를 받았던 남편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가 목숨을 잃었고 세 살밖에 안 되던 영주의 남동생 또한 세상을 떠나니 이십 대 중반의 박경리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민과 고통 속에서 글을 쓰고 싶어했던 잠재적 욕구가 차차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박경리는 단편 '흑흑백백'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57년 단편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붓 한 자루를 들고 자기 한 몸을 질곡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원수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박경리가 우리 시대의 대표적 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소설 '김약국의 딸들'이 출판되면서부터였다. 초판도 어지간히 팔리기는 했지만 재판이 나오면서부터 그 소설은 '낙양의 지가'를 치솟게 하는 전무후무한 작품으로 변신했다. 해당 출판사는 빌딩 한 채를 지을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뒤에 그 작품이 TV 드라마가 돼 작가 박경리는 누구나 이름을 기억하는 당대의 가장 저명한 명사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박경리가 필생의 대작으로 시작한 '토지'는 1969년에 집필하여 1994년까지 장장 26년간 200자 원고지 3만2000장에 수록된 20권의 대하소설이다.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가 옮겨가서 살게 된 원주가 박경리 때문에 유명한 도시가 되고 토지문화관도 세워졌다.

이 모든 놀라운 성공이 박경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던가. 그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미소 짓는 눈초리로 자기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는가. 그는 조금도 행복해지지 못했다. 첫째는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젊어서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재발하지 않았는데, '오진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예쁜 딸 영주가 시집을 가서 손자 원보가 태어난 것은 할머니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기쁜 일이었지만 원보의 아버지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가거나 또는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거나 하였으니 설사 돈 걱정은 안 하는 신세가 됐어도 행복하게 잘 살 수는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원주에 자리한 토지 작가의 자택을 한번 방문했을 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몸에 어디가 쑤시고 아프지 않으면 안 돼요. 심지어 치통이라도 있어야 글이 써집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박경리는 본디 애연가여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입원하고 있던 큰 병원의 병실에서 이 폐암 환자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큰 '범행'을 하나 저질렀다. 자기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를 피운 것이다. 이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짓을 박경리는 감히 한 것인데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인간 박경리를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뜻과 내용은 판이한 것 같지만, 예수가 자기 삶의 마지막에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것을 나는 왜 되새 겨보았을까. 박경리는 그 많은 악인과의 싸움에서 내가 승리한다고 한마디 선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통영시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통영의 딸을 통영으로 모셔다 묘역을 크게 조성한 사실을 박경리는 조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 박경리는 모든 원수의 온갖 만행을 다 용서하고 영원의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생은 승리한 일생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09/2018020901771.html


-조선일보, 2018/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