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삶의 우선순위

하마사 2017. 5. 12. 21:49

본문: 마 6:24~34        

제목: 삶의 우선순위

목표: 삶의 우선순위를 알게 한다.

 

    

어느 가게를 운영하던 주인이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슬픔에 잠긴 식구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가게 주인은 천천히 식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보았습니다. "여보, 당신 어디 있소?""예, 저 여기 있어요.""딸애는 어디 있느냐?" "예, 아빠, 여기 있어요."그러자 가게 주인은 유언이나 다름없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그러면 가게는 누가 보고 있단 말이냐?" 탈무드에 기록된 한 토막의 유머입니다.

죽으면서까지 일과 돈을 걱정하는 주인을 풍자한 유머입니다.

 

(예화)장례집례를 했던 62세 되신 어떤 분

장례를 집례하면서 특별히 마음 아픈 장례가 있습니다. 30세 된 딸의 결혼을 한 달 앞두고 돌아가셨던 어느 아버지의 장례였습니다. 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에 빨리 딸을 결혼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혼인 날짜를 잡았습니다. 신부가 입장할 때 딸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입장하기를 소원했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입관할 때 관에 모셔진 아빠에게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리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한 달 후의 일을 알았다면 더 일찍 결혼날짜를 잡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정말 내일 일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오늘을 살면서 내일도 계속 이어지리라 당연히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삶의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영원히 산다면 늦어도 좋습니다. 언젠가 그 일을 할 수 있고 늦더라도 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정된 시간이 주어져있습니다. 이 땅을 떠나야 하고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족보다 일을, 하나님과 사람보다 돈을 더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는지요?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1. 자기정체성입니다.(24절)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란 ‘하나님’, ‘주님’, ‘소유자’라는 말입니다. 재물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하나님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물은 부동산이나 돈, 재산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재물의 신’을 의미하는 ‘맘모나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영어에 재물을 의미하는 맘몬(mammon)이 바로 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재물이 인간을 지배하는 두 주인 중에 한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섬기다’는 뜻은 ‘속박되다, 종이 되다’라는 말입니다. 종이나 노예에서 나온 말입니다. ‘종’이란 말은 ‘끈으로 묶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종이란 끈으로 묶여 있는 존재입니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주인에게 묶여서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재물을 섬긴다는 말은 재물에 묶여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묶여있는 사람이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재물에 묶여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종은 당시에 주인에게 목숨까지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이 종의 생명까지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주인의 명령에 불복하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재물이 주인이라면 재물에 자기의 목숨까지 걸고 사는 사람입니다. 재물은 인간의 주인이 되어버린 맘몬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신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은 하나님이냐 아니면 맘몬이냐 둘 중에 한 주인을 섬기게 됩니다. 둘 다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공무원들이 두 대통령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한 주인의 지시를 받아야만 합니다. 자기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누구의 종인지 자기정체성을 알 때 주인을 바로 섬길 수 있고 주인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때로 상황에 따라 주인을 바꿀 때가 있습니다. 또한 한 주인이 아니라 두 주인을 섬길 때도 있습니다. 유혹에 넘어가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서도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염려하다는 뜻은 ‘나누다, 분열되다’는 의미입니다. 지나친 근심과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뜻은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로 인해 어떤 것을 따라야 하는지 마음이 나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재물 중에서 갈팡질팡하며 주인을 바꾸려는 분열된 마음을 갖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재물이 새를 기를 수 없습니다. 물론 새장에서 키우는 새는 돈으로 기를 수 있습니다. 돈으로 먹이를 사서 먹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새들을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부모님이 사시는 원주의 시골집 신발장에 산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까고 다섯 마리의 새끼가 자라고 있습니다. 잘 신지 않는 신발 속에 새끼가 자랍니다. 부모님이 먹이를 주지 않아도 어미가 알아서 새끼를 잘 양육합니다. 새끼가 자라면 둥지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키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키는 나이, 세월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의 수명을 뜻합니다. ‘키를 한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은 시간의 수명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한 자’는 한 규빗으로 45·6cm입니다. 인간의 수명에서 한 자도 이동할 수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전 8: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또한 백합화도 그렇습니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지만 솔로몬의 영광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너희들일까 보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새 우리들의 선생님”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울새가 참새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정말 알고 싶어. 왜 이 근심 많은 인간들은 이토록 안절부절 못하며 바쁘게 사는지.” 참새가 울새에게 대답했습니다. “친구야, 내 생각엔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안 계신 게 분명해. 너와 나를 돌보아 주시는 그분 말이야.” 새들이 불신앙에 빠져 의식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조롱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도 새의 조롱을 받을 때가 많은 목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면서도 내일의 의식주를 걱정할 때가 있습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약하고 유혹에 넘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돈에 넘어집니다. 이성에 넘어집니다. 욕심에 넘어집니다. 쾌락과 자랑에 넘어집니다. 마귀는 그것을 알고 사람을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미혹의 영’이라고 합니다.

(요일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성령은 진리의 영이지만 마귀는 미혹의 영입니다. 거짓으로 유혹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지게 했던 것이 거짓말이었습니다. 마귀는 거짓말로 유혹하는 미혹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자기정체성을 잃게 만드는 마귀는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입니다. 진리에 서지 못합니다. 진짜 같은 가짜입니다.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지고 쓰러지기 쉽습니다.

얼마 전에 다른 교회를 섬기는 어떤 장로님과 대화를 하면서 한국교회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잘못되고 넘어지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돈을 벌고 지배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결국 사람이 돈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맘몬의 힘이 막강합니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죽은 사람도 돈으로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유명한 병원에서 명의의 치료를 받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을 수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유죄도 무죄로 만들 수 있고 반대로 돈이 없으면 무죄가 유죄로 바뀔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법 앞에서 평등하지만 만약 이렇게 된다면 법도 돈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고 재물을 주인으로 삼는 사람은 미혹을 받고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악을 저지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맘몬을 섬기는 사람이 범죄 합니다. 불법을 행하고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면 다른 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많은 근심을 하게 됩니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범죄의 대부분이 돈과 관련되어 발생하는 것이라 추측됩니다. 돈 때문에 살인하고, 상해를 가하고, 훔치고, 사기치고, 거짓말합니다.

(예화) 가룟유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다 맘몬으로 주인을 바꾸는 순간에 예수님을 팔려는 악한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무리들과 흥정을 하고 결국 예수님을 팔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돈을 손에 넣었지만 근심이 찾아왔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우선순위는 자기정체성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자기사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국회는 세계적인 석학 아인슈타인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인슈타인은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이유는 "대통령을 할 만한 인물은 많이 있으나 물리학을 가르칠 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정체성을 알고 사명을 우선으로 선택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과 재물 중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알고 섬기는 자기정체성을 깨닫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2.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화)

 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투명한 유리 항아리에 큰 돌을 채워 넣고 수강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지금 이 항아리가 꽉 찼습니까?” 수강생들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전문가는 다시 항아리에 자갈을 넣었고, 그 후 모래를 넣고, 다음으로 항아리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교훈을 들려주었습니다.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자갈이나 모래를 넣으려 해도 넣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래와 자갈부터 넣으면 큰 돌을 채울 수 없듯이 먼저 해야 할 일을 해야 다른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엡 5:15)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을 먼저 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나중에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종말론적인 공간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가는 나라, 혹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나라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를 씻어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는 나라입니다. 주림도 없고 목마름도 없고 상함도 없고 눈물이 없는 나라입니다. 믿음을 지키다가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곳입니다. 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영원한 쉼과 안식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개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개념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온전히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맘몬의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에는 성령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성도들의 삶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이 세 가지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행하면서 세 가지 특징이 생활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를 진리가운데 인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특징이 의입니다. '

의'는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특징이 평강입니다.

평강(샬롬)은 불안한 요인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을 때 경험되는 은혜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함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안입니다. 바울사도가 로마로 갈 때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지만 두려움과 공포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고 외칠 수 있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평안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누가복음 7장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이 찾아와 예수님의 발 곁에서 울면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죄 사함의 은혜를 얻고 평안의 복을 받았습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평안을 잃고 살다가 죄에서 자유를 얻었고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안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없는 상태, 이웃과의 갈등이 없는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런 평강은 믿음의 성숙도가 다른 형제간에 자신의 자유를 좀 더 제한하고, 상대방의 자유로운 행동을 신앙 안에서 이해할 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경건하고 우상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불경건하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은 음식규례에 대한 것을 지키는 것이 마치 경건의 척도가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갈등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형제간에 그리고 이웃간에 생기는 갈등을 해소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특징이 희락입니다.

기쁨, 즐거움입니다.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교제의 기쁨도 포함합니다.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런 기쁨의 원천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것이므로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 영적인 환희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한 낯에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누리는 기쁨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무도 없는 시간을 택하여 물을 길러 왔지만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수를 경험한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둔 채로 동네로 들어가 자기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동네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거 했습니다. 이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누리는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모습이 가능합니까? 상처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찬송을 하다니요. 영적인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기쁨이 생깁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여건을 초월한 기쁨입니다. 세상이 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찬송가 191장 3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맘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먼저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3. 경건입니다.(33절)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산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살면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자기마음 대로 행동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욕을 먹든 말든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을 참 편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상담학자들은 남을 의식하지 말고 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면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구별된 사람, 거룩한 사람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의란 바리새인처럼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위선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면적이며 절대적인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을 행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라고 할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맺히는 성화의 열매, 도덕과 윤리의 열매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름다운 성화의 열매, 도덕적인 열매가 가득한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수훈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5: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에서 ‘의’는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의입니다. 세상에서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불의가 득세하는 것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느끼며 의를 갈망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방식과 똑같이 살지 않고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약혼녀인 마리아의 임신 소식에 요셉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성령 잉태를 알지 못했던 요셉으로서는 당연히 마리아가 간음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너무나 큰 배신감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합니다. 만약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마리아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는 이런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롭다’라는 말은 ‘합법적이다’, ‘율법을 준행한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무리 친밀한 관계였다 하더라도, 율법대로 마리아를 간음죄로 고발해 처형하는 것이 ‘의로움’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의로움은 문자적으로 무작정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셉에게 현몽하셔서 마리아의 혐의를 벗기시고, 그녀를 데려와 아들을 낳기까지 기다리게 하심으로써 요셉이 메시아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런 성화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정의가 통하는 나라입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듯이 사람들에 대한 신의도 지켜야 합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의로울 때 나는 그의 편에 서고, 누구든지 불의할 때 나는 그를 떠나리라.” 사람의 편이 아니라 의의 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의롭게 살다가 환경이 변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편에 서면 실수가 없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경건이어야 합니다.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40년 동안 광야생활하게 하신 것도 경건하게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기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여 맺어진 성화의 열매인 경건입니다. 이런 우선순위를 가지고 살 때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까지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삶은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하나님과 재물 중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기정체성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인 경건을 추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교회  (0) 2017.12.05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0) 2017.06.18
부활신앙인  (0) 2017.05.08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  (0) 2017.02.21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  (0) 2017.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