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王 "100원 가졌어도 50원 가진 듯 살아라"
[한현우의 인간正讀]
옛 단성사 건물 9월 다시 여는'세계 1위'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사무실엔 경영원칙 액자… "분식·비자금·탈세하지 말자"
자수성가한 부자는 스스로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공간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빈손에서 거부(巨富)를 이뤄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개념화하긴 어렵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이 있다.
백성학(76) 회장을 만나러 경기 부천 오정동 영안모자 사옥을 찾은 12일 낮은 무척 더웠다. 1980년에 지었다는 사옥은 2층짜리 건물에 반 3층을 얹은 형태였다. 지붕 얹힌 현관이 돌출돼 있는 예전 스타일이었다. 사옥 마당에는 온갖 나무와 꽃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었고 흡연 구역도 흡사 숲 속에 있는 형국이었다. 복숭아나무에 빨간 복숭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주차장 한쪽에는 30년도 넘은 듯한 벤츠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옆에 선 제네시스 몇 대가 오히려 이질적으로 보였다. 1980년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초면인데도 백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알게 된 것 같았고 그 예상은 한치도 틀리지 않았다.
6·25전쟁 때 단신 월남한 백 회장은 1959년 청계천에서 모자 노점을 시작해 현재 모자 판매 연 1억개, 연매출 2억6000만달러(약 2962억원)의 세계 최대 모자 회사로 만들었다. 미국 지게차 회사 클라크와 대우버스, 방송사 OBS까지 인수해 계열사 총매출이 연 21억3000만달러(약 2조4200억원)에 달하는 그의 회사는 서울 종로3가 옛 단성사 건물을 사들여 올 9월 1차 오픈한다. '단성골드빌딩'이라 이름 붙인 이 건물은 우선 보석백화점과 일반 사무실 부분을 열고 내년 6월엔 단성사 개관 110주년을 맞아 단성사 역사관과 영화관도 문을 열 예정이다. 초등학교 3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그는 "나는 만물박사이고 그래서 죽기 아까울 정도"라며 "너무 똑똑해서 팔자도 셌다"고 말했다.
모자 판매 연 1억개 '모자왕'
모텔 로비만큼 좁은 로비 중앙에 난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갈 때 층계참에 '우측 통행'이라고 쓰인 나무 팻말이 보였다. 접견실에서 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 백 회장이 회장실을 나와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회장실은 막 이사 온 사무실 같았다. 긴 책상과 그만큼 긴 회의 테이블이 있었고, 서류들이 칸마다 수북이 쌓인 유리장이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책상과 장식장 위, 바닥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 풍경이 결코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모든 서류는 그 두께에 맞는 집게로 고정돼 있었고, 잘 쌓은 벽돌처럼 줄 맞춰 쌓여 있었다. 그 모든 서류 뭉치 위엔 묵직한 문진(文鎭)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백 회장 책상 뒤엔 '사훈'과 '경영 원칙'이 쓰인 액자가 각각 하나씩 걸려 있었는데 사훈은 '정리정돈'이었고 경영 원칙은 '정직과 원칙을 지키자. 분식, 비자금, 탈세를 하지 말자'였다. 백 회장과 그의 장남 백정수(48) 부회장 모두 회색 회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서류가 많은 회장실은 처음 봅니다.
"내가 컴퓨터를 못해서 그래요. 서류로 보고받으면 돌려줄 게 있고 보관할 게 있어. 이렇게 해놓아야 뭘 보고받을 때 보고하는 사람보다 더 빨리 알 수 있어요. 저 뒷방에는 개업 초기 서류들도 있다고. 그런데 이것들도 한 3년에 한 번씩 정리해요."
―회사 모든 일을 다 알고 직접 결정하는 편입니까.
"중소기업형으로 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적당히 통과'라는 게 없어요. 정확한 데이터를 갖고 와야 한다고. 내 한마디 결정에 돈 몇백억이 날아갈 수도 있고 또 벌 수도 있고 그러니까 나한테 올라오는 보고서는 내가 꼭 갖고 있어야 한다고."
―사훈이 '정리정돈'인 것도 같은 맥락인가요.
"저 사훈은 1969년에 정한 거예요. 몸과 마음과 정신까지 정리정돈하라는 거예요. 물건 정리정돈만 하는 게 아니고."
―정신을 정리정돈하는 게 어떤 겁니까.
"술 먹고 해롱해롱하지 말라는 거지. 저 사훈은 전 세계 내 사업장마다 그 나라 말로 다 붙어 있어요. 경영 원칙은 1982년에 세무 사찰당하고 나서 만든 거예요. 우리 회사가 수많은 세무 사찰,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하나도 나온 게 없었다고. 억지로 세금 부과된 건 소송 걸어서 10원까지 다 찾았어요. 국세청에서 나오면 이 자리에 앉아 차 한잔하면서 저걸 보게 된다고(웃음). 2013년에도 국세청에서 34명이 나와서 덮쳤는데 외국에 돈 빼돌린 것 없나 보러 온 거야. '1달러라도 해외 계좌에 넣어본 적이 없다. 조세 피난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뉴욕·홍콩·동경·런던에 1달러라도 빼돌렸으면 내가 이 회사를 나라에 바치겠다'고 했어요."
―비자금 있다고 선전하는 기업은 없지요.
"대한민국에서는 깨끗하지 않으면 못 살아. 내가 돈 벌려고 했으면 준 재벌 됐을 거야. 내가 머리 나빠서 돈 못 버는 게 아니에요. 양심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비자금도 만들고 로비도 하고 그러지 않으면 돈 못 벌지. 그런데 우리 같은 규모로 그렇게 했다간 죽어. 그래서 대기업, 중견기업 많이 죽어나갔다고. 그런데 비자금 없이 그냥 내 돈 쓰면 깨끗해. 그게 바로 나의 특이한 노하우라고."
―사옥에 나무가 꽤 많던데요.
"우리 직원들이 출퇴근할 때 사계절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요. 휴식 시간에 담배 한 대 피우더라도 자연을 볼 수 있으면 사람이 달라. 유리창에 갇혀 있는 사람하고는 사람이 다르다고. 높은 빌딩 좋을 것 없어요. 회사에 마당도 있고 나무도 있고 한 게 좋지."
―과실수를 특히 좋아합니까.
"우리 어렸을 때 과실수 있으면 익기 전에 따먹고 그랬어요. 과실수를 보면 과거를 추억하게 된다고 할까. 모과나무·감나무·대추나무도 있고 많아요. 내가 성북동에 41년째 사는데 우리 집에도 나무가 아주 많아. 성북동 사람들이 우리 집 산소를 마시고 산다고. 자연을 좋아하면 마음도 넓어지고 갑갑하지 않아요."
―그래서 서울시내로 사옥을 옮기지 않는 겁니까.
"시내 가면 재미가 없잖아. 남 보여주는 헛가다질(허세)을 왜 해."
사훈은 ‘정리정돈’
밖에 서 있던 벤츠는 1980년 모델이었다. 백 회장은 “저 차를 타면 마음이 편해서 지금도 타는데 에어컨이 고장 나서 여름에는 못 탄다”고 했다. 아들 백 부회장은 “차가 고장이 잘 나서 기사들은 아주 싫어한다”고 나중에 귀띔했다.
언젠가 신문 인터뷰에 찍힌 백 회장 사진에서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었다. 숫자 시계와 바늘 시계가 함께 달려 있는 금색 전자시계였다. 그는 여전히 그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 시계 오래된 것 같습니다.
“1975년 일본 공항에서 산 거야. 바늘침이 고장 나서 한 번 고쳤지. 시계 선물 받은 것 많은데 다 남 줘 버렸어요. 이 시계가 나한테 딱 맞아요. 눈에 딱 익고.” 그가 풀어준 시계를 살펴봤다. 시계 뒷면 건전지 커버가 느슨해져서 투명 테이프를 붙여 고정해 놓은 시계였다. 그는 “그것보다 이게 더 오래됐다”며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1967년 선물받은 것이라고 했다. 떨어지면 기우고 해지면 꿰매서 49년째 쓰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들을 가리키며 “이게 저 사람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곤 껄껄 웃었다.
―유니폼을 입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공장으로 시작한 회사니까 유니폼 입으면 일하기가 자유로워요. 모양 내고 가꾸면 일하는 데 부자연스럽다고. 출퇴근할 때 멋지게 하고 다니면 되지.”
―요즘 세대는 멋지게 입어야 일이 잘된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요.
“그런 회사 가라고 해. 여긴 여기 룰이 있는 거지.”
그는 1940년 중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났다. 평북 철산이 고향인 조부(백운휘)가 일제 압박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중국으로 이주한 곳이었다. 1945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집안은 농장과 벽돌 공장 등 6개 사업체를 운영한 부자였다. 그러나 1946년 공산당이 전 재산을 몰수한 뒤 1949년 함남 원산으로 이주한 백씨 가문은 그곳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50년 12월 7일 백성학은 목선(木船)을 사서 이남으로 피란 가던 사람들을 배웅하러 나갔다가 배에서 내리지 못하는 바람에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됐다.
식당 청소부와 구두닦이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던 그는 가족을 만나러 가겠다는 일념으로 북쪽을 향해 걷다가 강원 홍천에 이르러 국군 부대 심부름꾼이 됐다. 그 인연으로 미군 부대 ‘쇼리’가 되었는데, 역시 온갖 잡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마 ‘꼬마’라는 뜻으로 ‘쇼티(Shorty)’라고 한 것을 ‘쇼리’로 알아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그는 ‘빌리’라는 미군과 인연을 맺게 된다. 11세 소년 백성학을 친동생처럼 돌봐주던 빌리는 백성학이 북한의 포격으로 큰 화상을 입고 냇물에 떠내려갈 때 달려와서 불을 꺼준 사람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면서 빌리와 헤어진 백성학이 백방으로 그를 찾다가 1989년이 돼서야 미국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던 빌리와 재회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빌리를 찾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빌리의 이름이 ‘데이비드 비티(Beattie)’였고 ‘비티’를 ‘빌리’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리를 왜 그렇게 애타게 찾았습니까.
“그 사람이 굉장히 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화상 입은 나를 물에서 건져준 사람,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도 고아였어요. 전쟁 때 나한테 ‘누나가 우편으로 보내준 네 선물’이라면서 줬던 옷가지도 알고 보니 양어머니가 보내줬던 거였지. 아마도 혼자 월남한 뒤 그 사람한테 처음으로 부모나 형제 같은 가족의 정을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백성학은 빌리를 한참 찾아다니던 1985년 강원 홍천에 사회복지 시설 ‘백학마을’을 지으면서 ‘빌리 사랑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빌리는 2010년 별세했고 그의 자녀와 손자까지 백성학이 준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녔다.
미군 부대 꼬마에서 모자점 사장으로
백성학은 군부대에서 화상을 입은 뒤 화천야전병원과 속초미군야전병원에서 치료받은 뒤 퇴원해 1955년 상경했다. 이때 한 군인 소개로 서울 돈암동 모자 공장에 취직한 것이 모자와의 인연 시작이었다. 그는 “청소를 잘하니까 다림질을 시켜줬고, 다림질을 잘하니까 재단을 시켰고 또 그걸 잘하니까 미싱 일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다가 종로4가 모자점에서 나를 점원으로 스카우트해갔다”고 말했다.
1959년 19세 나이로 청계4가에서 모자 노점을 시작한 백성학은 아내와 만나던 1965년 이미 가게를 여럿 가진 청년 부자가 돼 있었다. 그는 그해 여름 동해안에 놀러 갔다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던 아내(윤순희·75)를 처음 만났다.
“연애 2년 했는데 전혀 반대 없었습니다. 그때 어른들이 나를 보고 ‘저게 보통 놈이 아니다. 잔챙이가 아니다’ 할 정도였거든요. 물론 나는 초등학교 중퇴였고 아내는 대졸 교사였지만 나는 자수성가해서 공장도 있고 집도 있고 가게도 있는 사람이었어요.”
영안모자는 연 1억개의 모자를 판매하지만 그의 공장이 직접 만드는 것은 3500만개가량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기념품 모자 가운데 3분의 1은 영안모자 제품이다. 1980년대까지는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모두 영안모자 제품을 썼지만,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선수들에게 ‘메이드 인 USA’ 모자를 씌우겠다며 3개 회사에 판매권을 나눴다.
그의 회사들 총매출 가운데 영안모자 비율은 10%가량이다. 자일대우버스 매출이 가장 많고 클라크가 그다음, 그리고 영안모자 순이다. 이 정도면 영안그룹이라고 할 만한데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룹 아니에요. 영안모자야. 모자쟁이가 그룹 하면 망해요. 우리 회사에서는 그룹이란 말을 절대 안 써요. 그런데 영안모자에서 비즈니스를 배우면 나쁜 짓도 못하고 망하지 않아요. 모자는 요만한 천 쪼가리로 만드는 거잖아. 자잘하고 세밀하다고. 그걸 마스터하면 지게차든 버스든 방송이든 잘할 수 있어요.”
―지게차와 버스 회사를 경영해보니까 다르던가요.
“공장 하는 건 똑같아요. 원자재 갖다가 제품 만들어서 파는 건 모자하고 똑같다고. 지게차 그거 다 망한 회사 살려놨다고. 작년에 매출 7억달러 했으니까. 내가 버스 회사 인수할 때 사람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모자쟁이가 오느냐’했지만 나는 이미 1992년 코스타리카에서 버스 회사에 투자해서 운영한 적이 있었어요. 대우그룹 부도났을 때 버스를 떼어내야 GM하고 계약이 된다며 산업은행에서 나를 1년이나 졸랐어요. 대우버스를 인수해달라고 말이지.”
“골프와 운전은 시간 낭비”
―학력 콤플렉스는 없으실 것 같고, 학력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적은 있습니까.
“학력으로 경쟁하는 데엔 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탈이 안 나는 거죠. 내가 뭐 폼이나 잡고 헛가다질이나 하고 했으면 내 학력 가지고 시비 거는 놈들이 있었겠지. 나는 학력은 낮아도 아주 유식해요. 만물박사라고요. 죽기 아까울 정도라니까. 국회의원이나 높은 놈 쪼가리들 만나도 대화해서 나를 못 이겨요. 하버드, 서울대 백 번 나오면 뭐해요. 비즈니스는 내가 누구보다도 많이 압니다.”
―운전도 안 한다고 들었습니다.
“운전할 시간에 나는 공상을 하고 메모하고 생각을 합니다. 운전은 나한테 시간 낭비예요. 기사 없으면 택시 타고 다니면 되는데 운전을 왜 해요.”
―골프는 왜 안 합니까.
“시간 낭비.”
―시간 날 때는 뭘 합니까.
“시간이 날 때라는 게 없어요. 한가하지가 않아. 뭐든지 만들어내고 구상하고 하느라고 시간이 도통 나지 않는다고.”
―요즘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월급이 적으면 적은 대로 어디든 가서 배우라는 겁니다. 백수로 1년, 2년 있지 말고 내 성격은 어떻고, 취미가 무엇이고, 이것은 자신 있다 하는 분야가 있으면 일단 그 분야 어느 회사든 들어가서 능력을 기르세요. 그러면 다른 데서 돈 더 주고 채 간다고.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하면 평생 할 게 없어. 어떻게 모든 사람이 골드만삭스에 들어갈 수 있나. 창업이니 창조경제니 하는데 개떡 같은 소리야. 창업이 그렇게 쉽습니까. 최소한 어떤 일을 5년은 배워야 창업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젠 무대가 세계예요. 난 모자쟁이인데도 5000만 한국 시장 생각 안 하고 70억 세계시장을 생각한다고요.”
그는 2019년 회사 창립 60주년에 80세가 되며, 그때 장남에게 회사를 맡기고 은퇴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 계획대로 되기에 이 노인은 너무 젊은 것 같았다.
-조선일보, 201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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