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인간正讀] 일본 교육개혁 이끄는 후지하라 가즈히로 교장
"행복은 성적순? 성장 멈춘 시대엔 더더욱 아니죠"
지난 4월 12일 일본 나라(奈良)의 이치조(一條)고등학교. 이날 열린 입학식에 신입생 360명과 학부모 등 총 1000여 명이 강당을 채웠다. 올해 이 학교에 새로 부임한 후지하라 가즈히로(藤原和博·61) 교장이 섰다. 그는 축사 대신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10년 뒤 일본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까?" 학생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후지하라 교장이 말을 이었다. "방금 한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여러분 생각을 말하면 됩니다. 나는 그것을 '납득답'이라고 부릅니다. 납득할 만한 답, 앞으로는 정답이 아니라 납득답을 내놓을 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후지하라 교장은 교육자 출신이 아닌 '민간인 교장'이다. 그는 일본 최고 명문 도쿄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리크루트사에서 25년간 일했다. 지난 2003년 그는 교육자로 변신했다. 도쿄 와다(和田)중학교의 초청을 받아들여 민간인 교장이 된 것이다. 그는 이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세상 수업'이라는 특강을 시작했다. '햄버거 가게를 열어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주제를 주고 토론을 시키거나 '고무' 같은 단어를 놓고 아무것이나 떠오르는 생각을 말해보는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을 시켰다. 이런 식 교육에 학부모들이 참여하는 '학교 지원 지역 본부'를 만든 것이 호응을 얻자, 후지하라식 교육법은 전 일본으로 퍼졌다. 현재 일본 내 초등학교 2만곳과 중학교 1만곳 가운데 '학교 지원 지역 본부'를 운영하는 학교는 3분의 1인 1만곳에 이른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이 '교육 개혁'에 55억엔(약 588억원)을 지원했다.
2003년부터 5년간 와다중 교장을 지낸 후지하라씨는 이후 저술가 겸 대학교수로 나섰다. 이미 1997년 '처생술(處生術)'이라는 첫 번째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던 그는 '세상 수업'을 요약한 책 '완벽하지 않은 스무 살을 위한 진짜 공부'(21세기북스)를 비롯해 '마흔, 버려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들'(21세기북스) 같은 책을 펴냈고 일본 최대 사범대학인 도쿄학예대 객원교수로 일하면서 예비 교사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올해 다시 나라시(市) 시장과 교육감의 부탁을 받아 이치조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그가 저서에서 강조하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꾸준히 성장하던 시대에는 정답 맞히고 좋은 대학 나와 좋은 회사 들어가면 대개 안정적으로 살다가 노후까지 보장됐다. 그러나 일본은 성장을 멈춘 '성숙 사회'가 됐다. 성숙 사회에서는 정답이나 시험 성적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개인만의 행복론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이 2000년대 들어 성장을 멈췄으며 앞으로도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책을 읽다가 한국 역시 '성장 사회'에서 '성숙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29일 일본 나라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일본 교육 개혁을 이끌고 있는 후지하라 교장을 만났다.
―도쿄에서 평생 살았다고 들었습니다만.
"91세 아버지와 85세 어머니가 이곳 나라에 살고 계셔서 제가 모시고 삽니다. 이곳 고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처음 도쿄를 떠났습니다. 지난 3월 23일 이사했으니까 이제 한 달이 좀 넘었군요."
―초등학교나 고등학교가 아닌 중학교 교장을 처음 선택했던 이유가 있습니까.
"중학생이 된다는 건 어린이 시기가 끝나고 어른 시기가 시작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나이죠. 그 시기에 정답이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가지 답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학교 지원 지역 본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수업이 없는 토요일에 옛날 서당 같은 수업을 만들어 교사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학생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축구나 농구를 가르쳐주는 주민도 있습니다. 또 방과 후에 학교 도서실을 개방해 역시 주민들이 와서 아이들 책 읽는 것을 도와주는 일도 합니다."
―주민들은 무료로 봉사활동을 합니까.
"지역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제가 와다중학교에서 처음 시작할 때는 교통비 정도만 드렸습니다. 와다중학교에서는 '밤 스페셜'이라는 이름의 방과 후 교육도 있었는데 학원에서 가르칠 만한 수업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수업료를 학원의 절반 정도만 받는 것이었어요. 이것이 굉장히 인기를 끌어서 일본의 모든 언론이 다뤘고 아사히신문은 1면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학교 지원 지역 본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학원들이 학생들을 빼앗기니까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는데 결국 패소했지요."
―2008년 와다중을 떠나 8년 만에 다시 교장이 됐는데, 또 새롭게 시도하는 것이 있습니까.
"'수퍼스마트스쿨(Super Smart School) 계획' 또는 '3S 계획'이라고 부르는 건데, 스마트폰을 학교 교육에 활용하자는 겁니다. 그동안은 스마트폰을 학교에 가져오지 못하게 했는데 오히려 활용하자는 것이죠. 일본 고교생의 97%가량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습니다. 이걸 못 쓰게 하지 말고 종이 사전 대신 스마트폰 사전을 검색하거나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서 학생들 의견 수렴을 하자는 것이지요. 무조건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학교에 와이파이 설비를 갖춰야 하고 해서 올해 가을쯤엔 본격적으로 실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 없는 학생들은 소외되잖습니까.
"학교에서 빌려줄 계획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자기 기기를 가져오는 '브링 유어 오운 디바이스(bring your own device)' 원칙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학생들에게 뭔가 교재나 기기가 필요하면 학교가 그것을 다 마련해준다는 식이었지만 이미 갖고 있는 기기를 활용하자는 것이지요."
―줄곧 주장해 온 '성숙 사회'란 어떤 사회를 뜻합니까.
"성숙 사회는 바로 정답이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학교 교육은 정답만을 가르쳐 왔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 고교는 교복을 입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교복을 입는 것이 사복을 입는 것보다 좋은지 생각해 볼 수는 있어요. 성장을 멈춘 사회에서는 국가와 기업이 개인의 행복을 보증해줄 수 없습니다. 개개인이 독자적 행복론을 가져야 하는 시대가 된 겁니다. 행복에 정답이 없는 사회, 그것이 성숙 사회입니다."
―그런 수업이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될까 의심하는 학부모가 있을 텐데요.
"2020년에 일본 대입 제도가 바뀝니다. 한국 수능시험처럼 일본에는 센터시험이란 게 있습니다. 센터시험은 그동안 정답이 하나밖에 없는 시험이었는데 2020년부터는 사고력과 판단력, 표현력을 더욱 많이 요구하는 형태로 바뀔 예정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학부모들은 항상 입시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세상 수업'이 앞으로 입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5년 전에 제가 ‘세상 수업’을 시작할 때 그래서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현장에서 교육 개혁을 해온 결과 2020년 입시 개혁을 맞게 됐습니다. 제가 예견한 대로 된 것이죠. 우선 올해부터 도쿄대와 교토대는 신입생 3600명 가운데 100명을 특별 전형으로 뽑습니다. 이전까지는 센터시험에서 90% 이상 점수를 얻어야 지원이 가능했는데 그 100명은 80% 점수와 교장 추천서가 있으면 면접을 통해 뽑습니다. 도쿄의 오차노미즈여대는 내년부터 인문계 학생은 도서관에서, 이공계 학생은 실험실에서 시험을 치릅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고 실험실에서 실험하면서 입시를 치르는 것이죠. 단순 지식을 보지 않고 사고력과 판단력으로 학생을 뽑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학교 교육에 활용하는 것도 그런 개혁의 일부인가요.
“지식은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한 지식 전달은 스마트폰에 맡기자는 것입니다. 앞으로 교사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같은 것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동기를 부여하고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정답을 알 수 있는 시대에 학교에서 정답을 가르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입니다.”
―한국도 성숙 사회에 진입했다고 봅니까.
“한국도 마찬가지이고 중국도 아마 10~15년 뒤에는 성장을 멈추고 성숙 사회로 접어들 것입니다. 성장 사회를 이룬 나라는 반드시 성숙 사회로 가게 마련입니다. 특히 일본은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는 어떻게든 경제가 유지되겠지만 그 이후는 분명히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입니다.”
―여전히 글로벌 기업을 만들어내는 미국은 어떤 사회입니까.
“미국이 아주 특이한 것은 이민자가 많은 사회라는 것입니다. 이민자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나 되는데 특히 히스패닉계가 1억명 정도 됩니다. 그들이 하류층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구글 같은 회사 경영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여전히 출생률도 높고 평균 연령도 낮은 편입니다. 스페이스X 창업자 일론 머스크도 이민자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여전히 성장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후지하라 교장은 자신의 책에서 “이미 성숙 사회를 맞은 유럽은 종교가 개인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으나 일본은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SNS가 종교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젊은 세대가 SNS에 몰두함으로써 누군가와 이어져있다는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신(神)이 800만 종류 있다고 합니다. 숟가락에도 신이 있고 꽃에도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죠. 그렇게 흔한 신은 서양 종교의 신처럼 사람들을 강력히 연결해주지 못합니다. 특히 신사(神社) 종교는 2차대전 때 일본 군국주의에 이용됐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성숙 사회로 접어들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분단되고 고독해졌는데 그것을 연결해 주는 것이 SNS입니다. 그러나 SNS는 일시적 유대감을 줄 뿐 근본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이전에는 TV가 그런 역할을 했죠. 가족이 모여 앉아 TV를 보면서 가족보다 기타노 다케시(유명 코미디언)의 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입니다. TV나 SNS나 그렇게 사고력의 감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저는 TV도 거실에서 없애고 스마트폰도 가능하면 적게 쓰라고 권합니다.”
그의 책에서 ‘시간적 여유가 주는 공포’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정답만 외우고 취미나 여가 활동 없이 줄기차게 회사 생활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은퇴라는 변화를 마주하면 시간은 많은데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공포와 맞닥뜨린다는 것이다. 그는 책 ‘마흔, 버려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들’에서 그런 공포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마흔 살 때부터 미리 준비해야 한다며 ‘회사 밖 커뮤니티를 찾으라’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주장한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을 테니 그런 공포는 없겠습니다.
“나는 리크루트에서 47세까지 열심히 일했고 그 뒤에는 교육 개혁이란 주제에 15년간 매진해 왔습니다. 요즘에는 ‘다음엔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네팔이나 라오스 같은 나라에 학교를 세워주는 일을 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계획대로라면 95세까지는 활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은퇴 후 집에서 삼시세끼 다 얻어먹는 남편을 ‘삼식이’라고 부르는 농담이 있습니다.
“하하하. 그건 처음 들어보네요. 일본에서는 그런 사람을 ‘젖은 낙엽(누레오치바)’이라고 불렀죠. 아내가 아무리 떼어놓으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이죠.”
한 해에 책을 최소 100권 읽는 후지하라 교장은 열렬한 독서 전도사이기도 하다. 그는 그러나 어렸을 때는 전혀 책을 읽지 않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과제로 쥘 르나르의 ‘홍당무’와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다가 너무 재미없어 포기하면서 독서와 멀어졌다. 그는 이후 리크루트 영업 사원으로 일하다가 거래처 사장의 질문을 하나 받았다. “후지하라씨는 순수문학 읽어요?”라는 질문이었다. “순수문학까지 읽을 시간이 없다”는 대답에 그 사장은 “순수문학을 읽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성장하지 못한다”고 일갈했다. 이후 그는 무섭게 책을 읽기 시작했고 “마침내 300권을 돌파하자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홍당무’와 ‘수레바퀴 아래서’는 결국 읽었습니까.
“읽지 않았습니다. 하하. 재미없는 책은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없어요.”
후지하라 교장의 책 ‘진짜 공부’ 서문에는 두 가지 질문이 제시돼 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 “사람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이다. 그는 ‘세상 수업’을 이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선생님은 무엇을 위해 삽니까.
“아… 그것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기 위해 삽니다. 하하. 사실 욕심대로라면 2050년의 세계를 보고 나서 죽고 싶습니다. 그때쯤에는 세계 모든 사람의 뇌가 인공지능 같은 것으로 연결돼서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세계가 돼 있을 겁니다. 그걸 본 뒤에 이런 질문을 받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똑같이 다시 한번 살고 싶습니까?’ 그 질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눈을 감고 싶습니다.”
―선생님에게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이란 것은 돈이나 물건 같은 데서 오지 않아요. 저는 사람과 사람의 유대와 연결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1300년 된 이 도시 나라에서 고교 교장을 하고 있으니까 새로운 인간관계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 인터뷰도 도쿄의 제국호텔 같은 데서 했더라면 별로 재미없었겠지만 이렇게 나라의 작은 호텔에서 하니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 201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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