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째 거의 날마다 TV에 얼굴이 나왔다…
살인자나 흉악범도 인권 보호 차원에서 얼굴을 가려주는데 도박이 이보다 더 중하냐"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구속될 때도 TV에는 자료 화면으로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모습이 나왔다. 정씨의 지인은 이렇게 하소연했다.
"석 달째 거의 날마다 TV나 신문에 정운호 얼굴이 나왔다. 살인자나 흉악범도 인권 보호 차원에서 얼굴을 가려주는데, 도박이 이보다 더 중한 범죄냐."
말인즉 맞다. 8개월 형량의 도박범이 오래 세간의 관심을 끌고, 쟁쟁한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에 이어 롯데가의 맏딸까지 구속하는 단초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농반진반 이렇게 위로했다.
"남들은 돈 주고 광고를 해서 사는 유명세인데, 정운호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전국구 인물'이 됐다. 더욱이 그로 인해 법조 비리와 롯데 비자금 수사가 시작됐다. 한 몸 바쳐 우리 사회의 정의와 개혁을 위한 밀알이 된 걸로 위안 삼을 수밖에 없다."
정운호는 수십억원대 수임료를 쓰며 '전관(前官) 변호사'를 구했지만, 나는 무보수로 변론할까 한다. 중졸(中卒)로 남대문시장 행상에서 출발해 어느 날 중저가 화장품 회사를 세워 벼락부자가 된 정운호가 보고 겪고 터득한 세상은 이러했을 것이다.
'이 사회에는 부모를 잘 만났거나 권력 있는 자들끼리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 이들끼리는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다. 서민들은 평생 악다구니해도 못 푸는 문제를 이들은 금방 해결할 수 있다. 나같이 배경 없는 놈은 아무리 성공해도 그 속에 끼워주지 않는다. 이들과 사귀고 싶어도 인맥이나 연줄이 없다.'
정운호 입장에서 보면 가진 게 돈이고, 올라가기 위해서나 살아남기 위해서 '돈질'을 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돈은 집어준 만큼 상응한 대가를 받는다는 철칙으로 잔뼈가 굵었을 것이다. 석 달 전 서울구치소 접견실에서 부장판사 출신 최유정 변호사와 벌인 승강이도 그런 인식에서 비롯됐다. 보석(保釋)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조건으로 50억원을 줬는데, 8개월 형을 받았으니 되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돈 계산법으로는 틀린 게 없다.
얼마 전까지는 법대(法臺) 위에서 저런 인간을 내려다봤을 여변호사는 몸보다 마음의 상처를 더 크게 입었을 것이다. 그녀는 3주짜리 상해 진단서를 끊어 자신의 의뢰인을 고소했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운명을 가를 사건은 이처럼 아주 사소하고 우연적인 것으로 종종 시작된다.
한 시절 특수부 검사로 날렸던 홍만표 변호사야말로 구치소 접견실의 승강이와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 불똥이 튀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매년 100억원 수입을 올리느라 열심히 일했을 테고, 부업으로 하는 오피스텔 거래업은 더욱 번창했을 것이다. 잘 포장돼 있던 '치부'가 이런 엉뚱한 사건으로 까발려질 줄을 정말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현직 판검사 시절에는 다들 정의와 원칙을 앞세웠을 게 틀림없다. 검사 선서(宣誓)에도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 같은 좋은 말이 나오고, 법관 선서에도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라고 돼 있다. 그런데 어떻게 옷 벗고 나오는 순간 이런 가치가 180도 바뀔 수 있을까. 좀처럼 이해가 안 되지만, 보편적인 현상이라고들 한다.
명색이 '돈벌이' 변호사에 나섰다 해도 판검사 때 내세웠던 자존심은 좀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하루아침에 모든 가치를 돈으로 거래해서야 되겠는가. 그걸 지킨다고 해서 당장 굶어 죽을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 어제 구속된 신영자 이사장은 재산을 지폐로 바꿔 매일 허공에 뿌려대도 죽을 날까지 다 못 뿌릴 것이다. 그런데도 저 아래에 있는 중견 업체의 뒷돈을 받고 면세점 자리를 거래했다면 정말 재벌의 자존심조차 팔아먹은 격이다.
나는 개인의 도덕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걸 언급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는 성인군자만 사는 게 아니고, 너무 도덕을 강요하면 인간 본성에서도 멀어진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직업적 윤리와 자존심이다. 직무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다. 압력과 청탁 때문에 자신의 직무를 벗어났다고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직업적 자존심만 있어도 사회는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부모 잘 만났거나 권력 있는 자들끼리 해먹는다' '돈을 쓰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의 유통도 멈추게 할 수 있다.
이제 변론의 결말은 이렇다. 법과 제도적 절차를 따르는 대신 돈으로 뒷거래해온 정운호의 잘못은 세상이 다 알게 됐지만 기실 돈을 주는 쪽보다 받는 쪽의 죄질이 훨씬 더 나쁘다. 통상 받는 쪽은 상대적으로 더 좋은 교육을 받았고 더 큰 혜택을 누렸으며 더 권한이 세고 우리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켜야 할 책임이 더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돈 주는 쪽은 개인 범죄에 속하지만, 돈 받는 쪽은 개인 차원을 훨씬 넘어 사회적 해악을 끼치는 범죄에 가담하게 된다.
"석 달째 거의 날마다 TV나 신문에 정운호 얼굴이 나왔다. 살인자나 흉악범도 인권 보호 차원에서 얼굴을 가려주는데, 도박이 이보다 더 중한 범죄냐."
말인즉 맞다. 8개월 형량의 도박범이 오래 세간의 관심을 끌고, 쟁쟁한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에 이어 롯데가의 맏딸까지 구속하는 단초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농반진반 이렇게 위로했다.
"남들은 돈 주고 광고를 해서 사는 유명세인데, 정운호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전국구 인물'이 됐다. 더욱이 그로 인해 법조 비리와 롯데 비자금 수사가 시작됐다. 한 몸 바쳐 우리 사회의 정의와 개혁을 위한 밀알이 된 걸로 위안 삼을 수밖에 없다."
정운호는 수십억원대 수임료를 쓰며 '전관(前官) 변호사'를 구했지만, 나는 무보수로 변론할까 한다. 중졸(中卒)로 남대문시장 행상에서 출발해 어느 날 중저가 화장품 회사를 세워 벼락부자가 된 정운호가 보고 겪고 터득한 세상은 이러했을 것이다.
'이 사회에는 부모를 잘 만났거나 권력 있는 자들끼리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 이들끼리는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다. 서민들은 평생 악다구니해도 못 푸는 문제를 이들은 금방 해결할 수 있다. 나같이 배경 없는 놈은 아무리 성공해도 그 속에 끼워주지 않는다. 이들과 사귀고 싶어도 인맥이나 연줄이 없다.'
정운호 입장에서 보면 가진 게 돈이고, 올라가기 위해서나 살아남기 위해서 '돈질'을 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돈은 집어준 만큼 상응한 대가를 받는다는 철칙으로 잔뼈가 굵었을 것이다. 석 달 전 서울구치소 접견실에서 부장판사 출신 최유정 변호사와 벌인 승강이도 그런 인식에서 비롯됐다. 보석(保釋)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조건으로 50억원을 줬는데, 8개월 형을 받았으니 되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돈 계산법으로는 틀린 게 없다.
얼마 전까지는 법대(法臺) 위에서 저런 인간을 내려다봤을 여변호사는 몸보다 마음의 상처를 더 크게 입었을 것이다. 그녀는 3주짜리 상해 진단서를 끊어 자신의 의뢰인을 고소했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운명을 가를 사건은 이처럼 아주 사소하고 우연적인 것으로 종종 시작된다.
한 시절 특수부 검사로 날렸던 홍만표 변호사야말로 구치소 접견실의 승강이와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 불똥이 튀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매년 100억원 수입을 올리느라 열심히 일했을 테고, 부업으로 하는 오피스텔 거래업은 더욱 번창했을 것이다. 잘 포장돼 있던 '치부'가 이런 엉뚱한 사건으로 까발려질 줄을 정말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현직 판검사 시절에는 다들 정의와 원칙을 앞세웠을 게 틀림없다. 검사 선서(宣誓)에도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 같은 좋은 말이 나오고, 법관 선서에도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라고 돼 있다. 그런데 어떻게 옷 벗고 나오는 순간 이런 가치가 180도 바뀔 수 있을까. 좀처럼 이해가 안 되지만, 보편적인 현상이라고들 한다.
명색이 '돈벌이' 변호사에 나섰다 해도 판검사 때 내세웠던 자존심은 좀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하루아침에 모든 가치를 돈으로 거래해서야 되겠는가. 그걸 지킨다고 해서 당장 굶어 죽을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 어제 구속된 신영자 이사장은 재산을 지폐로 바꿔 매일 허공에 뿌려대도 죽을 날까지 다 못 뿌릴 것이다. 그런데도 저 아래에 있는 중견 업체의 뒷돈을 받고 면세점 자리를 거래했다면 정말 재벌의 자존심조차 팔아먹은 격이다.
나는 개인의 도덕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걸 언급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는 성인군자만 사는 게 아니고, 너무 도덕을 강요하면 인간 본성에서도 멀어진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직업적 윤리와 자존심이다. 직무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다. 압력과 청탁 때문에 자신의 직무를 벗어났다고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직업적 자존심만 있어도 사회는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부모 잘 만났거나 권력 있는 자들끼리 해먹는다' '돈을 쓰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의 유통도 멈추게 할 수 있다.
이제 변론의 결말은 이렇다. 법과 제도적 절차를 따르는 대신 돈으로 뒷거래해온 정운호의 잘못은 세상이 다 알게 됐지만 기실 돈을 주는 쪽보다 받는 쪽의 죄질이 훨씬 더 나쁘다. 통상 받는 쪽은 상대적으로 더 좋은 교육을 받았고 더 큰 혜택을 누렸으며 더 권한이 세고 우리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켜야 할 책임이 더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돈 주는 쪽은 개인 범죄에 속하지만, 돈 받는 쪽은 개인 차원을 훨씬 넘어 사회적 해악을 끼치는 범죄에 가담하게 된다.
-조선일보, 20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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