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자기관리(리더십)

알렉스 퍼거슨의 검정 축구화

하마사 2016. 3. 8. 11:22
민학수 스포츠부 차장
민학수 스포츠부 차장

 

"그렇죠. 궁지에 몰려 필사적으로 뛴 마지막 5분처럼 90분을 뛸 수 있는 팀이 돼야 욕을 먹지 않겠죠."


독일 축구 전문지인 키커지의 베테랑 기자 말에 필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국에서 온 기자가 "기대했던 바이에른 뮌헨과 많이 다르다"고 하자 씁쓸하게 맞장구쳤다. 2004년 봄 독일 명문 축구 클럽 바이에른 뮌헨의 홈 구장에서 벌어진 분데스리가 경기를 지켜보고 나서다. 경기는 먹을 것 없는 소문난 잔치였다. 압박은 느슨하고, 패스 스피드가 느렸다. 하위팀에 간신히 무승부를 기록하자 6만 명 팬이 "정신 좀 차리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뮌헨 선수들은 축구보다는 각종 스캔들이나 말실수로 화제에 올랐다. 감독은 자신보다 연봉이 몇 배나 되는 선수들을 장악하는 데 실패한 상태였다. 오래전 일인데도 '조직이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던 모습이 생생하다.

'거장(巨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3년 전 물러난 뒤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를 보면서 그때가 떠올랐다. 퍼거슨 감독 시절 빨간 유니폼을 입은 맨유는 포기를 모르는 팀이었다. 최단거리로 골을 노리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 스타일이 매혹적이었다. 밀리던 경기를 뒤집는 뚝심도 대단했다. 이 모든 게 실종돼 딴 팀처럼 보이던 맨유가 최근 젊은 피를 수혈하며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젊은 선수들이 경기장을 휘젓고 다니자 "다시 맨유처럼 경기한다"며 팬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맨유를 구한 열아홉 살 골잡이 마커스 래시퍼드가 신는 검정 축구화는 맨유 유스팀의 상징이다. 퍼거슨은 유스팀 선수들은 축구에만 집중해야 한다며 검정 축구화를 신겼다.

40대에 맨유 감독을 시작해 70대에 은퇴한 퍼거슨이 맨유를 '늘 젊은 팀'으로 만든 비결이 이런 정신에 압축돼 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팀이고 원칙과 규율 같은 기본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팀의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퍼거슨의 책 '리딩(LEADING): 나의 인생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에서 배운 것들'을 읽으면서 '참 지독한 사람'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선수 시절 결혼식 날에도,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운동장에 있었다. 감독이 돼서도 이런 식으로 마련한 시간을 최강의 진용(陣容)을 짜고 유지하는 데 쏟았다. 정상급 선수들이 넘쳐나도 미래를 책임질 젊은 선수를 찾아다녔다. 한 시대를 풍미한 데이비드 베컴도 감독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팀에 승리를 가져올 선수'만이 퍼거슨의 친구였고 그라운드에 나설 자격을 얻었다. 요즘 우리 정치는 4·13 총선에 나설 라인업을 짜는 일로 연일 시끄럽다. 여(與)·야(野) 할 것 없이 산적한 문제를 풀어줄 최강의 멤버라고 내세우는데 곧이들리지 않는다. 여당에선 '진박' '친박' 논쟁이 벌어지다 난데없는 살생부 파문이 불거졌다. 새 정치를 내세우며 분열한 야당도 원칙이 흔들리며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소리를 면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대로라면 역대 최악이라는 19대 국회의 실패를 재연할 공산이 크다. 국민이라는 팬을 위해 검정 축구화를 신고 뛸 '퍼거슨식 라인업'을 우리 정치에서 볼 수 없는 걸까.

 

 

-조선일보, 201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