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기타자료

비루한 자들의 행진

하마사 2015. 12. 18. 19:26

철권통치에도 주눅들지 않던 故 이만섭 같은 정치인 실종
국민 냉소 속에 갈등하는 文·安, 뚝심 없이 靑에 휘둘리는 김무성… 자신을 버리는 용기 못 보여줘
역사 이끌 결기·판단력 필요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을 경질하라!' 1969년 7월 24일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만섭 의원이 외친 사자후(獅子吼)였다. 현장을 도청하던 김형욱은 길길이 뛰며 이만섭을 암살하라고 지시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며칠 전 향년 83세로 별세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일화다. 폭력적인 데다 멧돼지처럼 저돌적이던 철권통치의 집행자 김형욱에게도 주눅들지 않았던 이만섭의 배포는 국회의장 시절 안건 날치기 처리를 거부해 의장에서 물러나는 강단(剛斷)으로 이어진다.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만섭은 권력과 돈 앞에 비루하지 않았다.

오늘의 정치 현장에서 이만섭 같은 정치인은 거의 멸종 상태다. '정치는 꾀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명언은 허공에 사라진 지 오래다. 야권 분열을 부른 문·안 갈등이 국민적 냉소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문재인·안철수의 행보에 '가슴'이 없기 때문이다. 정략과 계산이 판치는 싸움에 감동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지도급 인사들만 역사 앞에 비겁한 건 아니다. 당장에라도 안철수를 따라나설 것처럼 말 폭탄을 쏘아 대던 새정치민주연합 비주류 의원들은 태도를 돌변해 탈당의 유불리를 재고 있다. 주류 의원들은 정권 교체의 희망이 사라진 걸 아쉬워하기는커녕 당내 기득권을 지킨 데 안도하는 모습이다. 전형적 정치 소인배의 작태다.

새누리당 의원들도 헌법기관의 자존심은 팽개친 채 청와대 눈치 보는 데 여념이 없다. 논쟁 법안의 직권 상정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헌법과 국회법에 충실한 정의화 국회의장의 올곧은 태도를 이단시하는 청와대의 초법적(超法的) 요구에 당 지도부가 앞장서 편승하고 있다. 삼권분립 원칙과 국회 입법권을 스스로 허물면서도 창피한 줄 모르는 후안무치 얼굴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권력의 단맛을 누린 전·현직 고관들은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위해 희생하는 대신 공천이 곧 당선인 양지(陽地)에만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다.

돌이켜보면 안철수 의원은 2012년에 거의 대통령이 될 뻔했다. '안철수 현상'의 상징이었던 당시의 안철수는 그만큼 신선했고 이력은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정치인 안철수'는 2012년 대선 이래 지속적으로 안철수 현상의 상징 자본을 탕진해왔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독불장군의 좌충우돌을 계속한 결과 안철수 현상 자체가 증발하고 말았다. 이제 그는 눈보라 몰아치는 벌판에 홀로 섰다. 보수·진보 두 거대 정당의 적대적 공존 관계를 해체해 한국 정치를 바꾸라는 역사적 소명을 민낯의 안철수가 정면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지긋지긋한 상황'을 넘긴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홀가분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중대한 판단 착오다. 차기 총·대선 패배라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로 말하는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참으로 무책임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친노 수장(首長)에 머무른 탓에 대선에서 졌는데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친노 패권주의와 운동권 논리를 깨부숴야 문재인과 한국 진보의 미래가 열린다는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중도와 합리적 보수까지 포용하는 정책 전환과 인물 교체라는 총체적 도전이 문재인의 응전을 기다리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야권 분열의 어부지리를 기대하는 것은 심각한 오판이다. 정권 심판 대신 국회 심판이 총선의 화두가 될 때 김무성은 독립적 대선 주자로 각인될 기회를 잃게 된다. 여당의 자율성을 약속하고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던 그의 호언장담은 허공에 흩어졌다. 역동적인 한국 정치는 고유의 비전과 뚝심도 없이 현직 대통령에게 휘둘리는 사람을 차기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없다. '무대'라는 별명에 걸맞은 대물(大物) 정치인의 기개(氣槪)와 한국 보수를 진화시키는 경륜과 능력을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김무성의 몫이다.

김무성·문재인·안철수 세 사람은 유력 대선 주자다. 그럼에도 그들의 꿈이 흐릿한 건 자신을 버리는 참된 용기를 보여주지 못한 탓이다. 결정적 순간에 몸을 던짐으로써 역사를 이끄는 결기와 판단력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책임 윤리는 뒷전인 채 유불리만 셈하는 정치 자영업자의 길은 비루한 자들의 행진에 불과하다. 권력과 돈 앞에 비겁하지 않은 정치인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민주 시민의 권리다. 이제 우리도 진정으로 자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공명정대한 지도자를 가질 때가 되었다.

 

 

-조선일보, 2015/12/18 

'자기계발 > 기타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스의 취미  (0) 2016.01.08
前 대통령 탓하기  (0) 2016.01.02
조로아스터교의 鳥葬  (0) 2015.12.15
고다드 우주센터  (0) 2015.10.17
북한 인권 운동가에게 노벨 평화상을  (0) 2015.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