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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泳三 전 대통령 서거, 우리 시대 巨人을 떠나보내며

하마사 2015. 11. 23. 14:37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88년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거(逝去)로 이 나라는 고난과 성공, 좌절과 영광의 시대를 이끌어온 정치 거목(巨木) 한 사람을 더 잃었다. 이 나라 민주화 운동의 두 중심으로 1970년대 이후 한국 정치를 30년 가까이 주도한 양김(兩金·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시대도 완전히 저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우리 현대사에 남긴 족적은 크고도 깊다.

동아시아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밝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마지막 남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떠났다"고 했다. 한때 정적(政敵)이었으나 말년엔 서로 의지했던 김종필 전 총리는 "신념의 지도자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을 변화시킨 지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여야 대표들도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을 계승하겠다고 말했다.

1927년생인 그는 인생과 정치 역정 전체를 우리 현대사와 함께했다. 일제의 식민 지배 시기에 성장했고 6·25전쟁을 겪었으며 어머니를 간첩의 총탄에 잃었다. 정치에 투신한 이후엔 꺾이지 않는 집념과 투지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온갖 고통을 감내한 그가 없었더라면 산업화·민주화의 동시 성취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도 '절반의 성공'에 그쳤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최연소(26세) 의원과 최다선(9선) 의원이란 기록을 갖고 있다. 우리 의회민주주의의 산증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인생 전반기는 의회민주주의가 권위주의에 눌려 신음하던 시기였다. 권위주의는 아무 가진 것 없는 나라가 국가 건설과 산업화를 위해 불가피하게 갈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고 해도, 독재의 그늘은 언젠가는 우리가 걷어내야만 했던 굴레였다.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집회로 수감된 이후 일관되게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개헌 반대 투쟁 중엔 초산 테러를 당했고 1979년엔 의원직 강제 제명을 당했다. 이 사건은 부산·마산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유신 정권이 끝나는 계기가 됐다. 1983년엔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23일간의 단식 농성으로 정국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강고하던 군부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의 결기에 손을 들었고 정치 통제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꼬가 트인 민주화의 거센 흐름은 결국 1987년 6·29 선언을 만들어 내게 된다. 암울했던 시절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며 투쟁의 선두에 섰던 김 전 대통령을 보며 많은 국민이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 민주화 투쟁의 기나긴 여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한 번도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투쟁했지만 출구 없는 대결이 아니라 절충과 타협으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점진적 개혁주의자로서의 그의 면모는 군인 정권의 중심이었던 민정당과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야당 진영에 함께 몸담았던 이들로부터 비난도 받았으나 이 3당 합당이 결국 군정(軍政) 종식과 '문민정부 탄생'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사실 또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 민주화는 1987년 6·29 선언과 대통령 직선으로 획기적 전환점을 이룩했지만 민간 출신이자 오랜 야당 지도자였던 김 전 대통령 당선으로 사실상 완결됐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넘어가면서 동남아·남미·아프리카 등 다른 나라에선 수도 없이 벌어진 헌정(憲政) 중단, 쿠데타 같은 혼란 없이 연착륙할 수 있었던 것도 온건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이런 정치인들에 힘입은 바 크다.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선언한 '부패와의 전쟁' 역시 우리 역사를 바꾼 획기적 조치였다. 지금은 일반화된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는 당시 그가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가장 먼저 공개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안팎의 많은 반대와 우려 속에 강행한 금융실명제는 이제 우리 경제의 건강과 질서를 지켜주는 튼튼한 버팀목이 돼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승부사로 살았다. 유신 정권과의 정면 대결, 목숨을 건 단식, 3당 합당 등 모두가 결정적 시기에 모든 것을 던진 승부였다. 그는 3당 합당으로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았으나 마음속에선 이들과 결별할 수도 있는 개혁의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 하나가 부패와의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가 군부 정치 사조직 하나회에 대한 전광석화 같은 해체 조치였다. 아직 군정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고 있던 그때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아니었다면 우리 군 전체를 휘어잡고 있던 하나회를 없애는 일대 단안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결단 하나로 우리나라는 군부 정권이 다시 들어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다.

김 전 대통령에겐 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무성 여당 대표와 서청원·이인제 최고위원, 손학규 전 야당 대표 등 우리 정치를 움직이는 이들 상당수가 김 전 대통령 아래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사람을 널리 모으고 기회를 주는 그의 스타일이 문민정부와 그 이후 우리 정치의 기반을 만들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많은 이가 그의 이런 리더십을 떠올리며 아쉬워하는 모습에서 다음을 내다보는 정치인들이 느끼는 것이 있었으면 한다.

김 전 대통령이 떠난 11월 22일은 우연히도 그의 재임 중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한 바로 그날이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금리를 자유화하고 공기업 민영화를 밀어붙였다. 관치(官治) 경제 시대에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재임 초에 '세계화'를 내걸었고 1996년엔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국제수지 적자가 8년 연속 계속되는 가운데 이뤄진 규제 완화와 금융시장 개방은 큰 부작용을 낳았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터지자 우리나라의 무분별한 외화 차입이 경제 전반에 직격탄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김 전 대통령 정치 인생에 가장 큰 오점이 됐고 본인도 마지막까지 이 일을 괴로워했다 한다. 그러나 이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좀 더 긴 시각에서 보면 그가 주도한 세계화, 민간 자율과 개방 위주 경제정책이 결국 우리 사회와 경제가 가야 했던 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 전 대통령 서거로 모두 7명의 전직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하게 됐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을 수 있고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대통령과 함께했던 우리 역사가 세계에 전무후무할 대(大)기적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절대 폄훼해선 안 될 소중한 가치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멈춰 서야만 했지만 대혼란 속에서 나라를 건국하고 최빈국을 세계적 산업국가로 변모시켰으며 민주화와 개혁까지 이룩했다. 대통령마다 공과(功過)가 있으나 대한민국 성공의 역정(歷程)이 이 대통령들의 판단과 의지로 여기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화합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김 전 대통령은 병석에 누운 시기에 붓글씨로 '통합'과 '화합'을 쓰곤 했다 한다. 이것이 그가 국민에게 마지막 남긴 유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이 유언에 담겨 있다. 그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의 동지이자 경쟁자였다. 독재에 맞서는 데는 손을 잡고 싸웠지만 대통령 자리를 위해선 필사적 경쟁을 벌였다. 두 사람의 이 대결이 지역주의를 심화시킨 것도 부인 하기 어렵다. 두 사람은 대통령 자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이 나라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이미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과거에서 벗어나 동지(同志)로 돌아갔다. 우리 사회가 지역감정이라는 해묵은 숙제,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이 최대 고질(痼疾)을 양김 시대와 함께 역사의 강물에 실어 떠나보내는 것은 대한민국과 모두의 과제로 남았다.

 

-조선일보 사설, 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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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단식과 말실수, 특유의 발음, 조깅, 칼국수가 떠오른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그의 인간적 면모가 늘 화제였다.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을 전격 발표할 때였다. 대통령이 TV 카메라 앞에서 담화문을 읽고 있는데 대변인이 사색이 돼 다가왔다. 케이블이 연결되지 않아 생중계되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다시 준비될 때까지 화를 참느라 YS는 의자 팔걸이를 부서뜨릴 정도로 꽉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폭발시키지는 않았다.

▶YS가 화를 터뜨릴 땐 정말 무서웠다.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취임 초 대통령이 골프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홍인길 당시 총무수석 비서관이 몰래 골프를 친 일이 있었다. 이 골프 회동이 한 일간지 만평에 나와버렸다. 홍 수석은 한동안 대통령을 피해 다녔다. 일주일 만에 회의에 들어가서도 대통령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YS가 "보래이" 하면서 불러 세웠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YS가 탁자 위에 발을 척 올리더니 말했다. "별일 없제? 잘하래이…."

[만물상] 인간 YS
▶YS가 민자당 대표 시절 외교사절들이 참여하는 청와대 행사에 초대받았다. YS의 '영원한 비서' 김기수는 이날 드레스코드가 '연미복'이라고 전했다. 막상 가보니 다들 정장 차림이었다. YS는 혼자 연미복을 입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사를 마쳤다. 상도동 집으로 가는 길 자동차가 한강대교를 건널 때 YS가 말했다. "기수야, 니 한강에 뛰어내리래이." 김 실장은 YS가 가까운 사람에겐 어떻게 화를 내는지 잘 안다. 그는 지금까지 35년 넘게 YS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 YS는 음식에 큰 관심이 없었다. 청와대 메뉴도 칼국수에 마른 멸치와 고추장을 곁들인 정도였다. DJ도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대접받았다. 하지만 나오는 길에 곧장 아귀찜을 먹으러 갔다. 청와대에 밥 먹으러 갔던 사람들 사이에 "양이 적다" "맛이 없다" 말이 많았다. YS는 출입기자 친척 중에 안동 칼국수를 잘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청와대 요리사를 보내 비법을 배우게 했다.

▶YS는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며 조깅으로 몸 관리를 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방한 땐 같이 조깅하다가 갑자기 전력질주해 클린턴보다 앞질러버렸다. 감출 수 없는 승부 근성이 작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YS는 그 무엇보다 정국에 대한 통찰력이 비범했다. 한 시대의 거인이 떠났다. 그가 '학실히' 그리울 것 같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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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이 남긴 화제의 말들

 

[김영삼 서거]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김영삼 서거]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그가 남긴 ‘言言言’

 

우리나라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그동안 활동하면서 여러 화제의 말을 남겼다. 주로 직선적인 화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YS는 1978년 7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당시 국회 연설을 통해 "정부는 안보를 빙자해서 억압 정치를 할 명분이 없으며, 오히려 안보를 위해서 민주 회복을 해야 할 시점에 섰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YS의 유명한 발언은 그다음 해인 1979년 10월 나왔다. 그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던 자신에게 해외 출국을 권유하던 전두환 정권을 향해서는 1983년 5월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했다.

1990년 1월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이를 놓고 비판도 있었지만, YS는 오히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했다. 1992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YS는 그다음 해 2월 취임사를 통해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청렴성을 강조한 그는 1993년 3월 기자회견 등에선 "정치 자금은 한 푼도 받지 않겠다. 임기 중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했다. 그해 8월 시·도지사 간담회에선 집단 이기주의를 비판하며 "정통성을 확립한 문민정부는 국민에게 요구할 것은 단호히 요구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YS는 "우째 이런 일이…"라는 말도 유행시켰다. 1993년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 아들의 대입 부정 의혹이 터졌을 때 반응이었다. 1994년 서울대 졸업식 치사에서 "분노와 저항의 시대는 갔다. 투쟁이 영웅시되던 시대도 갔다"고 말한 것도 화제가 됐다. 대북(對北) 문제에 대해선 1994년 1월과 4월에 각각 "임기 내 남북 연합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것" "김일성 주석과 언제든지 만나겠다. 북한에 줄 수 있는 쌀이 있다"고 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치겠다"는 말은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그 당시 에토 다카미 일본 총무청 장관의 "식민지 시절 일제가 한반도에 좋은 일도 했다"는 망언(妄言)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1997년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던 LA다저스의 박찬호 선수에게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갈 때도 생각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임기 말에 차남 현철씨를 둘러싼 의혹과 외환 위기 등을 겪었던 YS는 1998년 2월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는 말을 남겼다.

대통령 퇴임 뒤인 1999년 6월 김포공항에서 70대 남성이 던진 달걀(붉은색 페인트가 들었음)에 눈 부위를 맞았을 땐 "독재자는 눈을 노린다"고 했다. 2000년 10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에는 "독재자에게 노벨평화상은 어불성설,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2003년 12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특검 수용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했을 때는 최 대표를 찾아가 "나도 단식을 해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2008년 11월 우석대 초청 강연에선 재임 시절 업적이었던 '하나회 청산'에 대해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YS는 2009년 8월 DJ 서거 땐 "우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였다"고 DJ와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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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1927~2015)]

민주화운동 30년을 온몸으로 헤쳐나오며 軍政 종식시킨 정치인

朴대통령 "깊은 애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서거했다. 향년 88세.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이 병원에 입원했으며, 상태가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고 서울대병원 측은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이뤄낸 해인 1987년 11월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통일민주당 대선 후보로서 경기도 파주군청 앞에서 대중 유세를 하는 모습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서거했다. 고인은 필생의 신념으로 독재와 싸우며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 정치의‘큰 산’(巨山·김 전 대통령의 호)이었다. 사진은 김 전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이뤄낸 해인 1987년 11월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통일민주당 대선 후보로서 경기도 파주군청 앞에서 대중 유세를 하는 모습이다. /조선일보DB

 

정부는 이날 유족과 협의를 거쳐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했으며 장례 기간은 5일장으로 정해졌다. 해외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서거 소식을 접한 뒤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정부는 관련 법과 유족들의 뜻을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이 전했다. 여야 정치권도 "오늘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별이 졌다"(새누리당), "한국 민주주의의 거목으로 길이 남을 큰 지도자였다"(새정치민주연합)며 애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독재·기득권의 벽에 몸으로 부딪쳐 가며 정면 승부를 펼쳐온 우파 민주화 진영의 중심축이었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면 거칠 것이 없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은 그의 좌우명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치에 중심 역할을 한 숱한 인물을 발탁하고 키워냈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은 물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손학규 전 새정치연합 상임고문 등이 김 전 대통령의 '문하생'이거나 그에 의해 발탁된 인사들이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민주화와 지역 정치의 공과(功過)를 함께 남긴 김영삼·김대중의 '양김(兩金) 시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1927년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최연소 당선을 시작으로 9선(選) 의원을 지냈다. 유신 정권에 저항하다 헌정 사상 최초로 의원직 제명을 당했고, 1983년에는 신군부에 맞서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1990년 3당 합당을 거쳐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제14대 대통령을 지냈다. 재임 기간 하나회 청산과 금융실명제 도입, 역사 바로 세우기 추진, 전방위 부패 척결 등을 실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외환위기에 따른 IMF구제금융 신청 사태는 그의 이력의 그림자로 남아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63)·혜정(61)·혜숙(54)씨, 아들 은철(59)·현철(56)씨 등 2남 3녀가 있다. 영결식은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며 안장식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된다. 이날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약 3200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조선일보, 2015/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