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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의 극장傳] '땜빵'으로 출발한 배우 오달수의 인생경영

하마사 2015. 11. 10. 12:39

再修해 들어간 美大 중퇴… 극단 드나들며 허드렛일하다
"달수야, 배역 펑크 났다" 호출에 문상객 1번으로 연기 시작
한국 천만영화 13편 중 7편 출연 "관점을 바꾸면, 기회는 또 온다"

박돈규 문화부 차장 사진
박돈규 문화부 차장

 

서울 숭문고 2학년 4반 교실에 가면 이런 글이 걸려 있다.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고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걸 자꾸 먹어버리면 그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들려준 문장들이었다. 신문사 입사 시험 감독을 하다 칠판 옆 액자에 담긴 그 글에 한동안 눈길이 붙잡혔다. 살벌한 취업 전선으로 바뀐 교실은 적막했다. 볼펜으로 적거나 문제지를 넘기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났다.

그들을 돌아보다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2학년 4반 학생들을 상상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는 위로를 눈에 담으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좋아하지 않는 비스킷을 억지로 삼켜야 하는 고난의 시절이어서 끝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당장의 만족을 미루고 행복을 지연시키면 더 많은 마시멜로를 먹게 된다고 주문을 외면서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대학 입시에서 인기가 가장 드높은 학과, 거꾸로 말해 지원자 절대다수에게 낙방을 통보하는 학과는 어디일까. 연기(演技)를 가르친다는 곳들은 경쟁률만 보아도 어질어질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32:1, 동국대 95:1, 한양대 115:1, 중앙대 126:1, 세종대 142:1, 성균관대 76:1, 단국대 185:1, 경희대 131:1…. 올해도 수학능력시험이 끝나면 족집게 실기학원이 북적일 것이다.

"그놈이 그놈 같아요. 상상력이 풍부하고 특출난 끼를 보여주는 아이는 100명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입니다."

어느 대학 연극과 교수는 한숨부터 토해냈다. 진지하기보다는 '바람'이 든 학생, 막연히 스타를 꿈꾸는 지원자가 대다수라고 했다. 연기 분야가 각광받는 시대 탓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교수는 "화술과 감정 표현, 움직임만 속성으로 다듬어 합격하는 경우도 있지만 연기는 결국 '인생을 얼마나 아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운 좋게 바늘구멍을 통과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탐구가 부족한 배우는 맛없는 비스킷을 계속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최근 1년간 한국 영화 흥행 1~3위는 '국제시장'(1426만명) '베테랑'(1341만명) '암살'(1270만명)이다. 배우 오달수(47)는 세 편에 모두 출연했다. 역대 한국 천만 영화 13편 중 7편에 그가 나온다. '암살'을 만든 최동훈 감독은 오달수를 "세상살이가 팍팍하니까 위로 삼으라고 지상에 내려 보낸 '요정'"이라 부른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늘 꿀맛이다.

좋은 배우는 인생 자체가 드라마다. 오달수는 공부로 대학 가기 어려워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동의대 공업디자인과에 들어갔지만 중퇴하고 만다. 부산에서 인쇄물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극단 연희단거리패에 드나들 일이 많았다. 밥 시간에 걸리면 같이 먹고 설거지도 해주면서 단원들과 친해졌다. 어느 날 연출가 이윤택이 그를 불렀다. "달수야, 배역 하나가 펑크 났다." 상가(喪家)에서 펼쳐지는 '오구'의 문상객 1번. 2시간 내내 무대에서 화투 치며 "쓰리 고다!"를 외치는 역할이었다.

'땜빵'으로 그 세계에 입문한 오달수는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충무로 전체가 구애(求愛)하는 배우가 되었을까. 관객은 그를 식상해하지 않는다. '남자충동'을 연출한 조광화가 흥미로운 해석을 들려주었다. 연극은 같은 장면과 대사를 같은 감정으로 반복 연습해 공연해야 하는데 오달수는 매번 달라서 고생깨나 했다는 것이다. 조광화는 "지나고 보니 타성에 젖거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오달수만의 매력이더라"고 했다.

오달수는 숫기가 없고 내성적이다. 영화 속 쾌활한 오달수와는 정반대다. '남자 수애'로 불릴 정도다. 영화는 그에게 '재미있는 쌈마이(삼류)'를 원했다. 오달수는 "작은 배역이라도 인상적인 연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사투리와 큰 머리 같은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이 배우는 수염을 붙이거나 머리만 묶어도 확 달라 보인다. '베테랑'의 류승완 감독은 "살아 있는 인물을 만드는 오달수에게도 애환이 있을 것이란 느낌 때문에 관객이 좋아한다"고 했다.

오달수는 2000년부터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종신제 대표다. 하지만 연극을 하겠다는 청년들이 오면 일단 말린다. 고생길이 뻔해서다. 100대1 경쟁을 뚫고 연극영화과를 거쳐도 썩 나아질 건 없다. "추운 겨울에 해녀가 왜 물질하는 줄 아느냐"고 오달수가 물은 적이 있다. 우물쭈물하니까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도 들어갔으니까." 오늘을 어제처럼, 남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무뎌지고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맛없는 비스킷과 맛있는 비스킷이 정해져 있진 않다. 오달수는 관점과 태도에 따라 인생의 맛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함께 호흡한 배우들은 몸담은 영화가 통째로 달라지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그러니 수능을 망치거나 진학에 미끄러지더라도 좌절할 이유가 없다. 오늘을 어제처럼 살지 않으면 기회란 또 오는 법이니까.

 

-조선일보, 2015/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