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데뷔 20주년을 맞은 장사익은 올해 데뷔한 지 20년 된 윤도현이나 크라잉넛과 음악 동년배다. 그러나 데뷔 2년 만인 1996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매진시킨 것을 시작으로 그간 11차례나 같은 곳에서 매진 공연을 열었다. 발끝에서 수액(樹液)처럼 끌어올린 소리를 심장에서 터뜨리는 듯한 그의 노래는 대단한 힘을 발산한다. 그도 한때는 15개 직업을 전전하던 구직자였다. 그에게 요즘 '삼포세대'가 가야할 길을 물어봤다.
15개 직업 전전하다 가수 데뷔... 장사익에게 '3포세대'의 길을 묻다
이 남자는 45세에 태어났다. 그는 “만약 아흔 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앞의 절반은 캄캄한 밤이었고 나머지 반은 대낮”이라고 말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돼지 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장사익(66)은 고교 졸업 후 45세까지 15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16번째로 택한 직업이 가수였다. 그는 “노래를 하고 나니 내 인생에 없던 ‘행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야, 이게 내 길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고 말했다. 딸기 장수부터 카센터 직원까지 오락가락하던 그 인생의 진폭(振幅)은 그때부터 잦아들었고, 장사익은 한국 최고의 소리꾼 중 하나가 되었다. 고교 졸업 후 25년간 방황하다가 중년 들어 길을 찾은 그에게서 한국 청년들에게 줄 답안지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지는 늘 이렇게 지내유. 마루에 앉아서 먼 산 쳐다보다가 차나 조르륵 따라 마시고...” 서울 홍지동 그의 집 2층 거실에 마주 앉은 장사익은 익숙한 솜씨로 차를 따랐다. 안동 고가(古家) 대청마루를 뜯어 만든 납작 테이블이 반들반들 빛났다. 그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자, 건배합시다. 가을날에 축배! 참 좋은 날 오셨네.”
-항상 “참 좋다, 참 좋다”는 말을 하시네요.
“오늘 하늘 좀 봐요. 1년에 이런 날이 몇이나 되겄어. 그니께 참 좋지. 꽃 하나만 봐도, 좋은 사람을 봐도 참 좋지요. 그러니까 즐거운 거예요. 내 주름은 인상 써서 생긴 게 아니고 웃어서 생긴 거예요. 손녀딸이 ‘할아버지는 얼굴에 줄이 왜 이렇게 많아?’ 하는데, ‘하도 웃어서 그런겨’ 해요.”
45세 데뷔... “이미자처럼 55년은 해야 할 텐데”
작년 데뷔 20주년을 맞은 장사익은 올해 데뷔한 지 20년 된 윤도현이나 크라잉넛과 음악 동년배다. 그러나 데뷔 2년 만인 1996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매진시킨 것을 시작으로 그간 11차례나 같은 곳에서 매진 공연을 열었다. 발끝에서 수액(樹液)처럼 끌어올린 소리를 심장에서 터뜨리는 듯한 그의 노래는 대단한 힘을 발산한다. 지난 3월엔 KBS 특집 콘서트 ‘이미자 장사익’에서 대선배인 이미자와 합동 공연도 했다. 이미자는 선배 가수 패티김과 함께 TV 프로그램을 한 적은 있으나 후배 가수와의 무대는 처음이었다.
“지는 무임승차죠. 데뷔 20년밖에 안됐는데 55년이나 된 이미자 선생님하고 공연했으니까요. 이미자 선생님은 진짜 노래를 잘 넘기시는데, 그건 노래를 잘 굴린다는 거거든. 근데 굴리는 흔적이 없어요. 그게 기가 막히다는 거죠. 저두 앞으로 35년은 더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백 살이더라구요. 허허허.”
-60세까지는 TV에 거의 안 나오셨잖아요.
“마흔다섯에 가수가 되고 나서 음악은 비디오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환갑 때까지는 TV 말고 열심히 공연만 하자 그랬죠. 환갑 넘으면 TV 나와도 사람들이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했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웅변을 해서 맨날 뒷산에서 목청을 틔웠죠. 고등학교(선린상고)를 서울로 오면서 소풍 때 나가서 노래하고 허니까 잘한다고 해요. 그때 처음 ‘내가 노래를 잘하나 보다’ 생각했죠. 그래서 졸업하고 노래 학원도 다니고 했어요. 사실 그때 싹이 튼 거지.”
-그런데 왜 보험회사에 취직했나요.
“아유, 그때는 데뷔하려면 몇 천만원 든다고 했어요. PR도 해야 하고 어디어디 갖다 바쳐야 된다고... 그리고 얼굴도 이쁘게 생겨야 되는데 그렇지도 못허구.”
장사익은 상고 졸업 후 고려생명보험에 입사했다. 군 입대 전 김동아라는 가수의 음반에 ‘장나신’이란 이름으로 딱 한 곡 녹음한 적도 있다. 벌거벗었다는 뜻(裸身)의 가명이었다. 그러나 김동아 음반이 잘 팔리지 않으면서 그의 노래도 묻혔다. 군 복무 때도 문선대에서 노래를 했던 그가 제대하자 회사는 동해생명이란 회사로 인수·합병돼 있었다. 직업 유랑(流浪)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제대한 게 1972년인데 갈 데가 없어서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듬해 1차 오일쇼크가 오면서 1배럴에 12달러 하던 석유가 24달러까지 올라갔어요. 1년 만에 잘렸죠. 그리고는 여우목도리에 꽂는 핀 만드는 회사에 다니다가 몇 달 만에 나오고, 동생이랑 강릉에서 딸기 장사도 하고 가구 외판원, 연구소 경리과장, 금성알프스전자라고 금성전자와 일본의 합작회사도 다니고, 청계천 전자상가에서도 일하고 독서실도 해보고... 결국 마지막에 매제(妹弟)가 하던 카센터에서 일했죠. 15가지가 넘을지도 몰라요. 하여튼 세상살이 제대로 했지. 그런데 내 길을 못 찾은 거야. 한참 올라가다가 ‘이 산이 아닌가벼’ 하는 게 연속이었어요.”
-매제의 부하 직원으로 일하기가 쉽지 않았겠네요.
“정비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맨날 청소하고 주차해주고 커피 타주는 잔일만 했죠. 그래도 좌절은 하지 않았어요. 천성이 낙천적이라서.”
-그 카센터에서 서태지와의 인연이 생겼죠.
“서태지 매니저가 차 고치러 자주 왔는데 어느 날 ‘하여가’에 태평소가 필요한데 태평소 부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좀 분다’ 했더니 나중에 연락이 와서 서태지 공연에서 두 번 태평소를 불었죠. 뭐 나는 그냥 구색이었으니께 서태지하구 친해진 건 아니구.”
-그때가 최악의 시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주시는 쌀로 밥 짓고 반찬은 김치만 먹고 살았어요. 매제 카센터에서 딱 3년 일했는데 ‘인마, 인마’ 하던 매제에게 ‘아이구, 사장님’ 하고 불렀어요. 나는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한 달 100만원 받았는데 사업이 잘 안돼서 50만원으로 줄었어요. 그래도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내 신세가 찔레꽃 신세
카센터마저 그만둔 뒤 장사익은 이광수 사물놀이패에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이것 하나밖에 없다”는 심정이었고 “태평소라도 열심히 불면 밥은 먹겠지” 했다고 했다. 그때 그는 ‘찔레꽃’이란 노래를 썼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하는 노래다. 그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하면 멀쩡하던 중년 남녀들이 가사처럼 운다. 가수의 노래에 맞춰 눈물 흘리는 것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낯선 경험이다.
“그때 잠실 주공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꽃향기가 진하게 나는 거예요. 빨간 장미가 활짝 피었기에 가까이 가봤더니 장미향이 아니에요. 자세히 보니까 저 안에 숨어있는 찔레꽃 향기였어요. 아유, 눈물이 팍 났네, 그냥. 나도 향기가 있는 사람인데 다들 장미만 쳐다보네. 그러니까 찔레꽃 너나 나나 똑같은 신세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세상에 폼 잡는 놈들은 사실 향기를 내지 않는다고요.” 그는 “그런 나의 사연을 노래로 쏟아내면 이상하게 사람들한테 내 마음이 전달되더라”고 했다.
장사익은 무대에서 이런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 특유의 탁성(濁聲)에 그 노래가 얹히면 맥이 탁 풀리면서 그냥 울고 싶어진다. ‘꽃구경’이란 노래를 눈물 훔치지 않고 들을 수 있다면 대단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로 시작하는 노래는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더니/ 한 움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하고 이어진다. 그리고 “어머니 지금 뭐 하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나요/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일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하고 노래가 마무리되면 객석은 영락없이 눈물바다가 된다.
200석 데뷔 공연에 몰린 800명
장사익을 발굴한 사람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이었다. 1994년 여름 이광수 사물놀이패의 공연 뒤풀이에서 임동창이 피아노를 치고 장사익이 ‘대전 부르스’를 불렀는데, 후배 격인 임동창이 “형, 공연 딱 한 번만 합시다” 하고 졸랐다. 그해 11월 서울 서교동의 100석짜리 극장에 하루 400명씩 이틀간 800명이 몰렸다. 간이의자에 입석까지 팔아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 같은 건물 위층에 있는 카페에 대형 모니터를 갖다놓고 공연을 생중계했다. 그때 ‘생중계 기획’을 한 사람은 장사익의 팬이었고, 이듬해 장사익은 그 팬과 결혼했다. 그날 이후 장사익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아내 고완선이다.
“첫날 공연을 하고 이튿날 아침 눈이 번쩍 떠지면서 아, 바로 이거구나 했어요. 그때 ‘행복’이란 것을 태어나서 처음 느꼈어요. 이때까지 먹고살 걱정만 했지, 내가 행복한 일을 찾지 않았구나 한 거죠. 내 노래 중에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가 있어요. 딱 그 느낌인 거예요. 엄마 아버지 형제들 친구들, 심지어 나를 자른 사장님, 넘어뜨리고 쓰러뜨린 사람들조차 반갑고 고맙고 기쁜 거예요. 그 사람들이 딱 그 자리에 있어 가지고 오늘의 저를 만든 거예요. 가수하기 전의 내 사진을 보면 웃는 사진이 없어요. 근데 그 후의 사진은 죄다 웃고 있어요.” 장사익의 데뷔 무대를 우연히 본 연극인 손숙은 당시 한 주간지에 “이미자와 조용필만 가수인 줄 알았더니 장사익도 있더라"는 글을 썼다. 당시 장사익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글이었다.
-이른바 ‘3포 세대’라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겠네요.
“저는 15가지 직업을 돌아다녔지만 항상 떳떳했습니다. 우리 때는 선생님이 취직하라는 데로 무조건 갔어요. 조그만 회사, 공장 가리지 않았어요. 거기서 열심히 해서 사장 된 친구들 많습니다. 지금은 다들 학력이 높아졌죠. 아무 데나 가라고 하면 ‘나더러 거길 가라고? 난 삼성 아니면 안 가요’ 합니다. 내가 독서실 할 때 학생이 150명쯤 있었는데 서울대는 서너 명밖에 못갔어요. 다들 서울대 가려고 밤 2시까지 공부해요. 그런데 대부분은 못 가요. 그게 현실이에요. 자기 페이스를 알고 자기 페이스대로 가야 돼요. 하고 싶은 분야의 어느 회사든 들어가서 ‘10년 뒤에 이 회사는 내 꺼여’ 하고 일하면 뭔가 됩니다. 지금 스물다섯 살이면 서른다섯 살의 모습을 그리라는 거죠. 지금 당장 삼성에 들어가려니까 힘들고 안 되고 속상한 거예요.”
-조선일보, 201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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