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기타자료

'힐링' 명절

하마사 2015. 9. 25. 12:52

작은 출판사를 꾸리는 이금씨는 홀시어머니에 아들만 넷인 집 셋째 며느리다. 여차하면 동서지간 언성 높일 일도 있으련만 명절은 물론 김장 담글 때도 온 식구 모여 잔치하듯 '거사'를 치른다. 화목의 열쇠를 쥔 이는 시어머니다. 아들들 빈둥거리는 꼴을 못 본다. 배추 절이고 소 만드는 건 며느리들 몫이지만 치대기는 남자들이 한다. 온 식구가 머릿수건에 고무장갑 끼고 온 마당을 돌아다니니 "지나던 사람들이 김치 공장인 줄 안다"며 이금씨 헤벌쭉 웃었다.

▶명절에도 시어머니 지혜는 빛난다. 뒷말 없도록 일찌감치 영역을 나눴다. 음식 잘하는 맏며느리는 당신과 함께 요리 주도하는 숙수(熟手). 둘째와 막내며느리는 설거지를, 힘 좋은 셋째는 청소를 맡는다. 남자들 몫도 있다. '립 서비스'하기. 살가운 둘째 아들의 닭살 멘트는 집 안에 웃음꽃을 피운다.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들 잘 얻어 얼마나 좋으실까" "우리 여보 희생으로 빚은 저 송편은 얼마나 맛있을까." 시어머니의 '서비스'는 노동 후 며느리들이 벌인 고스톱판에서 절정에 오른다. "노름하느라 바쁜 며느님들, 목이라도 축이면서들 하셔" 하며 주안상을 차려내신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해마다 이맘때면 단골로 나오는 말이 '명절 증후군'이다. 명절 지나 이혼하는 부부가 는다는 뉴스도 몇 해째 지겹게 들려온다. 이번엔 어느 온라인 사이트가 명절 스트레스를 언제 가장 많이 받는지 조사했다. 여자들은 "남편이 온종일 TV만 보며 빈둥거릴 때"라고 했다. 남자라고 만고강산은 아니다. "목돈 드는 것과 장거리 운전, 아내 투정과 구박이 힘들다"고 했다.

▶결혼 16년째 접어드니 며느리만 명절이 무서운 게 아니란 걸 알겠다. 음식 장만부터 차례 지내기, 남은 음식 싸주기까지 전체 그림 그리며 진두지휘하는 시어머니 스트레스가 며느리보다 결코 적다 할 수 없다.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가다 서다 운전하며 아내 넋두리도 들어야 하는 남자들도 중노동이긴 마찬가지다. TV 앞에서 빈둥거리는 듯해도 바늘방석이 따로 없다.

한데 아주 사소한 노력으로 명절 맘고생을 확 줄일 수 있다. 해법은 '말(言)'에 있다. "아범 얼굴이 왜 이러냐" 대신 "네가 우리 집에 와 고생이 많다"고 다독이면 며느리는 춤을 춘다. "당신이 만든 동그랑땡은 대한민국 최고야"라는 입발린 소리도 엔도르핀의 원천이다. 강원도 시골 마을에 이런 현수막이 걸렸단다. '에미야 어서 와라. 올해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해주마.' 힐링 명절이냐, 킬링 명절이냐는 그대의 따뜻한 유머와 위트에 달렸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5/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