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4일 2차 대전 종전(終戰) 70년을 결산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당초 침략에 대한 반성은 하되 사죄는 하지 않을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식민지 지배' '침략' '반성' '사죄' 같은 단어를 모두 포함시켰다. 아베 총리는 그동안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않을 것" "침략의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 같은 발언을 반복적으로 해왔다. 그런 아베의 입장에서는 진전된 내용을 담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2005년 고이즈미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명확하게 표명했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의 표현을 가져다 쓰면서도 교묘한 방식으로 진정성 있는 사죄를 피하려고 한 흔적이 담화 곳곳에서 드러났다. 담화는 "일본 정부는 앞선 대전(大戰)에서 한 일에 대해 반복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명해왔다"며 "이런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릴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마치 남의 입을 빌려 반성·사과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아베 담화가 반성·사죄하는 대상은 대부분 중국·미국을 상대로 전개한 만주 침략과 2차 대전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오히려 합리화하려는 듯한 설명을 붙였다. 담화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 쟁탈전이 아시아까지 확대돼 일본에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심지어 1905년 러일전쟁 승리가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줬다고까지 했다. 1910년 일본의 불법 합병 이후 36년간 식민지 억압 아래 있었던 한국 입장에서는 도저히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했다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아베 담화는 또 '전쟁의 고통을 맛본 중국인'과 '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의 포로'를 지목해 명시적으로 사과했다. "사죄를 계속해야 하는 숙명을 등에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식민지 압제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고문으로 죽고 수십만명이 강제 징용, 강제 이주(移住)의 고통을 겪었던 한국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일본 총리의 담화는 그 시대의 국제 정세를 보는 일본의 시각을 반영해 왔다. 이번 아베 담화는 일본이 대미(對美), 대중(對中) 관계에는 신경을 쓰면서 대한(對韓) 관계에는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베 담화는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위안부' 단어를 쓰지 않으면서 "전쟁의 그늘에서 명예와 존엄에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단장(斷腸)의 염(念·생각)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게 진심이라면 아베 정부는 당장 '명예와 존엄에 상처를 입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이번 담화 발표를 앞두고 "양국 관계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하반기에 한·일 관계를 본격적으로 정상화시킨다는 구상도 하고 있었다. 아베 총리는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으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만큼은 자기 생각을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담화 하나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끊겠다고 하는 것은 현명치 않은 선택이다. 지금 동북아 지역은 수십년 만의 세력 전환기를 맞고 있다. 우리는 이번 담화에서 드러난 아베 총리와 그 내각의 속성은 기억하되 그릇된 역사 인식에 맞서는 국제 공조를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201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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