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땀과 눈물, 그리고 도전… 한국을 빛낸 스포츠 영웅들
첫 올림픽 메달 김성집, 첫 월드컵 이끈 홍덕영, '더반의 기적' 쓴 홍수환
가난에 찌든 국민에게 그들은 희망이자 용기였다
황영조·박찬호·이상화… 잠재력 꽃피운 후배들
세계 무대 주름잡으며 대한민국을 각인시켜
- 한국 스포츠는 땀과 눈물로 이뤄낸 역사다. 일제 강점기이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며 한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손기정의 ‘투혼’은 광복 이후 수많은 후배 체육인에게 이어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밑거름이 됐다. /사진 화가 강형구씨 제공
1947년 4월,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이 시상대에 섰다. 그의 유니폼 가슴에는 'KOREA'란 글자와 태극기 문양이 선명했다. 광복 2년 만에 맞은 쾌거였다. 이날 많은 한국인이 손기정을 떠올렸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하고 시상대에 선 그는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려 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우리는 절대 열등한 민족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한 손기정에게 환호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일본의 금메달리스트 '기테이 손'으로 시상대에 설 수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김연아와 많은 스타가 흘리는 가장 행복한 눈물을 지켜보기까지 한국 스포츠는 국민에게 희망의 응원가를 부르며 광복 70년을 달려왔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땄다. 동메달을 나란히 획득한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한수안이었다.
지금은 12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면 되는 길을 9개국 12개 도시를 거쳐 21일 만에 도착했다. 김성집은 런던에서 대한민국 1호 메달을 딴 데 이어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수안은 투혼의 상징이었다. 왼쪽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당하고도 8강전에서 승리했고 준결승에서도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편파 판정으로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땄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란 국호로 처음 나간 하계 올림픽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뜨거웠다. 성금이 답지했고 7개 종목 67명의 선수단은 종로 2가 YMCA회관에서 서울역까지 가두 행진을 했다.
6·25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던 1954년 축구 대표팀은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는 쾌거를 이뤘다. 일본에서 치른 두 차례 경기에서 5대1 승리와 2대2 무승부로 출전권을 획득하자 교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 스위스월드컵 최고의 한국 스타는 광복 후 8년간 골키퍼를 맡았던 홍덕영이었다. 헝가리에 0대9로 지고 터키에도 0대7로 졌는데 현지 언론은 "골키퍼의 선방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미군 군용기를 빌려 타고 출전했던 대표팀의 어려운 사정이 알려지자 스위스와 유럽 팬들이 보내준 구호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1966년 한국은 처음으로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을 보유하게 됐다. 국내 최초 체육관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전에서 김기수가 로마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를 2대1 판정승으로 누르고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맸다. 이후 '헝그리 복서'들이 펼치는 투혼의 승부는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74년 '더반의 기적'을 이룬 세계 챔피언 홍수환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하자 어머니는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대답했다. 이 모자(母子)의 대화는 최고 유행어가 됐다.
-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세계무대를 호령한 스포츠 스타들의 모습을 보면서 국민은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왼쪽부터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 한국인 첫 메어저리거로서 동양인 최다승(124승)을 달성한 박찬호,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한국인 1호 프리미어리거로 활약한 박지성. /대한체육회 제공·전기병 기자
본격적인 경제성장기를 맞은 1970년대 한국 스포츠는 각 분야에서 세계로 뻗어나갔다. 1973년 세계탁구선수권 단체전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 등이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는 양정모가 레슬링에서 광복 후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시아 최고의 골잡이 차범근은 1979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차붐'이란 애칭으로 유럽 무대를 누볐다.
1980년대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출범했다. 당대 최고의 투수로 불리던 최동원과 선동열의 맞대결은 이후 영화로 다시 만들어질 정도로 전설적인 승부였다. 김수녕은 1988년 서울올림픽 등 세 차례 올림픽에서 금 4개, 은 1개, 동 1개를 적중시켜 신궁(神弓)이라 불렸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남북 단일팀인 코리아가 만리장성 중국을 누르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인에게 각별한 종목일 수밖에 없는 마라톤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이봉주가 은메달을 따냈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에서 쇼트트랙의 김기훈은 한국의 동계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따내며 효자 종목의 출현을 알렸다.
- ‘피겨 여왕’ 김연아는 불모지였던 피겨 스케이팅에서 한국인으로는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개척자였다. 사진은 김연아가 2010 밴쿠버올림픽 시상식 후 금메달을 목에 건 채 태극기를 들고 기뻐하는 모습. /전기병 기자
2002년 홍명보가 월드컵 4강을 이루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자 길거리 응원에 나섰던 수백만 인파의 환호로 나라가 들썩였다. 한국인 최초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박지성은 세계적인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며 한국과 세계 축구의 간격을 좁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박태환은 한국 최초의 수영 금메달을 땄고, 역도의 장미란은 세계신기록을 들어 올렸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스포츠는 새로운 희열을 맛봤다. 피겨 스케이팅 불모지에서 피어난 김연아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연기로 여왕이 됐다. 스피드 스케이팅의 이상화와 모태범·이승훈은 거침없는 질주로 '스피드 코리아'의 이름을 높였다. 여자 골프의 박인비는 2013년 메이저대회 3연승을 이루고 올해엔 메이저 대회 3연패와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이루며 전설이 됐다. 손기정에서 김연아까지 스포츠는 한국인의 가능성을 세계무대에서 꽃피우며 자신감을 갖게 하는 존재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조선일보, 201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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