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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청소년들의 ‘호통 대장’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판사

하마사 2015. 8. 29. 13:56

 

비행 아이들요? 사랑·신앙만이 바꿉니다…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판사

 

[얼굴] 비행 아이들요? 사랑·신앙만이 바꿉니다…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판사 기사의 사진
천종호 판사는 “우리 사회가 보호소년들의 아픔엔 공감하면서도 정작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건 부담스러워하죠. 심지어 교회도요”라고 말했다. 출판사 우리학교 제공

 

 

부산가정법원 천종호(50) 판사는 청소년 관련 기관과 단체, 법조계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호통 판사’ ‘호통 대장’ 등의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재판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비행청소년들은 ‘바보’ ‘천10호’ ‘선생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천10호’는 소년원법에 의한 소년원 송치 처분 기간 ‘10호 처분’을 말하는데 그 기간이 2년으로 최고형이나 다름없다. 한데 천 판사가 10호 처분을 자주 내려 ‘천10호’라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이 끝나고 나면 소년들의 처지에 눈물을 흘리고, 그들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시민활동가’처럼 뛴다. 세 자녀를 둔 평범한 아버지 마음에서다. 그의 친구 곽경택(영화감독)은 “천종호는 많은 돈도, 감춰진 허세도, 대단한 출세욕도 없는 그냥 맑고 강직한 판사”라고 밝혔다.

천 판사를 지난 24일 부산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신앙인’(부산 금정평안교회 피택장로)이라는 이유로 폐가 될까 해서다. 그의 집무실에 이런 액자가 걸려 있었다.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천10호’ 별명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소년재판을 통해 최종적으로 내려지는 결정을 ‘소년보호처분’이라고 합니다. 1개월은 8호, 6개월은 9호, 2년은 10호죠. 따라서 10호 처분은 매우 무거운 경우입니다. 9호 처분보다 10호 처분이 오히려 소년들에게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검정고시 합격을 위해 또는 기술자격증 취득을 위해서죠. 소년들을 위해서라면 9호 처분을 할 수 있을 때도 10호 처분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원망도 듣겠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녀석들에게 충격으로 다가들겠죠. 그렇게 학교(소년원)에 보내진 녀석들에게 ‘처음엔 판사님 원망 많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배울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편지를 받습니다.”

그는 실제 지난 6년간 사법형 그룹홈 설립에 나서 창원 등 경상도 지역 14곳에 청소년회복센터를 열었다. 또 비행소년 전문 상담교육기관 ‘경남아동청소년상담교육센터’, 정규학교 과정 ‘국제금융고 창원분교’ 등도 설립했다.  

“처음엔 판사님 원망 많이 했다” 

-호통은 왜 치십니까. 통상 법정 분위기와 많이 다를 텐데요. 

“사건당 할애되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요. 3∼4분 정도니까요.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소년과 보호자에게 조그만 깨우침이라도 주려면 호통칠 수밖에 없습니다. 퍼포먼스 효과라고 할까요. 방청객들은 ‘호통치료’라고 합니다. 호통받은 소년들 중에 ‘마치 아버지한테 사랑의 질책을 당한 것 같아 속이 후련했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제대로 된 어른들에게 강하게 지적 받지 않아 여기까지 온 거죠.”

-격언과 시낭송, 편지 등도 활용하시죠. 

“갈등이나 분노 상황에서 공격적인 행동을 일삼던 종수(가명)라는 아이의 심리에서 종수와 종수 어머니에게 각기 일본 할머니 시인 시바타 도요의 ‘약해지지 마’와 ‘아들에게’를 낭독하게 했습니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힘에 겨운 일 생기면 엄마를 떠올리렴…’ 등과 같은 내용이죠. 적대감 뭉치의 아이가 한결 부드러워지죠. 법정에서 부둥켜안고 웁니다. 편지는 더하죠.”

-소년법정은 성인 법정과 차원을 달리하죠. 

“아들 몸에 조폭 문신을 보고 자책감에 혼절한 어머니, 암 투병 중에도 나와 자식을 제발 돌려달라고 하는 어머니, 자식이 구금되어 있는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로 보내다가 ‘집으로 데려가라’는 판사 말에 긴장이 풀려 쓰러져 119구급차에 실려 가는 어머니, 가출 후 원조교제로 생계를 이어가던 딸을 구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소년원에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부모, 가슴 밑바닥서부터 터져 나오는 통곡을 주체 못해 꺽꺽 우는 아버지…. 말로 다 할 수 없죠.” 

매년 10만여명 소년범죄 발생 

천 판사는 소년범죄가 살인·성폭행 등 흉포하고 잔인화돼 간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를 두고 사회에서는 엄벌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쏠리고 있다. 그는 엄벌과 관용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소년범죄는 경미한 학교폭력범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들을 위한 재교육이나 재비행 저지를 위한 사회적 관심과 제도 마련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소년범 현황이 어떻습니까.  

매년 10만명 정도의 소년범이 발생합니다. 그중 중범죄로 소년교도소나 소년원에서 생활하는 5000여명을 제외한 9만5000여명이 사회로 돌려보내집니다. 그러면 재범 방지가 관건이겠죠. 한데 국가가 제공하는 장치는 보호관찰제도밖에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2013년 기준 재범률이 41.63%입니다. 비행소년 문제는 선거권과 직접 관련이 없다보니 국회 등 사회가 무관심합니다.” 

-가정해체가 소년범 발생의 주된 요인인 것 같더군요. 

소년범 48%가 결손가정 아이들입니다. 또 결손가정은 빈곤문제를 안고 있는데 전체의 70%는 결손·빈곤에 따른 악순환이죠. 그들을 격리하기보다 준(準)가정과 같은 그룹홈 등을 통해 ‘사회적 지위 상승의 희망’을 주어야죠. 아이들에겐 어떤 형태든 ‘사랑의 가정’이 필요합니다. 사법적 그룹홈을 그래서 시작한거고요.”

-법률적 판단만 하셔도 될 텐데 굳이 힘든 일을…. 

“2010년 창원지방법원 소년부를 맡게 되면서 가정의 해체로 인한 소년비행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 어린 시절과 같은 환경에 놓인 아이들이죠. 문제는 우리 사회가 보호소년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그들에게 정작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건 부담스러워하죠. 심지어 교회도요.”

-천 판사님은 법조인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롤모델이시더군요.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같이’라는 ‘말씀’에서 여러 가지가 느껴집니다. 

“저는 도시빈민의 아들입니다. 7남매가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육성회비를 못내 교실서 쫓겨났고, 수학여행은 꿈도 못 꿨죠.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세 끼조차 제대로 해결 못한다는 수치심이 컸습니다.”

수돗물로 배 채우던 천 판사 소년기 

-교회 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함께 놀던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전도팀을 따라 죄다 교회(현 아미동 아름다운교회) 간 거죠. 뒤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고신 측 교회라 엄격했어요. 중·고등부 회장 등을 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부산·경남지역서 유명한 무척산기도원으로 수련회도 가고요. 7남매나 되니 집에선 공부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숙제만 하고 바로 자버리죠.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교회 가서 새벽기도 하고 공부했습니다. 교회는 장의자에 누울 수도 있고… 하하. 그러니 공부 못하면 안 되잖아요.” 

-주일을 지키기 위해 수학여행을 안 가신건 아니죠. 

“친구들에게 주일성수 때문이라고 둘러댔죠. 실제는 수학여행비를 못 내서였고요. 수학여행 못 간 친구가 10명 정도 됐는데 대부분 주일 낀 여행 일정 때문에 안 간 거였어요.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 자녀였던 거죠. 그 친구들에게 ‘나도 그렇다’라고 해야 했죠.” 

-과외는커녕 부교재 살 돈도 없는데 공부에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아뇨. 똑똑한 건 아닙니다. 제가 좀 숫기가 없어 ‘삐뚤어 나갈 능력’도 없었어요. 공부와 교회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셈이죠. 가난은 그 무렵에도 계속돼 입시원서도 못 살 형편이었죠. 재수는 언감생심이고요. 대입을 자포자기한 상태가 됐습니다.” 

-천사가 나타났다면서요. 

“대학 원서접수 마감 날 아미동에서 터덜터덜 걸어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 쪽까지 내려왔는데 학교 친구를 만났어요. 원서접수 마감시간 다 됐는데 뭐하냐고요. 내 처지에 무슨 대학이냐고 했죠. 친구가 ‘야 무슨 소리야 서둘러’ 하며 원서를 사줬어요. 당시는 서점에서 원서를 팔았잖아요. 부산 사람이면 다 아는 문우당이었죠. 그리고 모교인 부산남고에 들러 지원서를 작성해 부산대에 가니 접수마감 30분 전이었습니다. 그가 박명규(세무사)라는 친구였죠. 재작년 창원에서 열린 제 책 출판기념회에서 그 친구를 소개하며 ‘하나님이 보내준 천사’라고 얘기했더니 ‘내가 그랬냐?’ 하더군요. 청소년 특강이라도 있으면 이 사례를 얘기해요. ‘여러분의 배려가 누군가에게 삶의 전환점을 마련한다’고요.” 

-가난을 피해 군대 가시고, 전역 후에도 희망이 없었죠. 

“가난은 삶의 의지를 꺾는 무서운 질병이죠. 부모와 형제들, 교회 식구들, 이웃들 아니면 내가 버틸 수 있었을까 되돌아보곤 합니다. 내 인생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입니다. 이들 덕에 5전 6기 만에, 스물아홉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니까요.” 

-합격 후 ‘가난한 여자친구’를 버리지 않으셨더군요. 

“사시 준비하며 사귄 대학 동창인 아내(도인자·교사) 역시 저처럼 가난한 집 딸이었어요. 사시 합격 후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데요. 이러다 아내에게 상처가 되겠다 싶어서 바로 결혼했습니다.”

“교회가 아니었으면 나 없었을 것” 

-부인보다 ‘꼿꼿했던 신앙생활’이 역전됐다면서요. 

“하하. 제가 고신파 교회를 다녀서 좀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한데 나중에 역전됐어요. 저는 판사 생활 20년만 하고 나와 변호사 개업을 하려고 했어요. 제 형제자매 누구도 대학 나온 이가 없어요. 돈을 벌어 돕고 싶었죠. 그러려면 붙임성도 있어야겠기에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큰 교회 다녀야 하나 생각했죠. 30대 초부터 그런 거죠. 그런 저를 위해 아내가 기도했어요. ‘당신이 이러려고 판사된 거 아니잖나’고 하더군요. 아내와 장모님 기도 아니었음 정신 못 차렸을 겁니다. 2006년 무렵 술 끊었어요.”

-올봄 펴낸 ‘이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등 두 권의 저서 인세 등을 비행청소년을 위해 다 쓰셨더군요. 특강비 등도 예외 없고요. 형제들이 섭섭해 하지 않을까요. 

“우리 대개가 소시민으로 살지 않습니까. 제 형제들도 그렇습니다. 제가 하는 일 이해해주는 형제들입니다. 많지는 않아도 늘 나눠 쓰려는 형제들이고요.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추구하면 안 됩니다. 저는 공의에 대한 판단을 신탁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최근 교회 초청 비행소년문제 특강을 통해 청소년지원센터 승합차 운영 문제 등을 해결해 주셨죠.

“제 힘이겠습니까. 교인들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신 거죠. 서울 온누리교회 마리아형제팀 초청으로 휴가를 내서 올라가 특강을 했어요. 3000여명이 참석해주셨죠. 14군데 센터 중 3곳의 승합차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정치인이 되시면 국회 등이 무관심한 ‘비행소년 전용 공동생활가정’ 입법 등이 수월하실 텐데 정치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전혀요. 무슨 말씀인지는 압니다만 법조인이 법복 벗었다고 부와 권력에까지 욕심내면 안 되죠. 성서적이지도 않고요. 저는 비행소년을 비롯해 법조인이 되려는 후대들에게 모범이 되는 법조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후기. 천 판사에게 폐가 안 되리라 믿고 그의 마지막 한마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요? 사랑과 신앙이 아니면 변화가 안 됩니다.” 

천종호 

부산 아미동 산동네 출신.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97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부산고등법원, 창원지방법원 등을 거쳐 현재 부산가정법원 소년부 부장판사. 2010년 비행으로 내몰린 아이들 재판을 맡으면서 매년 발생하는 10만명의 비행소년 선도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비행소년지원센터인 사법적그룹홈 14곳을 출범시켰다. 저서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이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가 있다. 부산 금정평안교회 피택장로. 

부산=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국민일보, 2015/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