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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령 목사 방지일 별세, 향년 103

하마사 2014. 10. 11. 10:29

100세까지도 전국 달려가 祝禱(축도)한 '영원한 현역'

한국 최고령 목사… 성경·기도 강조
개신교 각 교단 모이는 자리 좋아해

2007년 5월 목사 안수 70주년을 맞았을 때의 방지일 목사 모습.
       2007년 5월 목사 안수 70주년을 맞았을 때의 방지일 목사 모습.
       /이명원 기자
한국 최고령 목사인 방지일(103) 영등포교회 원로 목사가 10일 새벽 서울 고려대안암병원에서 별세했다.

1911년 평북 선천 출신인 방 목사는 한국 개신교계의 살아 있는 역사였다. 1930년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병아리 전도사로서 평양대부흥(1907년)의 주역 길선주 목사를 모셨고, 장로회신학대에선 전설적인 마포삼열(사무엘 마펫) 선교사에게 배웠다. 1937년 중국에 파견돼 공산(共産) 치하 9년을 포함해 20년을 활동했고, 귀국 후엔 영등포교회 담임목사(1958~1979)를 지냈다. 교계에서도 예장통합 총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기독공보사 사장·이사장을 역임했다.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도 현역이었다. '닳을지언정 녹슬지 않겠다'는 신조로, 원로 중의 원로임에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100세까지도 부르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한 해 넉 달은 해외 선교 여행을 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배워 고령에도 이메일로 일정을 체크하며 지난해 말까지도 여러 자리에서 축도(祝禱)했다.

그가 특히 좋아한 자리는 개신교계 각 교단의 연합 행사였다. "오늘 우리 모습을 보시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2008년 9월 방 목사는 제주도에서 열린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장, 예장합신 등 장로교 4개 교단이 오랜 분열 끝에 한자리에 모여 제주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한 예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37년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만 해도 장로교가 하나였다"며 "1959년 당시 예장이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될 때 우체국에서 사방으로 전화해 말리며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평생 강조한 것은 '오직 성경' 그리고 '기도'였다. 그는 "20대 때 모셨던 길선주 원로 목사님은 부흥회 때 꼭 성경 공부를 중심에 놓았다"며 "그런데 1957년 중국서 귀국해 보니 성경 공부는 사라지고 '심령부흥회'가 됐더라"며 감성에 치우치는 부흥을 경계했다. 진정한 부흥은 진지한 성경 공부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기도는 '죄를 찾는 현미경'이었다.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병원이 필요 없듯이 죄 없는 사람은 안 믿어도 되는데, 깊이 생각해 보면 '나는 죄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다 보면 현미경의 렌즈가 맑아지면서 평소엔 보이지 않던 작은 죄도 찾아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평소 한국 개신교의 위기론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밥 굶는 목사의 대를 아들이 잇고, 영적으로 갈증 나서 갈팡질팡하는 양(羊)들을 목자(牧者)들이 잘 먹인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빈소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예배 14일 9시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02)2227-7500

 

 

-조선일보, 201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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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고령 목사 방지일 별세, 향년 103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자 기독교계 최고원로 목사인 방지일(영등포교회원로) 목사가 10일 새벽 성북구 인촌로 고대안암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3세.

지난 9일 오후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방 목사는 이달 초까지도 북한 선교를 위한 기도회 행사에 참석하는 등 외부활동을 이어왔다. 지난해 3월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설교하기도 했다.

방 목사는 1911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목사 방효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천 신성중학교와 평양숭실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재학 당시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일하다가 1937년 졸업과 함께 목사로 안수 받았다. 1957년까지 중국 선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일본은 대동아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입을 강요했는데 방 목사는 이를 거절한 바 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북한으로 추방될 위기에 처했으나 서방 언론을 통해 최후까지 남은 기독교 선교사로 소개돼 1957년 한국으로 와 영등포교회에 부임했다. 1979년 영등포교회의 목사직에서 은퇴했다.
예장통합 총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 한국교회연합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 200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2010) 등을 썼다.

한국교회협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한국교회의 존경받는 큰 어른을 잃었다는 슬픔과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면서도 "슬픔과 애통함에 잠기기보다 방 목사님이 한국교회에 남긴 보석같이 빛나는 발자취가 헛되지 않도록 건강한 한국교회가 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한국기독교회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 아들 선주 씨 부부와, 딸 선자 씨 등이 있다. 14일 장례예배가 한국기독교회장으로 치러진다. 장지는 춘천 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