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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훈 디지털뉴스본부 차장
이달 초 백악관에서 1차 대전 참전 용사 2명에 대한 훈장 수여식이 있었다. 100년 전 군인의 공적을 찾아내 서훈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한 짧은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은 영웅을 기억한다"고 했다. 100년 전 영웅은커녕 바로 한두 해 전의 영웅들마저 잊고, 그들이 남긴 숭고한 가치를 공유하지도 않는 우리 실정을 생각하니 착잡했다.
영웅을 찾아내 기리고 교훈을 역사에 남기는 데 있어 미국은 세계 으뜸이다. 6·25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이 84회 생일을 맞은 1964년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이런 축전을 보냈다. '귀하는 금세기 미국의 의심할 여지없는 영웅입니다.' 이는 노(老)장군 혼자 듣기 좋으라고 한 찬사가 아니었다. 축전 내용은 당연히 뉴스를 탔고 미국인들에게 영웅의 존재와 그가 이룬 위국헌신(爲國獻身)의 가치를 새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국은 승리의 역사뿐 아니라 치욕스러운 경험에서도 영웅을 찾고 교훈을 캔다. 3000명 넘게 죽거나 실종된 9·11 테러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비극의 현장에서 인명을 구해낸 소방대원들의 활약을 담은 기념우표를 만들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 붕괴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피눈물만 흘리지 않고 '영웅 구역'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곳에서 피어난 인간애와 시민 정신을 기렸다. 야당도 허술한 항공 보안을 책임지라는 식으로 여당을 물어뜯지 않았다.
미국의 영웅 찾기는 미국인에게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로 사분오열된 채 1년을 허송하는 사이 필라델피아에 있는 '포 채플린스 메모리얼 재단(FCMF)'은 참사 당일 학생과 승객을 구하다 숨진 단원고 최혜정 교사와 세월호 승무원 박지영씨를 찾아내 '골드메달'을 수여했다. 우리 입장에선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부끄럽고 안타깝다.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을 때도 우리는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여섯 전사자를 쉽게 잊었다. 그런데 대통령조차 추모식을 외면하는 나라를 2년 뒤 6·25 참전 용사 출신 미국인들이 찾아와 해군 2함대사령부에 마련된 전적비에 헌화했다. 참석자 대표 프랜시스 캐롤씨는 "한국인의 영웅은 미국인의 영웅이기도 하다"며 "미국에 돌아가 많은 이들에게 영웅들의 존재를 알리겠다"고 했다. 남편과 아들이 목숨을 바쳐 일깨운 호국 정신이 수장(水葬) 당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유족들은 그 말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9·11 테러 당시 소방대원과 시민의 활약을 취재해 논픽션 '영웅들'을 쓴 르노 스코멀은 이 책을 "미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만든 이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우리에게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게 해줄 영웅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제2연평해전의 상처에서 호국 정신의 꽃을 피워낸 여섯 용사도, 세월호의 비극을 헌신 이야기로 탈바꿈시킨 단원고 교사들과 승무원 박지영씨도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우리 영웅들의 희생을 남의 나라 사람들이 먼저 기억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우리 역사에서 더는 영웅을 볼 수 없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조선일보, 201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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