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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決斷

하마사 2015. 6. 24. 10:05

한·일 경색, 國益·歷史 비춰 결단 내리는 게 대통령 할 일
강대국들 판치는 동북아에서 自强論은 비현실적 형식논리
대한민국 살아남기의 핵심은 주변 정세에 임기응변하는 것

 

한·일 관계의 경색은 이제 논리나 이성(理性), 타협이나 양보 등 순리(順理)로 해결할 단계를 넘었다. 일본의 식민 침략과 위안부 등 만행에 대한 내외의 수많은 문제 제기에도 일본 아베 정권은 눈과 귀를 닫은 채 오불관언이고 한국은 일본의 이런 안하무인적 태도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그 사이 한·일 관계는 경제는 물론이고 민간 차원까지 얼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미래 지향적으로 협력하자"고 나선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다. 우리로서는 오래 고민해왔다. 모든 조건과 조짐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여건에서 대통령은 심사(深思)할 만큼 심사했고, 숙고(熟考)할 만큼 숙고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한·일 관계 경색을 계속 방치해도 비난받을 것이고, 정상화의 결단을 내려도 반대 세력의 질책을 받게 돼 있다. 그렇다면 그는 국익과 역사 앞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다. 국민은 역경(逆境)에서 내린 그의 결정을 그렇게 평가할 것이다.

일본은 한·일 관계 경색 사태를 의도적으로 길게 끌고 가려는 듯하다. 어느 쪽이든 자기들은 손해날 것이 없다는 투다. 그리고 이 기회에 '한국을 손보겠다' '한국의 기를 꺾겠다'는 의도가 역력하다. 게다가 중국의 팽창주의로 동북아의 정세가 재편되고 있는 과정에서 일본의 강력한 존재감과 방어적 위치가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점을 한껏 이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한국이 제기해온 역사 인식, 식민 전쟁, 위안부 등에 묶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이번 기회에 그런 '부끄러운' 과거 논란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전략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입장은 난처했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浮上)이 위협적인 상황에서 2차 대전 때 '진주만'과 수십만 미국인 목숨까지 덮어둔 마당에 한국의 '역사 인식'과 위안부 문제로 한·일이 냉랭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한반도를 둘러싼 지난 100년 역사에서 우리가 목도했던 '강대국의 논리'다.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에 분노할 수는 있어도 그들 논리의 흐름을 막거나 그들의 게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약소국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한·일 문제에 관한 한 여론조사에는 책임이 없다. 여론에는 힐난과 울분과 분노만 있지 해결책이 없다. 여론의 한 단계 위로 국론(國論)이란 것이 있지만 국론이라고 만사형통인가? 여론은 민간 차원의 의견이지만 국론은 거기에 지도층의 생각을 얹은 것뿐이다. 현 체제에서 관료는 창의가 없다. 영혼이 없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정치인은 결국 표에 매달린 표의 포로다. 여론이나 국론은 옳지만 항상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류성룡의 '징비록'에서 새삼 많은 것을 배운다. 한국인들은 '징비록'을 끝까지 읽기 힘들다. 분노로 책을 덮고 한숨으로 행(行)을 건너뛰기를 수없이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책을 덮어서는 안 된다. 우리 국민은, 그리고 우리의 최고 지도자는 거기서 사대(事大)의 명분과 당파, 지도층의 무지와 무능에 내맡겨진 나라가 어떻게 나락에 떨어졌는지를 배워야 한다. 임진왜란이 있은 지 5년 뒤 왜 다시 정유재란인지, 명(明)은 우리를 어떻게 수탈했으며, 왜(倭)는 왜 다시 왔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난세(亂世)는 언제건 재발하게 돼 있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사람들은 자강론(自强論)을 내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강을 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는가. 지금 형편으로는 자강은 또 다른 형식논리일 뿐이다. 복지 만능주의에 빠져 지갑이 텅 빈 나라, 돈 먹을 데가 없어서 무기를 만들고 사오는 데서 돈을 뜯어먹는 썩은 군인, 자기 나라를 지킬 해군기지 하나 만들지 못하게 하는 종북 좌파, 자기 나라에 주둔하는 외국군의 주둔비조차 못 내겠다는 반대자가 널려 있는 나라가 과연 무슨 자강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우리가 살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은 잘 가려서 줄서고, 주변 정치에서 때로는 교활하리만치 기회주의적이고 임기응변적으로 대처하는 일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살아남기'의 핵심이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역사 인식에서, 진실 면에서, 명분에서 갑(甲)이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에 대해 경제력에서, 현실 외교에서, 외교력에서 우세하다. 진실과 명분은 국제적 현실에서는 항상 갑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현실의 쟁점을 넘어 정상화의 길을 결단할 때 일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러면 그렇지'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인가, 아니면 '한국을 결코 어수룩이 볼 것이 아니구나'일까?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2015/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