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막내딸이 다니는 중학교의 학부모 회의를 갔다. 선생님이 학교의 여러 프로그램을 소개하면서 '26가지의 친절한 행동(26 acts of kindness)'에 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은 2년 전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亂射) 사건에서 희생된 26명을 기리는 시민운동이다.
사건 후 미국의 유명한 아시아계 여기자 앤 커리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모든 사람들이, 희생된 각각의 귀중한 생명을 위하여 한 가지씩 친절한 행동을 하겠다는 각오를 한다고 상상해보세요. 함께 하시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친절한 행동을 시작했다. 터널 통행 요금을 낼 때 뒤차 통행료까지 내주거나, 자기 차 주변 주차비를 대신 내주거나, 뜨거운 커피를 끓여 동네 소방서에 제공해 주는 등이었다. 순식간에 이 운동이 퍼졌고 몇 주 안 돼 100만명 넘게 동참했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은 미국 전역뿐 아니라 해외까지 확산됐고,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확장됐다. 기업들도 운동에 동참했다. KLM 항공사는 체크인한 고객의 소셜 미디어 활동을 보고 고객에게 필요한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영국으로 관광 가는 젊은이에게 만보기를 주는 등 작은 감동을 선사한 것이다.
학부모 회의가 끝나고 선생님에게 왜 중학교가 이런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면 아이들도 TV나 대중 매체를 통해서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뭔가를 해서 사회를 바꿀 수 있고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줘야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친절한 행동을 하나씩 하면서 인터넷에 올린다. 한 아이는 수퍼마켓 주차장에서 할머니의 차에 물건 옮기는 것을 대신 해주고 다른 아이는 감기 걸린 이웃 아줌마의 집 안을 청소해 준다. 인터넷에 올린 이야기와 사진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은 눈부시게 밝다.
서양 명언 중에 "좋은 위기를 허비하지 말라(Never Waste a Good Crisis)"는 것이 있다. 위기를 통해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해결 방법을 찾게 된다는 얘기이다. 물론 보통은 경제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지금 우리 상황에도 적용될 듯하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이라는 비극을 그냥 허비해 버린 것은 아닐까? 이 비극을 극복할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은 없을까? 단지 관련되는 법을 새로 제정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해결 방법은 아닐지라도 수동적인 나 자신을 떨쳐버리고 창의적인 모방을 해보기로 했다. 최근 잠깐 귀국했다가 돌아오면서 기침하는 공항 카운터 직원에게 레모네이드, 사탕, 목 캔디를 살짝 건네줬다. 그리고 오랜만에 트윗을 하면서 '친절한 행동 #1'이라고 썼다. 카운터 직원이 좋아하기도 했지만 돌아서는 내 얼굴에는 더 큰 행복이 깃들었다. 앞으로 남은 25개 친절한 행동은 무엇으로 할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손지애 미국 남가주대 방문학자·前 아리랑국제방송 사장
-조선일보, 201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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