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 18:27~36
제목: 장애물을 넘는 믿음
올림픽종목 중에 100미터 허들경기가 있습니다. 그냥 달려도 힘든데 허들을 중간 중간에 놓고 그것을 넘어가도록 한 장애물 경기이지요. 만약 하나라도 넘지 않고 골인하면 1등을 해도 무효가 되고 맙니다.
허들처럼 보이는 장애물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장애물도 있습니다. 보이는 장애물은 넘어갈 수도 있고 혹은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장애물은 극복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한 교육학자는 자신의 세 아이들이 기어 다닐 무렵에 그들 앞에 장애물이 있을 때 나타나는 태도를 관찰하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의 태도는 장애물이 있을 때 주저앉아 버리는 체념형으로 가장 소극적이고 비생산적인 태도입니다. 두 번째의 태도는 장애물을 피해 다른 데로 돌아가는 도피형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남들로부터 동정과 인정을 받으려 하고 스스로는 십자가를 안지는 태도입니다. 세 번째의 태도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전진하는 가장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적극적인 태도에는 두 가지의 동기가 있는데, 하나는 무엇이 진로를 막아 기분 나쁘다는 감정으로서 “투쟁형”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 참 재미있다고 “호기심”으로 도전하여 장애물을 장난감으로 삼고 앞에 놓인 어려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경우입니다. 야고보가 시련을 당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한 말씀그대로입니다. 조개가 모래알을 받아들여 진주를 만들 듯이 믿음으로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일 때 황금보다 더 값진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장애물을 넘는 믿음은
1.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믿음(27~28절)
27-28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어둠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빛으로 밝히고 인도하십니다. 곤고한 백성은 ‘악인에게 고난당하는 의인’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산상수훈에 ‘심령이 가난한 자’로 번역되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악인의 핍박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겸손히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축복이 있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본문의 곤고한 백성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단순히 어려운 상황에서의 구출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축복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믿음으로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교만한 눈을 낮추십니다. ‘교만한 눈’이란 표현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세상의 힘 있고 교만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계시다가 철저하게 낮추십니다.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을 낮은 신분으로 강등시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높이시는 것과는 반대되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까지 사울의 칼과 창을 피해서 어두운 광야를 헤매야 했고 깜깜한 동굴과 같은 곳에 자신의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적국인 블레셋에 망명하여 미친 척도 해야 했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꿈꿀 수 없는 암흑과 같은 현실이었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후에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밤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영롱하게 빛나게 됩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에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등불이 밝게 빛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고통과 어둠이 사방을 가로막아 캄캄해 질 때가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둡고 곤고한 상태에 있어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둠을 밝히시고 곤고함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화)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와 형을 속였고 결국 형 에서의 칼을 피해 혈혈단신 집을 나와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까지 도피해야 했습니다. 낯설고 힘든 여정을 앞에 두고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야곱이 길가의 돌을 베개삼아 잠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고 그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 약속의 말씀은 동시에 오늘날 험한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할 그 길에 친히 등불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길에 등불이 되시는 한 어떤 장애물이나 구덩이도 우리를 넘어뜨리거나 실족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애물이 당장에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지만 도움이 되는 장애물들도 많이 있습니다. 때때로 인생의 파도가 우리의 전진을 막지만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이 파도를 전진의 수단으로 사용하심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너무 쉬운 길은 축복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재건 공사를 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과 그들을 따르는 대적들이 성벽재건이 완공 될 즈음에 오노평지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느헤미야를 해치고자하는 속셈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명을 감당할 때 장애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장애물이 없이 순조롭게 모든 것이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의 위인들의 삶에도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하시기 위해서 요셉을 일찍 애굽으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을 만났습니까? 그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이 장애물이었고 보디발의 아내가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장애물들이 결국 사명을 감당케 하는 도구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장애물이 없었다면 요셉이 어떻게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는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애굽에 가서 바로에게 이야기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바로라는 큰 장애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10가지 재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가 싶더니 홍해가 가로놓이고 광야가 나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일당이 모세를 대적하기도 합니다. 사람과 환경의 장애물이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세계를 누비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때 장애물이 없었습니까? 유대인들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여행 중에 강과 바다와 시내와 광야의 위험을 겪는 환경의 장애물도 수없이 만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장애물이 따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힘들게 얻은 것은 그만큼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크고 귀한 사명이면 그만큼 더 큰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 앞에 남아있는 어려움과 장애는 더 높은 곳으로 오르게 하는 계단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화)
시이저와 나폴레옹은 인생초기부터 간질병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강한 권력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커다란 장애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존 밀턴은 완전히 맹인이 된 후 최악의 가난 속에서 실낙원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링컨은 여덟 살에 어머니를 잃고 소년가장으로 동생들을 보살피며 극심한 고생을 했지만 결국 자수성가해 미국의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직업 12가지를 가졌었는데, 농부 점원 뱃사공 막노동꾼 군인 우체부 측량사 서점주인 변호사 주의원 상원의원 대통령입니다. 잔다크는 농부의 딸로 글을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했으나 프랑스를 구했습니다. 이들 모두가 장애물을 극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모든 장애물을 넘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30절)
30절,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구원과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이미 성취하셨고 지금 성취하고 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이 곧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병든 자도 고치고 귀신도 물리치셨습니다. 죽은 자도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능력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복을 누리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의 길과 행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길과 행하시는 일들은 완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합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에서도 변함없다는 강한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다윗은 어려움 중에도 말씀을 붙잡고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이 방패가 되셔서 보호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적군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가로막힌 담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행동이 삶속에 분출되어 나옵니다. 어린 다윗이 거인 장수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설 수 있었던 용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동 다윗이 위대한 다윗왕이 될 수 있었던 출발점은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설 수 있었던 용기였습니다. 그 용기의 출발점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화)유라굴라 폭풍 속에서도 안심했던 바울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도중에 유라굴라 광풍을 만났습니다. 짐을 바다에 던지고 배의 기구를 버렸습니다. 14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구원의 작은 희망조차 사라졌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생을 포기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도 바울 사도는 담대했습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말씀하신 그대로 되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반드시 한 섬에 걸려 살게 될 것이라고 확신 있게 선포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포기하는 상황에서 바울사도만은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반드시 살게 될 것이라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합니다. 별이 어두울수록 빛나듯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의 빛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교회가 어려울수록 믿음의 사람이 빛을 발합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절망하는 상황에서 우뚝 서서 구원을 선포하고 소망을 던집니다.
영적 장애물이라 할 수 있는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 우는 사자처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영적 장애물인 마귀를 대항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구원의 투구, 의의 흉배,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허리띠, 복음의 신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공격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세 번 받으셨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보이는 것이든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이든 어떤 형태의 장애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장애물을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죄의 장애물은 우리 스스로 넘을 수 없는 것이기에 주님이 십자가로 죄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혼자 넘을 수 없는 장애물들도 있지만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정면으로 부딪혀 장애물을 제거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은 죽습니다. 육신은 살아서 숨을 쉬고 활동을 해도 영혼은 갈급하여 죽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혼이 사막으로 변합니다. 아모스 8: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곳이 영적인 사막이고 광야입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육체가 죽듯이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혼이 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에스겔 37장에 마른뼈의 환상이 나옵니다. 에스겔선지자가 에스골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에게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명령을 대언하니 마른 뼈가 움직여 뼈들이 연결되었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자 마른 뼈들이 살아나 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마른 뼈가 연결되어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말씀이 들려지면 살아납니다. 소생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심령에 잘 박히면 생기가 돌고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났지만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할 때 죽은 자가 수족을 동인 채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말씀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는 역사가 있고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3. 하나님의 승리를 믿는 믿음(33절)
33절,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성경에서 사슴은 사랑스러움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군사적 의미에서의 신속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본문은 자신을 사슴과 같이 민첩하게 하셨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 도피생활을 하는 다윗에게 가장 큰 위협은 자신을 쫓는 사울이 거느리는 대규모의 정규군이었습니다. 산지와 협곡이 많은 이스라엘의 지형을 감안할 때 이들 정규군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속하고도 민첩한 움직임이 필요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그와 같이 만들어 높은 곳에 세우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들보다 높은 곳에 세우시고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케 하셨을 뿐 아니라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수행하게 함으로 승리케 하신 것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대적들을 상대로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 이라는 뜻으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르비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아말렉 족속에게 승리를 거둔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모세가 세운 단에 붙인 이름입니다.(출17:15)
아말렉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대전한 첫번째 전쟁이었습니다. 아말렉이 먼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이 아말렉인들은 장자의 유업과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긴 에서의 후예들로서 그들은 항상 이스라엘인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아론과 훌을 세우셔서 아말렉의 갑작스런 공격을 격퇴하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아말렉의 공격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모세와 여호수아였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총 지휘관을 삼아 전쟁터에서 싸우게 했습니다. 또한 모세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아론과 훌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모세의 손에는 출애굽 당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최초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는 이스라엘의 승리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으며 이 사실을 책에 기록하도록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하였습니다.
산꼭대기에 앉은 모세의 손에 들린 하나님의 지팡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깃발, 승리의 깃발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신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마귀는 전쟁에서 패했지만 국지적으로 저항을 하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신 싸움을 개인의 삶의 전선에서 승리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예화)세르비아 테니스 3총사: 조코비치, 얀코비치, 이바노비치
지금 영국에서는 윔블던테니스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테니스 동호인들의 이목이 영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테니스선수들 중에 세르비아 테니스 3총사가 있습니다. 조코비치, 얀코비치, 이바노비치입니다. 1990년대 인종 분쟁과 내전, 나토의 공습으로 완전히 무너진 세르비아가 이런 선수들을 배출한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르비아 테니스협회 직원은 10명을 넘지 않으며 "승합차 한 대가 협회 재산의 전부"라고 말할 만큼 재정도 열악합니다. 얀코비치와 이바노비치의 지도자였던 센티크 코치는 "전쟁으로 피폐한 환경이 선수들을 더욱 강하게 길러냈다"고 강조했습니다.
선수들이 가난에서 탈출하고, 보다 좋은 여건을 찾아 해외로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훈련했다는 것입니다. 얀코비치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코트에서 전쟁을 치릅니다. 상대가 누구이고 랭킹이 몇 위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폭격 속에서 훈련했던 이바노비치도 "우리는 강한 정신력의 투사들이며, 기회가 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전쟁과 같은 고난이 오히려 승리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담대해야 합니다. 환난을 당하고 고난과 역경의 현장 속에서도 절대로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마귀나 열악한 환경 앞에 무릎 꿇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승리하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장애물을 넘는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승리를 믿는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