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성'이라 놀려도 웃으며 넘어섰죠
내 인생 스코어는 3대1
하하하, 한골 먹었어요… 2부리그 강등됐으니까
2류 콤플렉스 극복
맨유 일부 팬들은 늘 날 괴롭혔죠 "그게 현실… 조연으로 잘하지 뭐"
골보다 동료들 위해 희생했더니 나중엔 '소리없는 영웅'이라 칭찬
몸집
체격 왜소해 맞고 컷지만 마음만은 병들지 않았죠… "기술로 보여주마" 이 악물어
중·고시절 열등감 162cm 키, 대학때 176cm로 기적 성장
조롱
맨유 계약서 사인 직후부터 티셔츠판매용 비난 쇄도했죠
체력훈련 자청, 파워 키웠죠… '3개의 폐 가진 남자'로 불려
2015
난 정상에서 내려오는 선수, 2년후 현역생활 마감 계획…
10년후엔, 축구행정가로 막 첫발 내딛고 있겠죠
- 최근 만난 박지성은 성공 비결에 대해“'나는 나를 믿는다'▔'그라운드에서 제대로 된 나를 보여주겠다'는 긍정적인 힘이 나를 키웠다”고 말했다. 경기도 수원 박지성축구센터 내 기념관에서 그는 가장 좋아하는 국가대표‘넘버 7’유니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그렇다면 이 남자는 어떤가. 야구 마운드를 떠나고도 여전히 '핫'한 남자 박찬호(40). 최근 에세이집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를 발표한 그는 '느끼하고 까칠'해 보이던 면모와 달리 의외로 수더분하고, '날라리'가 아닌 '악바리' 같은 속내를 비쳐 그간의 비호감을 모두 호감으로 바꿔놨다.
한국 스포츠 양대 산맥을 대표하는 둘에겐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어린 시절 '촌놈'이란 별명을 달고 다녔고, 유별난 발음과 말투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들의 진짜 공통점은 따로 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것. '2류 촌놈' '냄새 나는 아시아인'으로 구박받았던 이들은 인내와 끈기로 '때'를 기다렸다. 뚜렷한 목표 의식은 수많은 경쟁자를 누르고 결국 아시아 최고 선수 자리까지 오르게 했다.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들을 괴롭히던 콤플렉스에 어떻게 'KO'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주말 섹션 Why?가 박지성과 박찬호를 각각 만나 지금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그들만의 비결을 들었다.
◇성공하는 사람에겐 긍정의 힘이
지난 2005년 가을 런던 특파원이던 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장에서 박지성의 경기를 취재했다. 그때 관중석 어디서부터인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박을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한두 명이 일어나 '박, 박' 목소리를 높이더니 어느새 6만여 관중이 하나가 돼 합창했다.
"Park, Park, Wherever you may be, You eat dogs in your home country. But it could be worse, You could be a Scouse, Eating rats in your council house.〈박(지성), 박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희 나라에선 개를 먹는다고 했지. 하지만 그건 주택가에서 쥐나 잡아먹는 리버풀(스카우스) 녀석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일이야〉"
그해 영국 최고 구단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박지성을 향해 팬들이 처음으로 바친 선물은 바로 '개고기 송'이었다. 박지성 응원가였다. 맨유 팬들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리버풀에 대한 적대감을 담기 위해서였지만 애꿎게도 한국의 '개고기 문화'가 비교 대상이 된 것이다.
최근 상하이에서 열린 '박지성 자선 경기'장에서 그를 만나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처음 경기장에 퍼졌을 땐 그게 저를 위한 노래인 줄도, 무슨 뜻인지도 몰랐어요. 라커룸에 있는데 동료가 '야 네 노래야' 그러더라고요. 그런 게 생겼다는 게 처음엔 마냥 좋았죠." 그게 논란이 된다는 건 얼마 뒤에야 알았다. 한국 언론에선 '인종차별'이라느니,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조롱이라느니 온갖 비난과 우려가 쏟아졌다.
성공하는 사람에겐 긍정의 힘이 있다. "나쁜 의도요? 홈 선수한테 설마요. 상대를 비하하기 위한 노래라 거부감이 없었는데, 아쉽게 생각하는 분이 많더라고요. 문화 차이고 생각 차이라 생각하니까 나중에 익숙해졌을 땐 오히려 안 불러주면 서운하고. 하하." 아니나 다를까, 이 노래 덕분에 박지성이 뜬 것인지, 박지성 덕분에 이 노래가 뜬 것인지 앞뒤는 불분명하지만 둘 다 확실히 뜨긴 떴다.
- 8년 전인 2005년 프리미어리그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만났던 모습보다 박지성은 한결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소속팀이 2부 리그 강등된 데 대해“무실점 방어 인생이었는데 한 골 먹었다”며 크게 웃어넘겼다. /김연정 객원기자
지난 2월이었다. QPR로 이적한 뒤 맨유와 벌인 경기에서 원정 온 맨유 관중석에서 '개고기 송'이 다시 흘러나왔다. "아직 날 생각해주네. 7년을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개인적으로 굉장히 고마웠어요." 순간 등골이 찌릿함을 느꼈다. "돌이켜 보면 축구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 경험을 해본 시간이었죠. 솔직히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선수가 얼마나 되겠어요."
◇몸집 자체가 콤플렉스였다
전라남도 고흥군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 병치레도 잦았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잘 놀고 자다가도 갑자기 경기를 일으켜 병원에 실려가기 수차례였다. 어머니는 그를 포대기에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다 혹 아이가 잘못됐을까 주저앉아 혼자 울기도 했다. 그렇게 비실대던 아이가 오늘날 '산소 탱크'로 성장하리란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항상 몸이 약했죠.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공이라도 차는 날이면 부모는 다치지 않을까 걱정부터 했죠. 왜소한 몸집은 어릴 때부터 콤플렉스였어요.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죠. 난 내가 약하다고 해서, 왜소하다고 해서 축구를 못할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 안 했어요."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자라지 않는 키 때문이었다. 중학교 졸업할 때 키가 162㎝. 동료보다 한 뼘 이상 작았다. 인근 학교 운동부 선배들은 그가 허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심심치 않게 폭력을 행사했다. 전신에 멍이 들어 열병을 앓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까지 멍들진 않았다.
"누굴 원망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운동장에서 그걸 보여주자고 했죠. 체격이 문제라면 기술로 겨루자고 결심했어요. 축구공이 마치 내 몸처럼 되게 하자고."
초등학교 시절, 적어도 발끝에 3000번씩 공이 닿아야 감각이 생기고, 다시 3000번이 닿아야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는 선생님의 말에 친구들과 노는 일도 없이 쉴 새 없이 공을 굴렸다. 축구공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꿈은 국가대표였다. 박성종씨는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한번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끝까지 가야 된다. 중도 포기하지 마라."
착했기 때문에 버텼을 것이다. 사춘기 반항 한 번 없었다. 그랬던 그 아이가 '일찍 들어오라'는 부모의 당부도 잊은 채 별이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 들어온 날이 있었다. 그 옆엔 흙 묻은 축구공이 함께했다. 아버지는 그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처음이자 마지막 손찌검이었다.
"분명 축구하다 온 건 아는데, 부모와 한 약속은 지키라고 당부했지. 철두철미하게 시간 지켜라. 성실한 태도 가져라. 축구에 방해되는 건 하지 마라. 자만하지 마라." 그 이후 박지성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통금 시간 9시를 넘긴 적이 없다. 박지성은 "아버지 말씀도, 선생님 말씀도 '하지 마라'는 걸 단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중학교 2학년 올라갔을 때 회사도 그만두고 정육점을 차렸다. 없는 살림에 아들에게 좋은 고기라도 먹이고 싶어서였다. 박지성은 속이 깊었다. 축구화 바닥의 봉을 갈아 끼우며 신고 또 신었다. 키 크는 데 좋다는 개구리즙도, 사슴 피도 아버지가 구해다 주는 건 군말 없이 먹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162.5㎝였던 그의 키는 비약적으로 성장해 대학 입학 당시 176㎝까지 컸다.
◇개 이름을 '한골'로 정하다
박지성은 '꿈'을 이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외치던 '태극 마크'도 달았고, '꿈의 구장'이라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이 됐다. 그저 최고의 팀에서 최고 감독·선수들과 뛸 수 있다는 게 행복했는데, 그곳에서 7시즌이나 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구단에서 집을 사라는 것도, '혹시나' 해서 계속 전세로 살았다. "언제 쫓겨날지 몰랐으니까. 하하."
호탕하게 웃는 그였지만 '1류 속 2류'로 취급받는 듯한 콤플렉스는 항시 괴롭혔다. 일부 그를 헐뜯는 팬들은 '벤치 워머(warmer)' '벤치성'이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아버지 박성종씨는 이렇게 말했다. "지성이는 티를 안 내려 했죠. 얼마나 속으로 아팠겠어요. 오죽하면 우리 집 개 이름이 '한골'이겠냐고요." 4년 전부터 키우던 개라고 했다. 한 골만 넣자는 염원이 담겼다.
4년 전이면, 2008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 이후다. 시즌이 끝난 뒤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은 "박지성을 결승전에서 제외한 게 시즌 중 가장 마음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골 결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이 올 때마다 "경기 중 일부"라며 태연한 척했던 박지성이 처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 잉글랜드 데뷔골후 2005년 12월 20일 영국 버밍엄에서 열린 버밍엄시티와의 칼링컵 8강전서 잉글랜드 데뷔골을 터뜨린 뒤 포효하는 박지성. /AP
그는 '주연'이 아니라면 '조연'으로 최선을 다하자 생각했다. "골을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고의 장면이 연출되는 게 중요하니까. 최고를 만들어주자고 생각했어요." 퍼거슨 감독은 공간 장악 능력은 박지성이 구단 내 최상위권이라고 자주 언급했다. 7시즌 동안 그의 패스 성공률은 89.5%였고, 회당 패스를 28.5회 했다. 일부는 "골 욕심이 너무 없다"며 나무랐지만, 팀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은 감독뿐만 아니라, 참으로도 냉정했던 영국 언론을 사로잡았다. 골을 안 넣은 것도 아니다. 7시즌간 205경기 출전에 27골 기록. 그에겐 'unsung hero(소리 없는 영웅)'란 별명이 붙었다.
◇놀림을 실력으로 극복하다
그도 처음부터 이렇게 인정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보도가 날 때부터 '티셔츠 판매용'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떨쳐내고 싶었지만 쉽게 떨어지진 않았다.
이뿐이 아니었다. 관심의 대상이 될수록, 그는 '별난 종족'으로 비치기 일쑤였다. 개구리를 달여 먹었다는 이야기는 영국 언론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고, 일부에선 그를 '미개인' 취급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개고기 송'으로 시끄러웠던 판에 개구리 얘기까지 나왔으니 쉬이 놀림감이 됐다. "워낙 아시아 축구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축구 역사를 보더라도 아시아 선수가 유럽에서 성공한 사례가 극히 드물잖아요. 평가 자체가 낮을 수밖에 없죠."
공만 잡으면 픽픽 쓰러진다는 비난도 있었다. '왜소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 리그는 이전과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왜소 콤플렉스' 악몽이 또 살아나는 듯했다.
"템포도 너무 빠르고, 체격 체력 스피드 모두 우월했죠. 따라잡는 게 급했어요." 구단에 요청해 웨이트 트레이너에게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하루 한 시간에서 많게는 세 시간까지 운동하며 점차 근육을 늘려놨다.체격이 단단해질수록 기량도, 선수들 간 호흡도 좋아졌다. '폐를 세 개 가진 사나이'란 별명이 붙었다. "일주일 90분 경기를 위해 나머지 6일 동안은 축구만 생각했어요. 그렇게 힘들었을 때 어떻게든 혼자 이겨내려 했죠.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 나라고 생각하고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2012년 2월 6일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맨유 통산 200경기 출전이란 기록을 이룬 뒤 그는 구단 홈페이지에 이렇게 밝혔다. "이젠 나를 아무도 티셔츠 판매용으로 보지 않는다." 입단한 지 6년 7개월 만이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맨유가 1878년 창단한 이후 134년 동안 개인 통산 200경기 이상을 뛴 선수는 박지성을 포함해 92명뿐이었다.
그가 점차 프리미어리그에서 존재감을 나타내니 '개구리즙' 놀림은 어느새 '신비의 명약'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 가져오는 보약을 마시는 걸 보고 동료들은 "약물 검사 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웃더니 "나눠 줄 수 없느냐"고 달려들었다. "한국 음식이 스태미나식이라는 소문이 퍼졌죠. 하하. 일부러 저희 집에 와서 밥 먹겠다는 친구들도 생기고,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친구들도 생기고…."
◇"어휴, 10년을 당했는데, 그쯤이야"
그는 '더 뛰기 위해' QPR을 택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결정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시즌 중간에 감독이 교체됐고, 선수단 내분설도 불거져 나왔다. 팀 주장이었던 박지성에게 모든 화살이 돌아갔다. 해리 레드냅 감독 부임 뒤엔 주장 자리도 박탈당하고, 급기야 팀은 하락에 하락을 거듭해 2부 리그로 강등됐다. 그는 "불화는 없었다. 주변에서 확대해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의 비난에 대해선 "어휴, 10년을 당했는데. 그쯤이야" 하며 웃었다.
하지만 팀에 대한 애정은 조금씩 사라지는 듯했다. 아버지 박성종씨의 말이다.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선수 편의를 봐주는 게 없으니까…. 7월 1일 (기)성용이 결혼식이 있잖아요. 그것만 참석하고 하루 늦게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곧 죽어도 30일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어떤 감독은 마음의 안정 찾으라고 일부러 휴가도 보내줬거든요. 안 그래도 다들 (팀을) 떠나라 하는 마당에…."
최고 구단에서 최고 대접을 받다 2부 리그로 추락하는 것도 자존심 강한 그로서 견디기 힘든 건 아닐까.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프로 첫 시즌 2부 리그 강등을 경험했기에 새삼스럽지도 않다고 했다. 한국에서 그는 대학때까지 '2류' 취급을 받았고, 2000년 일본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한 그해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는 경험을 했다. "2부 리그 팀과 경기를 안 해봤던 것도 아니고 더 밑 팀과도 해봤기 때문에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잔류를 하든, 다른 팀으로 떠나든 안정적으로 출전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축구 인생 후반전 막판, 스코어는 3대1
처음 프리미어리그를 밟았을 때 긴장감으로 콧잔등에 쉬이 땀이 맺히던 풋풋했던 청년은 어느새 후배의 앞날을 돌보고 자신의 미래를 담담하게 그리는 연배가 됐다. 선수 생활도 2015년쯤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10년 뒤는 축구 행정가로 막 발을 내디딘 시점일 것 같다"고 말했다.
'언제나 최고여야 한다'며 그를 사로잡았던 강박도 조금씩 사라졌다. 최고에서 내려오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망하던 태극 마크도 2011년을 마지막으로 반납했다. "대표팀은 최고 선수로 구성돼야 하는데, 내 몸 상태로 봐서 월드컵이 열리는 2014년에 최고일 거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젊은 선수들이 그 시기에 분명 나보다 좋은 모습을 보일 것이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축구의 구세주도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축구는 한 선수에 의해 모든 것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선수가 그렇듯 평생 계속해서 최고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역시도 지금 어떻게 보면 정상에서 내려오는 선수이기 때문에…. 몇 년 전이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선수 인생을 축구로 표현하면 지금 어디쯤 왔을까. 2011년과 2012년, 같은 질문에 그는 "축구 선수로 큰 성공을 했기에 3대0으로 이기고 있다"고 한결같이 답했다. 여전히 스코어는 똑같을까. "3대 1? 하하하. 한 골 먹었어요. QPR이 (2부로) 강등됐으니까. 후반전 거의 끝 무렵에 온 거 같아요. 4대1 만들기? 그런 욕심은 안 부리렵니다. 하하하"
-조선일보, 2013/6/29
'자기계발 >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프선수 박인비를 만든 사람들 (0) | 2013.07.02 |
---|---|
박찬호, 열등감 딛고 메이저리그 정상에 서기까지 (0) | 2013.06.29 |
영화배우 최은희,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 지 70년… "난, 평생을 진짜 바보처럼 살았어요" (0) | 2013.06.23 |
매주 일요일 전국의 한센인 찾아 33년간 무료 齒科치료 한 강대건씨 (0) | 2013.06.23 |
막노동일꾼에서 변호사로 '승천'한 장승수 (0) | 2013.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