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두려웠다, 한센 환자 입속 들여다보기가…
매주 나랑 싸워 이겼다
이 뽑는데 동료가 그러더라
'당신 얼굴이 창백하다'고
감염될까 무서웠던 게야
장갑도 두 세겹 꼈더라고
1만5000명 진료, 틀니 5000개
병원서 쫓겨나는 환자 본뒤
그 눈빛을 못잊어 봉사 시작
당시 총 40만명이었던 환자
이젠 1만5000명으로 줄었어
"땀과 고민의 결정체가 봉사야, 자신과 투쟁서 찾는 참 아름다움이지"
다들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아내도 친구들도 반대했지
혹시라도 내가 병 걸리면
딸 넷을 어떻게 키우냐고…
봉사가는 내내 늘 기도했어
웃는 모습 보면 못그만두지
노인들에게 틀니해주잖아
어찌나 해맑게 웃는지,
세상 다시 사는 듯 좋아해
기억에 남는 환자?
하나하나 모두 기억나요
봉사는 나의 운명
감기도 금요일이면 낫고
신기하게 일요일은 멀쩡
지금껏 큰병 한번 안앓아
사람의 힘이 아닌 것 같아
건강이 되면 계속 하고픈데
작년에 그만 뒀는데도
계속 연락이 오네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어때, 이 정도면 잘 살았지?
- 그가 앉으면 꽉 들어차는 좁은 작업실에서 강대건씨는 한센 환자를 위해 틀니 5000여개를 직접 제작했다. 33년간 주일마다 한센인을 찾아 지금까지 1만5000여명에게 치과 봉사를 한 그를 향해 사람들은 ‘영천시장의 치과 천사’라 부른다. / 전기병 기자
"아이고, 기왕지사 이리 알려진 거니까, 여기 좀 와 보소. 이 책이 다 한센인 진료기록부예요. 널리 알려지면 뭐이요? 사람들이 여기 병원에 안 올까 봐요? 아이고, 이 노인네한테 새로 오는 것이 아니고, 다 예전 환자라니까. 하루에 하나든 일주일에 한 명이든 와주니 진료 봐야지요. 이게 진짜 마지막 봉사라고. 하하." 듬성듬성 난 백발을 포마드로 곱게 정리한 흰 가운의 남성이 잔 때가 묻은 책자 십여권을 탁자에 늘어놓았다. 연도와 지역, 환자 치료 내용이 일일이 적힌 장부였다. 얼굴에 군데군데 난 검버섯과 늘어지고 주름진 피부는 그에게서 젊음을 앗아갔지만, 대신 세월로 쓴 기록을 남겼다. '33년간의 한센인 치과 의료 봉사.' 들쭉날쭉했지만 빈자리 없는 치아를 내보이며 활짝 웃는 강대건(81) 의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초창기 진료를 다녔을 때만 해도 한센병 환자들이 전국에 40만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젠 1만5000명으로 그 수가 대폭 줄었다. 그가 지난해 전북 고창 진료를 그만둔 것도 그 지역 한센인 환자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그의 마지막 진료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제가 진료를 맡은 전라북도 호암마을 정착촌은 전북 제일 서쪽 위치한 외지로 인구가 40호 정도입니다. 요즘은 한센 환자 등급이 있어 연금이 매달 25만원에서 40만원 정도 지급되죠. 한 칠십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옛날 안 나올 때 비해 지금은 부자 됐다며 혼자 사는 데 괜찮다며 웃으십니다. 동네 한 부부는 농사지으며 못사는 아들에게 도움도 주고 산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이제 환자가 없어서 진료소 문을 닫습니다. 초기엔 몰려와 줄까지 선 상황이라 점심도 굶으면서 진료했던 한센 환우들이었습니다. 30여년 동안 엄청난 국가 경제 발전에 힘입어 지역사회도 사회보장제도 또한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한센 환자 수도 자연 감소로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일요일 치과 진료소를 정착촌에서 철수합니다. 이날을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합니다."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 옆 건물 2층에 있는 그의 치과를 찾았다. 휘황찬란한 LED 간판을 뽐내는 건물 사이에서 구식 페인트칠이 된 소박한 간판이 더 눈에 띄었다. 끼익 하는 철문을 여니 두세 평(7~9㎡) 되는 환자 대기 공간에 낡은 소파와 탁자, 책장과 대형 에어컨이 자리했다. 전체 19평(63㎡) 정도에 치료 공간은 10평 남짓. 월세 40만원짜리라고 했다. '그래도 갖출 건 다 갖췄네'라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니 에어컨에 붙은 딱지가 눈에 띈다. '92년 신제품'.
40년간 이 자리에서 진료를 했다는 그의 치과는 마치 '92년' 그때에 시계가 맞춰진 듯했다. 최첨단 기기들 대신, 위아래 높이만 조정되는 다소 낡은 듯한 구형 진료기 두 대가 치료 시설의 전부다. 손때가 묻은 캐비닛엔 발치용 기기와 구강 거울, 각종 진료 도구가 늘어져 있었다. 캐비닛은 낡았어도 서랍 속 물건들은 광이 났다. 진료대 옆 싱크대에 본을 뜨고 남은 듯한 파란색 물질이 묻어 있는 걸 보니 아직 진료는 하는 듯했다.
- 33년간 한센인을 진료한 기록이 담겨 있는 일지들.
이들을 위한 봉사에 신경 쓰느라 번듯한 병원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난 5월 전국 한센인들은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했고, 이 소식을 들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역시 그에게 감사패를 전했다. 철인(鐵人) 같을 줄 알았는데 그는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의기양양했지. 근데 막상 해보니, 그들의 입속을 본다는 게 너무나도 공포스러웠어요." 그의 말투는 느릿했고, 발음도 가끔 샜다. 단어가 잘 생각이 안 나는지 이따금 눈을 껌뻑이면서 말을 더듬었다. 33년간이나 봉사를 다닌 에너지가 어디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현재 그의 기력은 많이 쇠진해 있었다. 그래도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니 마치 일기를 읊듯 지난 세월의 기억을 하나씩 짚어냈다. 목소리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죽기 직전 '잘 살았다' 생각하고 싶어…
"40대 중반쯤 됐을 거예요. 어느 날 거울을 보는데 '난 대체 몇살까지 살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요즘에야 90세, 100세까지 산다지만 그땐 수명이 원체 짧았으니까, 환갑까지만 살아도 잘 사는 거다 그런 생각이 난 거지요. 우리 아버지도 내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으니…. 죽기 직전 '그래도 나쁘지 않게 살았구나'라며 눈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대학 학비를 대준 이모부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대구 태생인 그는 1950년 6.25가 발발한 뒤 부산에 있는 이모 집에 기거했다. 만석꾼이었던 그의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몰락했고, 당시 부산에서 치과 의사를 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이모부는 아버지 대신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줬다.
1957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을 지낸 뒤 1964년 서울 서대문에 개업했다. "돈이 좀 벌리면 그분들한테 진 빚을 차차 갚아나가겠다고 생각했지. 근데 한사코 조카 돈은 안 받으시겠다는 거라. 뭘 하면 이 마음의 빚을 덜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지요. 그게 봉사였어요. 솔직히 처음엔 나를 위해, 나 좋자고 시작한 거지. 거창한 걸 꿈꾼 게 아니었어."
◇손 장갑을 두 겹 세 겹… 나도 모르게 하얗게 질렸다더라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1975년부터 신학생들과 신부·수녀·선교사 등의 치과 진료를 무료로 해줬다. 그러다 치과기공사의 모임인 '녹야회'를 알게 돼 1979년 5월 나환자촌에 치과 봉사를 나갔다. "하루는 아는 친구 병원에 갔는데, 찾아온 나환자를 보고는 돈을 집어던지면서 내쫓는 거예요. '문둥이 자식, 어디 병원 망하게 할 일 있느냐'며 소리소리 지르는데…. 그 환자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찾게 된 곳이었다. 처음엔 자신만만했다. 기왕 시작한 봉사니 기분 좋게 끝내자고 외쳤다. 하지만 그날 돌아가는 길에 그는 수없이 혼자 되뇌었다. '계속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사람들(한센병 환자) 만나 발치를 하는데, 옆에 있는 기공사가 나중에 조용히 제게 그러는 거예요. 당신 얼굴 창백하다고. 그만큼 공포심이 있었던 거지요. 태연한 척한다고 했는데, 그게 속으론 아니었던 거지. 치과는 진료할 때 입속에 손을 넣잖아요. 치료를 하다 보면 피가 날 수도 있고. 당연히 전염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지." 그때 깨달았다. 어느새 자기 손에 장갑이 두세 겹 끼워져 있었다는 것을….
"그게 말이지요. 내가 내가 아닌 거지요. 공포에 떨고 있는 나랑, 의사로서 환자에게 당당하자는 '두 개의 나'가 있었던 거요. 나도 모르게 내가 손가락 장갑에 수술용 장갑을 덧대고 있었다니까요. 수술용 장갑은 굉장히 얇거든요. 손가락에 상처라도 나면…." 약국에서 미리 구해놨던 두꺼운 장갑이었다. 손가락마다 하나하나씩 끼는 장갑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무슨 오기였을까. 현실에서 도망가지는 않았다. "육안으로 봐서는 양성 환자인지, 음성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그들은 신경 계통에 문제가 생기니까, 코도 납작해지고 눈도 안 보이고 진물이 여기저기 흐르고, 손발 비틀어지고 하거든. 무서웠지. 참말로. 진료하면서 방심 안 하려고 했지요. 처음 한 1년 반쯤 동안엔 그만둘 건가 말 건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 병에 걸리면 내 가정과 병원이 파괴되는 거니까…."
감기에 걸렸다는 그는 이야기 도중 쇤 소리가 섞인 굵은 기침을 수차례 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참말로 미안해요. 내가 젊을 때는 저렇게 봉사도 다녔는데, 지금은 눈도 잘 안 보이고 한쪽 귀도 잘 안 들리고. 이리 노인이 돼 가지고. 아이고." 지난해까지 봉사를 다녔던 그였다. 그때까지를 '젊었다'고 표현한 거다.
- 강대건씨가 첫 번째 진료 노트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십여권의 진료 노트 등을 통해 33년간의 치과 봉사 기록을 남겼다.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그도 인간이다. 아무리 숭고한 뜻을 품고 봉사를 한다지만 실리적인 고민에선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시, 그러니까 30~40년 전엔 개업의들 사이에선 치과 의사는 한센인 치료하면 안 된다, 망한다,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봉사 나갈 때마다 그 걱정 은근히 했지요. 병원 손님 없어지면 어쩌나, 문 닫으면 어쩌나…." 그렇게 주말마다 지방을 다닌 게 30년인데, 손님들은 전혀 몰랐을까?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아니 "그럴 것이다"라고 말을 고쳤다.
"환자들이 우리 병원으로 오는 게 아니고 내가 그들을 찾아다녔으니까. 차마 이 선생이 그런 진료하고 있다고는 생각 못했지. 혹시라도 걱정됐지만 그래도 나한테 그런 일(감염)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것은 무서워할 병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드니, 내 스스로도 환자들에 떳떳할 수 있었지요."
주변의 반대도 그의 내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아내가 마음고생이 심했지. 딸이 넷이 되는데, 만일 내가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쟤들은 어떻게 키우나 그런 생각에 고민도 되고 불안도 하고. 주말마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가면서 내내 기도했어요."
친구들도 그를 말렸다. "만나기만 하면 '너 마누라가 불평하지 않느냐. 가장 맞느냐' 이런 얘기를 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한테 아버지는 내놓은 셈이었지. 노상 밖으로 다니니까. 마누라도 속이 부글부글하지. 돈 되는 일도 아닌데, 몸 망가질 수도 있는데, 누가 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저러고 다니고 있으니까."
친구들은 그를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한두 번 도와준다고 찾아오는 친구도 있었는데, 그게 한 달을 못 가데. 그냥 날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더라고. 근데 그렇게 관심 안 가져주니 마음이 더 편한 것도 있었어요. 봉사라는 게 사람 많으면 가네 안 가네 편이 갈려서…. 하하."
◇거칠었던 그들이 어느새 아이처럼
감염의 공포와 싸우고,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며 그렇게 하루하루가 고민이었다던 그가 또 한 번 벽에 부딪혔다. 의외로 거친 한센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옛날에는 그들 중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이가 많았어요. 밥을 먹는다는 건 예의를 갖추는 거거든? 그런데 나환자들은 노상 배고픈 거야. 식당도 못 가고, 버스도 못 타고, 치과 진료는 엄두도 못 내고. 인간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니까, 그런 한(恨)이 폭력으로 변질되기도 하고…."
잘해준다고 한센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밥도 걸러가며 환자를 봤는데, 오히려 행패를 당하며 혼쭐이 나기도 했다.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참으로 거칠었어요. 자기네가 원하는 대로 안 해줬다고 소리를 지르고, 때리고.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고 생각을 한 거지. 말할 수 없는 저항감이 대단했지요."
그럼에도 그가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할 이유가 그에겐 없지 않은가.
"웃는 모습을 봤어야 해요. 틀니 한 번 해주면, 앞니 두 개만 해 넣어줘도 60~70세 노인이 아이 같이 웃는데, 참말로! 이가 없을 땐 말하는 것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불편해하던 사람들이 이빨 하나 생긴 거 가지고 세상을 다시 사는 듯이 그렇게 좋아하고 기뻐할 수 없어요. 그네들이 정을 못 받아서 그래요. 정을 주면, 맞서지 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정을 주면, 참말로 양같이 순해져요. 그뿐인가. 나중에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고맙다고 눈물 흘리고 절을 하는데,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거지요."
그가 봉사했던 전라북도 익산 천주교 공소의 이양기 총무는 "그의 환자였던 한센인 중엔 완치된 후 그의 의료 봉사를 따라다니며 환자를 돌본 이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저 그들의 아픈 치아를 치료했을 뿐이라지만, 그들의 아픈 마음까지 보듬었던 것이다.
좀처럼 약속 어기는 법이 없던 그가 한번은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약속 시간보다 한참을 늦게 도착한 적이 있었다. 몇이나 기다릴까 했는데 웬걸, 마을 어귀에 수십 명이 모여 그를 향해 손들고 있었다. "나를 향해 뛰어오는데, 아 정말 내가 좋은 선택을 했구나, 이들은 나를 정말 필요로 하는구나, 이제는 나의 친구들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고 다 기억나요"라는 대답만 반복했다. 너무 많아서인지, 그에게 다들 비슷했기 때문인지는, 무언지는 파악하긴 어려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주까지 치료하던 환자가 더는 안 보일 때, 그때 말도 못하게 슬프지요. 죽어서야 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단 거니까."
- 1990년대 말 한센 환자 치료 봉사를 하는 강대건씨 모습. / 본인 제공
그도 처음엔 '죽기 전 후회하고 싶지 않아' 선택한 일이었다. 60세까지만 할 수 있어도, 아니 살 수 있어도 다행일 거라 생각했다. 경기도 의왕의 성라자로 마을을 찾은 지 어느덧 14년. 이미 그의 나이 예순을 넘긴 뒤였다. "그러다 칠십이 되겠는 거예요. 기왕에 한 거 계속하자. 이거 운명이구나 생각했지요. 신기한 거는 감기에 걸려도 목요일, 금요일이면 낫는 거예요. 주일만 되면 멀쩡해지는 거지. 30년 넘게 심한 병 한 번 안 걸리고 그 생활이 조금도 변함없었다는 거. 난 그게 사람의 힘이 아니라고 생각해."
라자로 마을에서 치료를 하다 보니 지방 환자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대구 칠곡가톨릭 피부과에서 한센인을 치료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엔 매주 일요일마다 새마을호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왕복 7시간의 여정. 혈기 왕성한 젊은이도 쉽게 해내기 힘들 일을 이미 60세를 훌쩍 넘긴 그가 10년을 했다. 물론 힘이 들었다. "나 혼자였으면 더 힘들었겠지.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하잖아요. 주변에서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갈 때마다 동네 이장, 동장님들이 항상 환영해 주시고, 자기들이 키운 달걀이며 감자 고구마며 많이 보내줬어요. 어떤 때는 감자 5~6㎏을 손에 쥐어주는데, 가져올 때 힘들긴 한데 또 좋으니까…."
그는 쉴 수가 없었다. 환자들이 항상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대구에 있을 때 경상남북도 쪽 환자를 많이 돌봤거든요. 그랬더니 어느새 전라도 환자들이 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오라고 하니 가야죠. 내가 어딜 가겠어. 하하." 전북 익산·고창, 전남 나주 등 전라남북도의 10개 정착촌을 돌면서 진료를 했다. "이때는 KTX가 생겨 매주 그걸 타고 다녔지. 참으로 30년간 나라도 많이 발전했어요. 이렇게 사회가 발전하면 한센병도 점차 없어지더라고."
◇봉사란 땀과 수고스러움, 고민의 결집체
그의 치과 진료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두 평 남짓한 크기의 작업장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직접 틀니를 만들어 한센병 환자에게 줬다. 예전 학교 다닐 때 기공 일도 배웠다고 했다. "기공소에 맡기면 기공료만 20만~30만원이 나오니까 환자들한테 부담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들자 생각했지. 환자들한테 10만원 정도 받았어요. 일반 치과에서 하면 100만원, 150만원이 넘거든요. 처음엔 무료로 해줬는데, 그러면 봉사 오래 못한다고 주위에서 말려서 5만원 정도 받다가 최근엔 10만원 받았지."
1979년부터 2010년까지 치료비 정산 내용을 보면 31년간 한센 환자 1만4900여명에게 3억6700만원의 진료비를 받았다. 재료 값만 받은 것이다. 그러고도 '남는 돈'이라며 그중에서 1억2400만원을 기부했다.
50년간의 진료, 그중 33년간의 봉사. 그도 이젠 좀 쉬고 싶지 않을까? 의료 봉사 시작하고는 한 달에 하루만 쉬었다고 하니, 거의 쉼 없이 일한 셈이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오히려 몸이 아파. 집에 가서 건넌방 영감님 신세는 되고 싶지 않아. 요즘도 아침 7시면 일어나서 병원에 8시까지 오니까…."
오히려 지금도 그의 치과 봉사를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봉사를 계속할까 고민이 든다고 했다. "작년에 일을 마치고 나서도 계속 연락이 오기는 하데요. 근데 내가 피곤하기도 하고. 다른 일 제쳐놓고 가는 게 이제는, 나도 늙어서. 건강이 되면 당장에라도 갈 텐데. 여전히 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예전만 해도 젊었으니까 갔지. 이젠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를 지금껏 지탱하게 했던 봉사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기쁨이 오지만 그만큼의 인내도 필요한 것, 땀과 수고스러움, 고민이 있는 것. 그렇게 생각해요. 일단 그걸 겪어봐야 알아요. 그 기쁨의 의미는, 자기와의 투쟁 속에서 발견하는 참 아름다움이지요. 그 기쁨 맛보면 남한테 안 주고 싶어요. 하하."
-조선일보, 201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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