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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노동일꾼에서 변호사로 '승천'한 장승수

하마사 2013. 6. 15. 15:05

대한민국 마지막 '개룡男'(개천에서 난 용)
"내가 성공 했다면 9할은 어머니의 공, 내 노력은 1할뿐"

서울대·司試로 인생역전…가스배달·골프장인부 전전 홀어머니 부양, 가문 일으켜

"성공? 난 이무기 정도,학벌이란 색안경을 버리면 주위에 '개룡' 많습니다"

1996년 1월 30일 스물다섯 장승수(張承守)는 대구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 있었다. 6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포크레인 조수, 식당용 물수건 배달부, LPG 가스통 배달부, 골프장 조경 인부, 신문배달부, 택시기사를 거치며 홀어머니와 두 살 어린 동생을 부양했다. 토목공사장 막일꾼은 그의 7번째 직업이었다. 그날 기계톱으로 한창 목재를 자르고 있던 순간, 공사장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승수야, 니 서울대 수석 합격했단다!"

장승수(42)는 "지금도 그때 장면이 슬로비디오처럼 떠오른다"고 말했다. 1996년 대한민국을 '개룡'(개천에서 난 용) 신드롬에 빠뜨렸던 청년은 이제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장년이 되었다. 인문계 수석으로 서울법대에 입학한 그는 그해 여름 자전 에세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를 펴냈다. 지금까지 174쇄를 찍은 이 책은 판매고 150만권을 넘었다.

승천을 꿈꾸는 '개천 태생' 젊음에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는 기가 막힌 제목이었다. "출판사에서 소설가와 시인, 카피라이터를 위원으로 모셔서 몇 번씩 회의를 했지만, 제목을 못 정했어요. 그러다 출판사 담당자가 '이거다'라고 했습니다. '7가지 막노동…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당시 나의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 제목이었어요. 기사에서 실제로 내가 한 말은 '공부가 제일 재밌더라'였는데 제목을 단 신문사 편집자가 '가장 쉬웠다'는 감각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는 당시 "'그런 제목을 달면 욕 먹는다'며 무지하게 반대했었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 선 장승수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 선 장승수. 그는“변호사가 된 지금의 나를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면 그건 9할이 내 어머니의 고생 덕분”이라고 말했다. / 김연정 객원기자
막일꾼을 거쳐 장승수가 8번째 직업으로 택한 것은 변호사였다. 2003년 45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한국 변호사 4명 중 1명이 모여 있다는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 자리를 잡았다. 사시 합격 때 잠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는 이후 '조용하게' 살아왔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다시 언론에 오르내린 건 총선을 앞둔 지난해 봄이었다. 새누리당이 대한민국 부(富)의 1번지이자 자신들의 정치적 아성인 강남 지역에 장승수를 공천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잇따라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장승수는 출마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장승수 이후 대한민국 개룡은 없다"고 말한다. 모두가 '대한민국 마지막 개룡'이라고 일컫는 장승수. 서초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70만원짜리 맞춤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이 옷이 지금의 작업복"이라고 말했다.

◇3800㏄ 에쿠스와 38평짜리 전셋집

장승수는 2001년, 2002년 사법시험 2차에서 거푸 고배를 들고서 2003년 12월 합격증을 받아 들었다. 그는 2006년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개업하는 '연수원 변호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지방변호사회 9374번째 변호사. 문 닫는 변호사들이 나올 때였다. 서른다섯이던 그는 "망하면 다시 막노동을 할 각오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생각보다 잘 벌리더라"며 웃었다. "김&장에 간 동기들보다 많이 번다"는 장승수는 변호사 10명이 속한 작은 로펌의 대표변호사다.

―어떤 집에서 사시나요?

"서울대 합격 당시 살던 집은 대구의 보증금 1000만원짜리 전셋집이었습니다. 변호사가 되고 법조타운과 가까운 방배동의 60평 빌라에 전세로 살았어요. 최근 경기도 평촌 산 아래 공기 좋은 38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지요. 역시 전세입니다. 돈이 없어서는 아니고, 다들 지금은 집을 살 때가 아니라고 해서."

그가 경기도 평촌으로 옮긴 건 동생 내외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장승수의 뒷바라지를 받은 동생 장승대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통과해 현재 기획재정부 서기관으로 근무 중이다. 장승수는 "동생 가족과 함께 살 3층짜리 집을 지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3층 전체는 도서관처럼 꾸며서 차도 마시고 아이들과 책을 보며 놀 계획이다.

그는 2007년 11월 결혼했다. 지금 다섯 살 아들이 있다. 마담뚜의 중매를 거절하고 어머니가 소개해준 규수와 결혼했다고 한다. 법조인에 대한 선입관 때문일까?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궁금했다.

"'변호사 업계 표준'이라는 3800㏄급 에쿠스를 탑니다. 지난해 운전기사가 이민을 간 뒤 내가 직접 운전을 하지요. 그런데 (키가 작아) 에쿠스 운전석에 앉으면 페달에 발이 안 닿았어요." 그는 단신(短身)이다. 키를 묻는 말에 "공식적으론 160㎝"라며 웃었다.

"직접 용접을 해서 페달이 요만큼 튀어나오게 만들어놨어요. 키가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는 없지만 불편한 게 많네요. 기성 양복은 맞는 게 없어서 맞춤 양복을 입지요. 명품을 입고 싶어도 맞는 게 없으니, 하하하. 세상은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듯해요."

―외모는 운동선수풍입니다.

"의뢰인들도 '변호사같이 안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무실 서랍에서 한 장의 흑백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사시를 준비하며 봉천동의 '대원체육관'에서 권투를 배울 때의 모습이었다. 식스팩이 선명했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코도 약간 휘어 있었다. 그는 "한때 프로복싱 신인왕을 꿈꿀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에게 "지금은 어떤 운동을 하느냐"고 물으니 "주말에 가끔 골프를 친다"고 말했다. 장승수는 에세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에서 "도대체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골프장에서 심신을 수양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라며 골프에 반감을 나타냈었다. 그는 말했다.

"조경 인부로 스무 살 무렵부터 골프장을 드나들었어요. 그린 위에서 일하다 골퍼들이 오면 숨었지요. 그 기억 때문에 골프를 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세계에선) 어쩔 수 없더군요. 첫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섰을 때 기분이 묘했습니다."

◇내가 龍? 이무기 정도 되려나?

―4수 만에 수석을 했는데, 만약 그때 실패했다면?

"다시 도전을 안 했을 거예요. 지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으니까. '십장'(현장감독)을 하다가 건설회사를 하나 차리지 않았을까요? 그러고는 IMF 때문에 부도를 맞았을 것이고…."

―당신을 '대한민국 대표 개룡남'이라고들 합니다.

"굳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용(龍)도 용 나름이죠. 내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렇게 높은 사람, 성공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굳이 분류하자면 '이무기'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장승수가 이무기?

"서울대 수석이라는 한 번의 성공으로 인생이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이후에 많은 시행착오, 실패가 있었어요. 그런 경험들이 쌓여 세상 일이라는 게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나는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변호사일 뿐이지요."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 선 장승수 어릴적 인터뷰 사진
1996년 2월 5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 실린 장승수의 모습. 당시 기사의 제목이 후일 책 제목이 된‘공부가 가장 쉬어요’였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장승수에서 끝났다고 합니다.

"동의할 수 없어요. 기업 사건을 많이 해서 CEO들을 많이 아는 편입니다. 그중에 동갑내기 CEO가 있는데, 벌써 시가총액 수천억원대 기업을 일궜어요. 지방대 공대를 나온 사람이에요. 학벌이 성공의 기준인가요? 왜 꼭 서울대여야 해요? 서울대에 가는 것 말고 새로운 꿈을 꿀 기회는 많아졌어요. 학벌이란 고정관념을 버리면, 꿈과 열정, 성실로 성공한 '개룡'들은 주위에 많습니다." "어느 정도 열정을 가져야 개룡이 될까"란 질문에, "열정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라고 그는 말했다.

―성공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도움은?

"좋은 선생님들이지요. 가난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지 않도록 해준 분들. 그런 훌륭한 선생님들을 배출한 사회의 덕을 본 것은 분명해요. 그리고 어머니. 나를 키운 건 8할이 어머니, 나머지 1할은 어머니의 기도였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1할이 있다면 내 노력이었을 거예요."

장승수가 10세 때. 아버지는 관 하나 짤 돈도 남기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장승수는 "홀로 된 어머니는 운전학원 구내 간이식당부터 구멍가게·도매상·만화방·한복가게·세탁소·염색공장·버선공장을 전전하며 우리를 키우셨다"고 말했다.

그가 새누리당의 강남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거론됐을 때 야당을 지지하는 한 대학교수는 "장 변호사의 성공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을 노력 부족의 '패배자'로 만들고 약자와 빈자를 위한 구조 개혁을 회피하는 소재로 사용될까 우려된다"고 트위터에 썼다. 장승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정곡을 찌른 말이지요. 그래도 난 여전히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장승수의 말을 믿고 한번 열심히 해보느냐, 아니면 '나는 운도 없고 잘난 것도 없으니 안된다'고 포기할 것이냐. 밑져야 본전이지요. 안 하면 뭐할 겁니까." 총선 공천설의 내막에 대해선 "세월이 흐른 뒤에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장승수 스타일이 통하지 않은 연수원

사람들은 막노동하면서 서울대에 수석 합격한 그를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고등학교 때 측정한 그의 I.Q는 보통 학생 수준인 113이다. 그를 수석으로 만든 건 시간이 걸려도 기초부터 쌓아가는 정공법이었다. 그는 "교과서는 정성을 다해 글자 하나 삽화 하나라도 빼먹지 않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본고사를 위해 상경하기 전날까지 수학 교과서를 최소 하루 한 시간씩 매일 봤다. 영영사전을 볼 때는 표제어 아래 모든 문항을 다 보고 맨 마지막 어원 설명까지 빼놓지 않고 읽었다고 했다. 이것이 수험생들에게 유행한 '장승수 스타일'이다.

―사법시험 공부도 장승수 스타일로?

"다들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요약 판례를 보고 족집게 총정리를 받고 모의사법고시를 쳤습니다. 나는 법대 도서관에서 법 원문과 법학 논문을 읽었어요. 판례는 교재의 각주에 달린 것까지 원본을 다 찾아 읽었습니다."

―그런 공부법이 사법연수원에서도 통했나요?

"아주 우수한 성적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연수원에선 시험일 이전 3년간의 대법원 판례가 모조리 시험 범위이지요. 너무 방대해서 대부분의 연수생은 요약 판례를 봅니다. 나는 판례 원본을 다 읽었어요. 그런데 그게 오판이었지요. 사법연수원 과정은 실무 과정인데, 결과적으로 그에 맞는 기술적인 공부를 덜 했던 것 같습니다."

―성적은?

"100등 안에 들 정도로 우수한 건 아니었지만 부끄러운 성적도 아니었습니다. 공개 못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한 법무법인의 대표인데 영업도 생각해야 하고…. 허허."

―변호사가 되고 첫 재판은?

"연수원을 2등으로 졸업할 만큼 뛰어난 동기가 부모님 재판을 맡겼어요. 상대는 화재보험 회사였습니다. 의뢰인은 실화, 보험회사는 방화라고 주장했어요. 보험회사가 내세운 직원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승패가 갈렸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 직원한테 내가 완전히 농락당했어요. 패소했지요."

장승수는 패배를 두고두고 곱씹었다. 그는 "그 사건 이후 상대방 증인을 신문할 때 관련 사건 기록을 모조리 외워버렸다"고 말했다. 역시 장승수 스타일이다. 그렇게 하자 증언 한 마디 한 마디의 진위를 즉각적으로 가려내 반박할 수 있었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 선 장승수
장승수는“스물다섯 장승수가 그랬던 것처럼 변호사 장승수도 열심히 산다”며“담배를 피울 때 빼고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한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일한다”고 말했다. / 이진한 기자
◇오십 이후엔 잡스처럼 살고 싶다

장승수의 일거수일투족은 서울대의 관심사였다. "도서관에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초콜릿과 분홍색 메모지가 있었어요. 메모지엔 '막노동판에서 서울대까지라는 인간 승리의 장승수씨 맞죠?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를 읽었어요. 그 책을 읽고 많은 용기를 얻었답니다. 그런데 도서관엔 가방만 있네요'라고 씌어있더군요. 나도 모르게 남의 시선이 의식됐지요. 졸려도 엎드릴 수가 없었어요."

유명세(有名稅)라고 했던가? 장승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양한 소문도 학내에 돌았다. 그중엔 "장승수가 실연당해 술을 마시다가 만취해 서울대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장승수는 "처음 들었다"며 껄껄 웃었다. "친구들과 학교 앞 주점서 술 먹고 나오다 넘어져 뇌진탕 치료를 받은 적은 있어요. 큰 부상이 아니었는데…." "장승수가 기가 막히게 예쁜 여학생과 사귀다가 헤어져 술에 취해 괴로워하는 모습이 목격됐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런 적은 있었던 것 같네요"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서울대에 들어갔지만, 가난의 후유증은 남았다. 1997년 11월 기말고사 때 밤샘을 한 장승수는 정신을 잃었다. 폐결핵이었다. 그는 "못 먹고 힘들게 살아온 여파가 긴장이 풀어지면서 한꺼번에 나를 덮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장승수인데…'란 생각으로 버텼다. 전염 위험이 있는 초기 2주를 빼고는 약을 먹으며 매일 도서관을 찾았다. "막노동과 입시 공부를 병행하면서 '몸과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어요. 폐결핵에 걸리고 '정신력이 약해진 것이 아닌가'라며 자학했지요.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였습니다." 대가는 결핵균이 늑막에 침투해 생긴 결핵성 늑막염이라는 합병증이었다. 완쾌 진단을 받을 때까지 1년이 걸렸다.

학창 시절 장승수는 최우등생은 아니었다. 4.3 만점에 평균 3.3점(B+) 수준이었다. 어느 날 귀가하는 길에 서울대생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장승수 그 새끼, 공부가 제일 쉽다더니 별것 아니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대학 시절 경제적으로 그를 떠받친 주춧돌이었다. 그의 책은 1996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와 김정현의 장편소설 '아버지'에 이어 베스트셀러 통산 3위에 올랐다. "한 번에 4000만원이 입금된 적도 있었어요. 인세로 받은 돈이 모두 4억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인세를 받아 첫 번째 한 일은 어머니를 위해 대구에 2층 양옥집을 마련한 것이었다. 동생과 지낼 방 2칸 전셋집도 서울대 부근에 마련했다.

―본인은 가문을 일으켰는데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법조인은 안 됐으면 해요. 변호사가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법조인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뒷수습하는 사람이잖아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새롭게 뭔가를 만들어가는 일, 예컨대 예술이나 사업 같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꿈은?

"쉰까지만 변호사 일을 열심히 하고 이공계 공부에 도전하고 싶어요. 스티브 잡스처럼 기술로 현실을 바꾸고 싶습니다."

 

-조선일보, 2013/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