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기타자료

남자 나이 쉰

하마사 2013. 3. 25. 11:37

 

재작년 어느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 자리에 뒤늦게 간 적이 있다. 나이 지긋한 심사위원들은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상을 받은 작가가 40대 중반이라 그 또래 혹은 더 젊은 문인들만 남아 있었다. 마흔 고개를 넘긴 어느 문인이 "형, 왔어요?"라고 하더니 주위를 훑어보곤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이 쉰 넘은 사람은 형밖에 없네." 초등학생들이 공을 차는데 눈치 없이 끼어든 중학생처럼 민망하기만 했다.

김지하 시인은 쉰을 넘겨 눈이 침침해지자 시 '쉰'을 썼다. 그는 아내가 외출한 뒤 홀로 '눈은 넋그물/ 넋 컴컴하다'라며 바느질을 했다. 그는 서툴게 저고리 단추를 달려고 했다. '실 끊는 이 끝'도 시린 나이인지라 시원하게 실을 자를 가위가 아쉽기만 했다. 그때 '눈 밝은 아내'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답답했던 시인은 '가위 소린가'라며 아내를 반겼다고 했다.

▶정일근 시인은 쉰이 지나 홀로 저녁 밥상을 차렸다. 아침에 국을 끓였던 냄비 뚜껑을 여니 훅 하고 쉰내가 덮쳤다. 그는 '이 기습적인, 불가항력의 쉰내처럼 남자의 쉰이 온다'며 쓸쓸히 국물을 버렸다. 심리학자들은 남자가 나이 쉰을 넘기면 '제2의 사춘기'를 맞는다고 한다. 짜증이 많아지고 잘 운다는 것이다. 아울러 쉰 넘으면 아는 게 많아 젊은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참견이 잦아지다 보니 세대 갈등도 커진다는 얘기다. 그러다 퇴직해 일손을 놓으면 잡념이 많아져 스스로 심신을 괴롭힌다고 한다.

▶50~58세 베이비붐 세대가 715만명이나 된다. 부모를 모시는 것과 함께 자식들 가르쳐 결혼도 시켜야 할 짐을 한꺼번에 짊어지고 있다. 노후 준비도 제대로 안 됐는데 남자들은 평균 쉰셋에 직장을 그만둔다. 집에서 가장의 권위도 빛바랜 지 오래다. 고개 숙인 50대 사내들이 많아지자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책이 잇따라 나왔다.

▶쉰일곱 사회학자 송호근은 책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를 냈다. 50대는 기초노령연금을 받을 나이도 아니다. 사업에 실패하면 곧바로 빈곤층이 된다. 송 교수는 '자존심을 버린 채 새 일을 찾고 취미로 요리도 배워야 살아남는다'고 했다. 쉰넷 이갑수 시인은 책 '오십의 발견'을 써서 '옛날의 좋은 기억을 되살려 앞날의 슬기로 삼자'고 권했다. 남자가 쉰을 넘겨 뒤돌아보면 아쉬움이 산더미 같기 마련이다. 그래도 인생의 숱한 고랑을 뛰어넘어 용케 여기까지 왔다. 쉰의 늪에 빠져 쉬어버리기엔 아직 펄펄 끓는 나이가 아닌가.

-조선일보 만물상, 2013/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