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투표자 3072만명 중 51% 남짓 1600만표가량을 얻어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48% 남짓 1500만표가량을 얻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득표율 50%를 넘긴 대통령은 이번이 처음이다. 70%를 약간 넘을 것으로 예상했던 투표율은 75.8%까지 올랐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박 후보의 당선으로 투표율이 높으면 야당이 유리하다는 속설(俗說)도 깨졌다.
경쟁자 지지 국민의 박탈감 헤아려야
정권 재창출보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여론이 더 높은 가운데 치러진 이번 대선은 박 후보에게 버거운 선거였다. 선거 초반 한동안 유지되던 박근혜 대세론은 무소속 안철수 후보 등장으로 몇 차례 크게 흔들렸다. 박 후보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3자 가상(假想) 대결에선 늘 1위를 지켰으나 야당 단일 후보에겐 밀리는 결과가 몇 번이나 나타났다. 안 후보 사퇴 이후 박 후보에게 10%포인트 이상 뒤지던 문 후보의 지지율이 꾸준히 올라가 선거 이틀 전에는 뒤집히기도 했다.
이 순간 박 당선인에게 가장 절실한 자세는 자신을 지지한 1600만 국민과 함께 자신의 경쟁자에게 표를 던진 1500만 국민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그들을 진정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우리나라는 미국발(發) 금융위기·유럽발 재정위기 속에서도 세계 각국 가운데 거시(巨視)경제지표가 가장 빨리 호전되고 한 사회의 소득 불평등 정도를 가리키는 지니계수도 노무현 정부 동안 계속 악화하다 2009년 0.320에서 2011년 0.313으로 개선됐다. 그럼에도 국민은 이런 지표 개선과 관계없이 어쩌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큰 경제적 고통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왔다. 대기업의 경기가 좋아지면, 고소득자의 소득이 높아지면, 그 효과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퍼져간다는 이른바 '낙수(落水)효과'는 현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드러났다.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고 중년(中年)들은 40대 후반 50대 초반만 돼도 언제 해고장이 날아들지 알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젊은 부부는 아이 보육비와 교육비가 걱정돼 출산을 꺼리는 분위기다. 그뿐 아니라 60년대 70년대 고도성장시대에 자신보다 가족과 회사와 나라 경제를 위해 밤을 낮 삼아 일해온 노년(老年)들은 아무런 경제적·사회적 보장 없이 맨몸으로 막막한 노후(老後)를 맞고 있다.
국정 운영 공약 새로 제시하라
물론 이런 현상은 신자유주의시대 개막과 함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나라가 부강해지면 국민도 따라서 부유해지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가 끝나버린 세계의 흐름과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국민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서 세계의 흐름과 인과(因果) 관계를 따져 가면서 자신의 오늘 처지를 이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국민은 국민소득이 2만5000달러를 넘어서는 시점부터 소득의 불평등, 기회의 불평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더 큰 좌절을 겪는다고 한다. 박 당선인은 자신이 아니라 경쟁자에게 표를 던진 1500만 국민이 겪는 이런 경제적 어려움, 심리적 박탈감, 기회의 불평등, 지역적 소외감을 직시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껴안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박 당선인이 선거 기간 동안 국민행복시대를 내걸고 출산과 보육에서부터 노후 대비까지 모든 세대의 걱정을 절반으로 줄여주겠다고 약속하고 총 131조원이 들어가는 201개 공약을 내놓은 것도 이런 시대의 변화 흐름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 당선인이 이런 약속을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나라 안 경제 사정과 나라 밖 경제 여건이 너무나 어렵다. 우리 경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잠재경제성장률이 하락했고 인구구조 역시 2016년을 정점(頂點)으로 15~64세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성장이 줄면 세수(稅收)가 줄고 이에 따라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도 힘들어진다. 그뿐 아니라 세계경제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럽발 재정위기 여파로 앞으로 2~5년 동안 정상화되기 힘들 전망이다. 당선인은 공약을 실천하려면 성장이 복지를 뒷받침하고 복지가 다시 성장의 바퀴를 굴려갈 수 있는 한국형 복지 시스템을 찾아야 한다.
당선인은 선거 기간 국민에게 '해주겠다'는 말만 했다. 이제부턴 '참아달라'는 말을 함께 해야 한다. 공약은 지켜야 하지만 당장 해야 할 것과 중·장기 과제로 추진할 것을 구분하는 선거공약 아닌 국정(國政)공약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 다수가 당선인보다 더 많은 것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문 후보의 '전면적 변화'보다 당선인이 내건 '책임 있는 변화' 쪽에 손을 들어준 뜻일 것이다.
북한 정세와 국제 정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김정은 정권 1년 북한은 과거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고 3차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박 당선인이 선거 기간 몇 번이나 이야기한 김정은과의 대화가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다. 박 당선인은 당장 '중화(中華)민족의 부흥'을 내건 시진핑의 중국과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군사강국으로 변신해 20년 장기 불황 속에 허덕이는 국민의 자신감을 회복시키겠다는 자민당 주도의 일본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박 당선인은 이 모든 외교적 도전에 대처하면서 미국과의 동맹을 확고히 유지하고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민주적·미래지향적 리더십이 正答
선거 기간 반대 진영은 박근혜 시대가 열리면 과거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할 것처럼 공격하고 박 당선인을 지지한 적지않은 국민도 이런 우려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박 당선인이 이런 우려를 잠재우려면 자신을 과거시대의 상속자가 아니라 미래시대의 대표라는 인식 아래서 그에 걸맞은 민주적 리더십과 미래지향적 리더십을 분명히해야 한다. 박 당선인 본인의 변화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당선인 주변에 바른말을 서슴없이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불통(不通)시대가 이어질 수 있다.
'박정희 딸'과 '노무현 비서실장'이 격돌한 이번 대선은 박정희 시대와 노무현 시대에 대한 기억의 싸움이기도 했다. 국민 모두가 당선인이나 문 후보를 자기를 대변하는 대표선수로 흡족하게 여겨서 투표장에 간 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지지자들에게 인내와 자제를 호소하고 반대자들을 껴안지 못하면 다른 정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정권의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다.
박 당선인은 5·6·7·8·9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중·고교·대학 학창 시절을 청와대에서 보냈다. 그 시대의 영광, 그 시대의 좌절, 그 시대의 빛, 그 시대의 어둠을 누구보다 가까운 데서 보고 체험했을 것이다. 그만큼 나라를 잘 이끌어야겠다는 각오가 클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당선인의 성공 여부는 지지자들만이 아니라 당선인을 찍지 않은 절반의 반대파들 손에도 달려 있다. 반대파들이 박근혜 당선인을 우리 대통령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공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한다. 그것이 당선인이 말해온 진정한 국민대통합이고 시대교체일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201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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