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前 오늘 당선자의 말 '贊反 모두의 대통령 되겠다' 2007년엔 '겸손하고 낮게'
취임 후엔 반대로 가며 추락… 오늘 밤 승자 對국민 약속 책상 앞에 놓고 늘 되새겨야
- 김창균 논설위원
그로부터 1년 반이 흐른 2004년 5월 27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기각 결정으로 대통령직에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이 연세대에서 특강을 했다. "한국처럼 오른쪽에 있는 나라는 기득권에 대한 향수가 강할 수밖에 없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다." 진보시대를 열겠다는 노 대통령이 상대 진영인 보수 세력 전체를 자기 이익을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는 집단으로 몬 것이다. 그리고 또 몇 달 후 노 대통령은 징벌적 세금으로 부동산 값을 잡으려는 자신의 정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공무원 집단을 꾸짖으며 "매일 강남(江南) 사람들과 밥 먹고 나온 정책으론 강남 집값 못 잡는다"고 했다. 국민을 강남과 비(非)강남으로 갈라친 것이다.
노 대통령 임기 4년째를 맞는 2007년 2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노 대통령 취임 후 우리 사회가 통합됐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75.3%가 '분열됐다'고 답했고, '비슷하다'(11.9%)와 '통합됐다'(6.3%)의 순이었다. 2002년 12월 19일 밤 노 당선자의 다짐이 크게 어긋나 버린 것이다.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 승부의 윤곽은 일찌감치 갈렸다. 밤 9시 55분쯤 당선이 확정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매우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다.
이 약속도 말뿐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결코 겸손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의 측근들은 '여의도 논리'나 'MB 시대정신' 같은 표현을 즐겨 썼다. 이명박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의견에 대해 "아직도 여의도 정치 논리에 빠져 있다"든지 "MB 시대정신을 이해 못 한다"고 타박했다. 이 대통령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자신의 CEO 노하우를 모든 국정(國政)에 대입하려 했다. 대통령도 참모들도 530만 표차 대선 승리를 임기 5년 동안 쌓아놓고 쓸 수 있는 자산처럼 여겼다.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식 국정에 항의하는 촛불이 광화문을 밝힌 것은 취임 3개월 만이었다.
돌이켜 보면 국민 앞에 겸손했던 정권은 없었던 것 같다. 정치부에 발령받은 후 처음 지켜본 김대중 정부의 출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정부는 선거를 통해 첫 정권 교체를 이뤘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이전까지 모든 정부는 군사정권 혹은 그 후예였을 뿐이고 자신들이 진정한 민주정권 1기라는 발상(發想)이었다. 갓 집권당이 된 국민회의 소속 초·재선 의원들이 기자실 마이크를 붙잡고 나라 틀을 하루아침에 갈아엎는 정책 구상을 발표하곤 했다.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했다간 50년 만의 정권 교체라는 '혁명'을 거스르는 반동(反動)분자로 몰릴 분위기였다.
모든 정권은 5년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에서 갓 승리한 정권은 나라가 자기 소유물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국민보다 자신들이 더 잘 안다는 양 행세한다. 그 순간부터 정권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18대 대통령 선거의 승자가 오늘 밤 가려진다. 초박빙 승부로 간다면 거의 자정 무렵에야 당선자가 가려질지도 모르겠다.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당 문재인 두 후보 중 한 사람은 앞으로 5년간 이 나라를 어떻게 이끌고 가겠다는 다짐을 밝히게 될 것이다. 그 다짐 속엔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반대했던 나머지 국민 절반의 마음을 다독이는 말이 꼭 들어 있기를 기대한다.
대통령 당선자는 오늘 밤 자신이 국민 앞에 다짐했던 말을 액자 속에 담아 집무실 책상 앞에 놔뒀으면 좋겠다. 그리고 취임 후 '나는 국정을 이렇게 열심히 챙기는데 국민이 몰라준다'는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 액자를 들여다본다면 어디서부터 일이 어긋났는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일보, 20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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