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옛추억담기

밥그릇

하마사 2012. 12. 19. 08:38

소설가 이청준이 1950년대 중학교 때 은사를 37년 만에 모시고 진지를 대접했다. 선생님은 빈 그릇을 달라 해서 밥 절반을 덜어놓고 남은 반 그릇만 들었다. 소식(小食)을 하시는지 여쭸더니 "너희 가르칠 때부터 평생 습관"이라고 했다. 전쟁 뒤 어린 제자들이 빈 도시락만 갖고 다니며 끼니 거르는 것을 보고 결심한 일이라 했다. "내 밥을 일일이 나눠줄 순 없어도 밥그릇 절반만 한 마음이 너희 곁에 함께하기를 바랐다."

▶어릴 적 동네 뒷산 무덤들 앞에 흰쌀밥 한 그릇이 놓여 있곤 했다. 동그랗게 고봉(高捧)으로 담은 밥그릇이 무덤을 닮았었다. 흉년 들어 굶어 죽은 사람 무덤이었다. 죽어서라도 한번 배불리 먹어보라는 슬픈 풍경이었다. 옛말에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고 했다. '밥이 보약' '밥 한 알이 귀신 열을 쫓는다'고 했다. "밥 먹었느냐" "진지 드셨습니까"가 인사였다.

▶추운 날 언 발을 아랫목 담요에 들이밀면 딸가닥 놋그릇이 넘어지곤 했다. 열린 뚜껑으로 밥이 물기를 흘렸다. 하루 밥벌이 마치고 늦게 오는 아버지 밥상에 따슨 밥 올리려고 담요에 묻어둔 밥그릇이었다. 묵직했던 아버지 밥 주발(周鉢)은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가장(家長)의 위엄이었다. 남편과 자식에겐 고슬고슬 밥 지어 먹이고 찬밥 먹던 어머니들. 뜸 들이는 밥솥에서 구수하게 새 나오던 밥내는 모성(母性)이었다.

▶1890년대 주막 사진에서 도포 입고 갓 쓴 채 바싹 마른 남자가 개다리소반을 받아놓고 밥을 먹는다. 남자 얼굴만 한 그릇에 밥이 가득 담겼다. 사진을 분석해보니 밥그릇 높이가 9㎝, 위쪽 지름이 13㎝쯤이라고 한다. 요즘 밥공기 세 배다. 임진왜란 피란기 쇄미록엔 전쟁통인데도 쌀 일곱 홉(420g)으로 밥 한 그릇을 지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북하게 담은 감투밥·머슴밥·고봉밥은 날마다 꾸는 꿈이었다.

▶어느 도자기업체가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밥공기 용량을 비교했더니 680mL에서 290mL로 작아졌더라고 했다. 건강 챙기고 다이어트 하느라 70년 만에 밥 양이 60% 줄어든 셈이다. 흰쌀밥만 많이 먹으면 혈당이 높아지고 당분이 지방으로 쌓여 복부 비만이 된다. 그래서 거친 현미밥과 잡곡밥 먹는 집이 많다. 30년 전 하숙생들은 "주인아주머니가 밥그릇에 밥알을 세워서 푼다"고 푸념했다. 꾹꾹 눌러 담지 않고 키만 높게 허술한 고봉밥을 낸다는 얘기다. 그 시절엔 어찌 그리도 밥이 빨리 꺼졌는지. 밥그릇이 밥상 구색거리가 돼 간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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