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누구인가] 유년부터 청년까지
토굴에서 이뤄낸 반전 드라마 - 부총리 아들로 호화생활…
文革때 오지 추방, 필사적 주경야독으로 10번만에 공산당 입당
태자당 비호속 차세대 황제로 - 당 원로들 지원으로
지방 요직 돌며 경력 관리… 후진타오가 민 리커창 제치고 후계자로 등극
-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붙잡힌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가운데). /카이디넷
미국 대선에 이어 중국도 '다음 10년'을 이끌 최고지도부를 선출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 부주석이 이끄는 5세대 지도부이다.
중국 공산당은 8일 오전 9시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차기 최고지도부 선출을 위한 1주일간의 18차 당 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당대회에서는 전국의 당대표 2270명이 약 370명의 당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을 선출한다.
새 중앙위는 당대회 종료 직후인 오는 15일 1차 전체회의를 갖고, 시 부주석을 당 총서기로 하는 차기 상무위원 7명을 뽑는다. 시진핑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 태어난 첫 중국 최고지도자이다. 앞으로 10년간 '중국호'를 이끌어갈 그의 인생 역정을 살펴본다.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중국 명문대들이 밀집해 있는 베이징 시내 중관춘(中關村)에는 '바이(八一)중학'이라는 학교가 있다. 1947년 설립된 이곳은 중국 혁명가들의 자제를 위한 특수 교육기관이었다. 당시로써는 중국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영장과 도서관, 기숙사 등 현대적 시설을 갖췄다. 중국 차기 최고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59) 부주석은 1960년대 이 학교에서 초·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시진핑은 1953년 6월, 중국 8대 혁명 원로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시중쉰(習仲勛·1913~2002) 전 부총리와 팔로군 출신의 어머니 치신(齊心·86) 사이의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둘을 둔 장남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중앙선전부장, 정무원 비서장, 부총리 등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덕분에 어린 시절은 유복한 '홍색 귀족'의 생활이었다. 베이징 중심가 저택에 집사와 요리사는 물론, 옛 소련제 자가용까지 갖춘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1962년 시중쉰이 마오쩌둥(毛澤東)의 측근 캉성(康生)의 모함을 받아 해임되고, 문화대혁명(1966~1976)이 시작되면서 그에게는 정반대의 운명이 펼쳐졌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그는 13세의 나이에 소년관리소라는 교화시설에 다녀와야 했다. 1969년 중학교 졸업 후에는 서부 산시(陝西)성 옌촨(延川)현 량자허(梁家河)촌이라는 산간 벽지로 쫓겨갔다. 이가 득실거리는 토굴 생활과 고된 노동을 못 견디고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쳤다가, 강제노역 조치를 당하고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 중국 차기 지도자 시진핑(習近平·왼쪽) 국가부주석이 7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18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준비회의를 마치고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걸어나오고 있다. 시 부주석은 8일 시작하는 18차 당대회를 통해 최고 지도자인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다. /신화 뉴시스
이후 춘궁기에 아사자가 나올 정도로 궁핍한 산골 마을에서 7년을 보낸 그는 일찌감치 생존 본능에 눈을 떴다. 낮에 고된 노동을 하고도 밤이면 석유등 아래에서 마르크스·레닌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저작을 읽었다. '반동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거부를 당하면서도, 집요하게 입당원서를 내 1974년 10번 만에 공산당 입당에 성공했다. 독일 슈피겔지는 이런 그를 "마오주의자보다 더 붉어짐으로써 생존하는 길을 택했다"고 썼다.
1975년 공농병(工農兵) 특채로 칭화대 화공과에 입학하면서 그는 베이징의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나 고관의 자제 그룹) 사회로 복귀했다. 농촌생활을 거치며 그는 연약한 중학생에서 키 180㎝를 넘는 장대한 기골에 조용하고 인내심 강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이 시절부터 야망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태자당 자제들이 문화대혁명기의 고난에 대한 보상 심리로 서구 문화에 심취해 있을 때, 그는 도서관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했다. 1980년대 초 아버지의 부하인 커화(柯華)의 딸 커링링(柯玲玲)과 결혼한 뒤에도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가자'는 부인의 끈질긴 요청을 거절하고 끝내 이혼을 택했다. 당시 복권돼 광둥(廣東)성 제1서기로 복직한 시중쉰은 이런 아들에게서 '정치적 재목'을 봤던 듯하다. 다른 형제들은 상업 등에 종사하게 하면서, 그만 공직에 입문시켰다.
----------------------
공직 입문과 출세가도
3년 군 생활을 끝낸 1982년에는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당서기로 내려갔다. 이어 푸젠(福建)성과 저장(浙江)성, 상하이 등지에서 25년간 지방관 생활을 했다. 샤먼(厦門) 부시장을 지내던 1987년 중국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펑리위안(彭麗媛·50)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 (사진 왼쪽)1958년 5세인 시진핑(왼쪽)이 아버지 시중쉰 당시 정무원 비서장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는 남동생 시위안핑. (사진 오른쪽)스물두 살 젊은 시절의 시진핑(오른쪽). 칭화대에 다니던 1975년 아버지 시중쉰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인민망
지방관 시절 그는 재능이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보다는 조직의 화합을 중시하고,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적 능력이 강점이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용인관에 대해 "재(才)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덕(德)"이라고 했다.
주변 관리도 철저했다. 한 지역에 부임하면 그 지역 원로 당원부터 찾아 인사를 했다. 상하이시 서기로 부임한 직후, 상하이시 위원회가 800㎡짜리 영국식 3층 양옥을 당서기 사옥으로 내놓자, 그는 "원로들의 요양원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며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런 처신 뒤에는 시중쉰을 비롯한 원로들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내 원로 그룹은 시 부주석 최대의 후원자이다. 쑹핑(宋平) 전 중앙조직부장은 2007년 그가 상무위원으로 선출돼 베이징으로 왔을 당시, 중난하이(中南海·중국 최고지도부 집단거주지) 안에 빈집이 없자, 자기 집 일부를 비워 머물도록 했다. 태자당의 대부인 쩡칭훙(曾慶紅)은 "시진핑이 최고지도자가 되기 전에는 중난하이를 나가지 않을 것"이라면서 2007년 퇴임 이후에도 중난하이 내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정가의 한 분석가는 "시 부주석이 근무한 곳은 주로 경제가 발전한 동부 연안으로, 경력에 오점이 생길 여지가 적은 곳"이라면서 "그를 미래 정치 지도자감으로 본 아버지와 당내 원로들이 그의 경력을 철저히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 부주석은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외부 예상을 깨고 국가 부주석에 발탁되면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이을 후계자로 급부상했다. 당내 투표에서 후 주석이 밀었던 리커창(李克强) 당시 랴오닝성 서기를 압도적 표차로 제쳤다. 당시 막후 실력자였던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 쩡칭훙 부주석이 그를 당의 통합을 이끌 적임자로 봤던 것이다.
----------------------------
가족관계와 국제사회 평가
- 지난해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된 시진핑 중국 부주석의 가족사진. 사진은 1997년 촬영됐으며 앞줄 왼쪽부터 시 부주석의 어머니 치신, 아버지 시중쉰, 고모 시둥잉. 뒷줄 왼쪽부터 시 부주석, 누나 치안안, 한 사람 건너서 누나 치차오차오, 남동생 시위안핑. /초천도시보(楚天都市報)
시 부주석은 부인 펑리위안과의 사이에 딸 시밍저(習明澤·19·하버드대 유학 중)를 뒀다. 형제들은 대부분 외국 국적을 갖고 있다. 큰누나 치차오차오(齊橋橋·63)는 1980년대 후반 홍콩으로 이주했다가 이후 캐나다 국적을 얻었다. 2000년대 들어 베이징으로 돌아와 부동산 개발로 수억 달러의 거부를 쌓았다. 둘째 누나 치안안(齊安安·61)과 남동생 시위안핑(習遠平·57)도 호주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언론 접촉이나 대외 발언을 삼갔지만, 말을 할 때는 자신만만하고, 직설적인 화법을 즐긴다. 2009년 멕시코 방문 당시 서방 국가들이 중국 인권을 비판하자, "밥 먹고 할 일 없는 외국인이 이러쿵저러쿵한다. 중국은 13억 인구의 먹는 문제를 해결한 것만으로도 인류에 큰 공헌을 했다"고 반박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에서 티베트 독립단체들이 시위를 벌였을 때도, "시끄러운 새가 있다고 그 새를 들어내면 새장 안이 적막해질 것이다"고 했다.
국제사회의 평가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만델라급 인물이다. 자기가 겪은 일로 인해 감정이 좌우되지 않는 절제력을 갖췄다"고 말했다. 헨리 폴슨 전 미국 재무장관도 "어떻게 하면 일이 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2012/11/8
'자기계발 >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물학자 최재천 "남성이 씨앗이고 여성이 밭이라고? 사실은…" (0) | 2012.11.12 |
---|---|
관정재단 이종환 명예이사장 (0) | 2012.11.08 |
'행복한 나눔' 10년째 운영… 전 영화배우·현 서울극장 대표 고은아씨 (0) | 2012.11.06 |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0) | 2012.10.31 |
'서울 토박이' 안병영 前 교육부장관, 산골생활 4년을 말하다 (0) | 2012.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