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했던 트로피의 꼭지가 어느 날 떨어지니… 榮華는 풀꽃의 이슬 같아"
한번은 안기부서 전화를 걸어와 "왜 운동권 목사에게 돈 부쳤나?"
계좌 추적에 '이경희' 이름 나와
영화에선 에로틱한 과부로 출연… 드라마 '제2공화국'의 육영수 役
육 여사는 한복 입으면 목선이 좋아
- 1973년 제10회 청룡영화상 인기상 수상(신성일·故 박노식과 함께)
고은아(66)씨와 영화 얘길 할까 봉사 얘길 할까, 마음속에 쭉 정해지지 않았다. 막상 대면하자 내 고심(苦心)과는 다른 질문이 나왔다.
―예명(藝名)이 ‘고은아’고, 본명은 ‘이경희’이지요. 영화를 안 찍은 지 오래됐으니 이제 본명으로 돌아왔나요?
“데뷔했을 때 ‘눈물의 여왕’이라는 이경희라는 선배 배우가 있었죠. 당연히 내 이름을 바꿔야 했어요. 영화 ‘남과 북’에서 여주인공 이름이 ‘고은아’였어요. 엄앵란씨가 그 배역이었죠. 원작자인 한운사(韓雲史) 선생님이 그 여주인공 이름을 내게 주신 거죠. 그 뒤로 지금까지 쭉 내 이름이 됐어요.”
빨간 운동화를 신은 중년 여인은 한때 은막의 스타였고 지금은 ‘서울극장’ 대표다. 올해 ‘대종상 공로상’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빈자(貧者)들을 돕는 사회적 기업 ‘행복한 나눔’을 10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서류상으로는 ‘이경희’죠. 비행기를 타거나 행정적인 일을 처리할 때 ‘이경희씨’하고 부르면 약간 반응이 늦어요, ‘어머, 나잖아’ 하고 말이죠.”
―인터넷을 검색하면 ‘고은아’로 젊은 연예인이 나오는 걸 알고 있나요?
“그 아이가 어떤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었어요. 저를 아는 분들로부터 ‘그 나이에 새벽에 무슨 시비가 붙었어?’ 하는 전화를 받았어요. 내가 여전히 활동하는데, 그 소속사가 ‘고은아’ 예명을 쓴 것은 실례를 한 거죠.”
요즘 젊은 세대에 낯익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부산에서 갓 올라온 홍익대 1학년 때 ‘난의 비가’(1965년)에 캐스팅됐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했다. 그녀의 실물을 우연히 접한 영화사 쪽의 대시였다. 한밤중에 집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비련의 여주인공이었어요. 아직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제 모습과 맞았는지 몰라요. 영화사는 파격적으로 제 모든 의상을 만들어줬어요. 심지어 잠옷까지도. 상대역이 신성일씨라 흥행도 괜찮았어요.”
―아, 이 길이 내 길이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나요?
“첫 촬영이 강원도 원통에서 발목까지 빠지는 눈 길에 원피스를 입고 애인 면회를 가는 장면이었어요. 하루 찍고서 ‘못 하겠다’며 돌아가겠다고 하니 스태프들이 애를 먹었죠. 그렇게 영화를 찍고서 대학에 돌아가니 빼먹은 강의로 적응이 어려웠어요. 영화사 측에서도 ‘한 작품으로 끝내기에는 네게 너무 많은 투자가 됐다’며 권했어요. 그러다가 영화배우가 된 거예요.”
―본인의 적성과 열정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성격이나 문화적으로는 안 맞았어요. 제 키가 165cm인데 당시 여배우치고 가장 컸어요. 학교 다닐 때는 뒤쪽이 늘 내 자리인데 배우가 되면서 앞에 나와야 했어요. 인터뷰할 때도 나와 다르게 포장해야 했어요. 영화사 측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배우를 물으면 한국 배우가 아닌 외국 배우 이름을 대라’고 주문했어요.
지적(知的)으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죠. 남자 배우는 ‘제임스 딘’ 여자 배우는 ‘피어 안젤리’, 그걸 외워 대답했죠. 지금도 피어 안젤리가 무슨 영화에 출연한 줄 몰라요.”
―선친이 서울 서대문에서 ‘동양극장’을 운영한 걸로 아는데, 배우가 된 건 집안 내력 아닐까요?
“재개봉관이어서, 그냥 상영하는 공간이지 영화계와는 상관없었어요. 아버지만 서울을 오가며 사업을 하셨고 가족은 부산에 살았어요. 그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어요. 어쨌든 아버지가 한 적이 있고, 지금은 제가 훨씬 큰 극장을 하고 있으니 이어진 것은 맞아요.”
―영화 데뷔한 지 2년 만에 열다섯 연상인 영화제작자 곽정환씨(당시 합동영화사 사장)와 결혼했지요?
“제가 ‘강재구 소령’을 시작해 ‘합동영화사’가 만드는 작품에 계속 출연했어요. 그러니 이분을 매일 한두 번씩 보는 거죠. 아직 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이분이 어머니의 허락을 받으러 밤에 집으로 찾아왔어요. 지나서 돌아보면 이런 걸 운명이고 팔자라고들 하죠.”
―영화배우로서 활동한 기간은 실제 10년이 안 되었지요?
“영화 편수로는 백 몇 편 찍었을 거예요. 당시만 해도 영화 열 편씩 겹치기 촬영을 했으니까요. 기억할 수 있는 작품은 얼마 안 되고, 찍다가 중단된 영화도 있었어요.”
―은퇴 계기는 결혼 생활 때문이었나요?
“제가 금자탑을 쌓다가 은퇴를 한 것도 아니고…. 결혼 뒤에는 밤낮없이 촬영하면서 모든 걸 던질 마음이 없었던 거죠. 그 무렵 KBS에서 ‘드라마를 하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왔어요. 그때만 해도 TV 드라마는 실내 스튜디오에서 했고, 밤새는 일도 없었으니 그쪽을 선택했죠.”
―드라마도 ‘제2공화국’(1990년)의 육영수 역이 마지막이었지요?
“그전에 벌써 TV 드라마도 안 하고 있었는데, ‘제2공화국’의 감독이 육영수 역으로 나를 찍은 거예요. 육 여사를 연상시키는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조용하고 정숙한 이미지에, 육 여사가 갖고 있는 목 길이 때문이었을 거예요.”
―목 길이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육 여사는 한복을 입으면 목선이 좋잖아요. 박근혜 후보에게도 그게 남아있는 것 같아요.”
- 고은아씨는 “젊은 날 영화판에 던져지지 않았다면 내 삶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정숙한 이미지라, 그런데 영화에서는 주로 관능적인 과부 역을 많이 했지요. 화제작인 ‘갯마을’(김수용 감독·1965년)에서는 ‘어린 과부의 땀에 젖어 엉겨붙은 귀밑머리와 옆 모습이 에로틱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는 평을 당시 받았지요?
“정말 주로 과부역이었어요. ‘며느리’ ‘과부’ ‘소복’ ‘물레방아’…. 한국문학전집을 바탕으로 토속물 영화를 많이 찍었으니까요. ‘갯마을’을 찍을 때 여자 조감독이 밤마다 제 방에 와서 교육을 시켰어요. ‘너는 러브신을 하면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남자를 쳐다보느냐?’며. 제가 ‘안 쳐다보고 어떻게 해요?’ 물으면 ‘얘, 쳐다보지 마’라고 했던 게 기억나요.”
―꼭 맞는지는 모르나, 영화판에서는 ‘남자를 알아야 좋은 여배우가 된다’는 말도 하더군요.
“그렇대요. 그런 제가 ‘갯마을’을 찍었으니, 후후. 연기자로서 적성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영화를 안 하고 평범하게 살았다면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진 않았을 거예요.”
―삶에 대한 생각이라?
“인기있는 배우가 되니 하루아침에 생활이 달라지죠. 버스를 타던 학생이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가 요금은 안 받고 ‘악수만 해달라. 이 손 안 씻겠다’고 하고. 인기란 이런 거구나를 실감했어요. 하지만 이게 과연 지속적인가. 촬영장에 가면 선배들이 ‘내가 왕년에 어떠했는데’ 얘기해요.
그 현재의 모습은 초라하고. 장차 나도 저럴까, 이런 물음을 자꾸 하게 됐어요. 제가 소중하게 여겼던 트로피의 꼭지가 어느 날 떨어지고, 상패에 나전칠기로 붙여진 글자도 벗겨졌어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게 헛것이 아닌가 묻는 거죠.”
―인기 추락의 상실감을 미리 두려워했나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몰라요(그녀의 동생은 이재철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 영화(榮華)는 풀꽃에 맺힌 이슬과 같다고 했거든요. 그게 제가 영원히 가야 할 길이라고 보지 않았던 거죠. 그런 생각이 들면서 영화판에서 점점 멀어졌죠.”
―남편은 계속 영화 제작을 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목사님 주례로 결혼했어요. 남편은 다행히 술을 못 마셨고, 교회에도 열성적이었어요.”
―남편이 ‘연예인 교회’를 설립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아니에요.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연예인들은 이질감 때문에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웠어요. 교계 일각에서는 연예계를 ‘사탄의 문화’로 보기도 했으니까요. 작년에 소천하신 하용조 목사님(온누리교회)이 전도사 시절 구봉서씨 댁에서 연예인 성경공부를 지도했어요.
곽규석, 신영균, 곽정환씨가 주축이었죠. 이들의 필요에 의해 서울 평창동에 ‘연예인 교회(현 예능교회)’가 세워졌죠. 지금 교인들은 99%가 일반인이죠.”
―1980년부터 기독교 방송에서 15년간 진행자로만 일한 것은 계기가 있나요?
“영화판에 던져지지 않았다면 제 길에 대해 묻지 않았을 겁니다. 어느 날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보성전문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고,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했어요.
돌아가실 때도 아침에 기도를 하다가 의식을 잃고 세상을 떠났어요. 유언도 가족 임종도 없이. 아버지가 왜 평생 기도를 하셨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아니겠지요. 아마 가족이 하나님의 길, 궁극적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신 게 아닐까. 그 무렵 기독교 방송에서 제의가 들어왔어요.”
―방송 진행은 남을 위한다기보다 어쨌든 자신의 직업이 아닐까요?
“방송에서 신앙 수기를 낭독했어요. 딱한 사연을 읽고 나면 그 계좌로 돈을 부쳐주기도 했어요. 남편이 사업을 하니 생활에 구애를 받지 않았죠. CF 촬영으로 들어온 수입은 모두 기탁했어요. 한번은 안기부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어떤 목사가 갑자기 교회를 고치고 사회적인 일을 벌이더라. 돈 추적을 하니까, ‘이경희’ 이름이 나왔다는 거예요. 그 목사님은 시국적으로 주목받았던 모양이에요. 저는 그분을 몰라요. 사연을 읽고 딱해서 돈을 보낸 거죠.”
―선생님 부부는 623억원의 자산가로 소문났죠?
“극장 건물 때문이겠죠. 현찰이 그렇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건물과 토지 세금을 내는 데만 숨이 차요. 대기업에서 하는 CGV, 롯데시네마 등에 맞서 우리 같은 토종극장은 몇 군데 겨우 명맥을 유지해요.”
그녀는 2003년부터 한국기아대책기구가 설립한 사회적 기업 ‘행복한 나눔(생명창고)’을 맡아왔다. 작년 매출은 18억원 규모다. 실제 가게를 운영하면서 쓰지 않는 물건을 기증받아 팔고, 그 수익으로 이웃을 돕는다. 그녀의 서울극장에도 임대를 주던 커피점을 ‘행복한 나눔’ 매장으로 내놓았다.
“당초 제의를 받았을 때 ‘젊은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 지금 대중적인 인기를 가진 연예인이 해야 영향력이 있다’며 사양하다가 도리없이 맡게 됐어요. 재작년에는 이사장으로 물러나고 대표로 박미선씨를 모셨어요.”
자리에 일어서자, 비로소 옆 탁자에 퍼즐 판들이 보였다. 이 곱게 나이 먹은 여인의 취미가 퍼즐 조각 맞추기라니.
“퍼즐 500조각이 다 비슷비슷해요. 하지만 비슷하다고 해서 제자리에 안 꽂히면, 마지막에 하나가 절대로 안 맞아요. 모든 것은 꼭 있어야 할 제자리가 있는 거죠.”
-조선일보, 201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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