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아들고 한 연설이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었다. 파묵의 아버지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평생 사업가로 살았다. 아버지는 말년에 아들에게 습작 원고가 든 여행 가방을 맡겼다. "내가 죽거든 읽어봤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눈을 감은 뒤 아들은 원고를 읽으며 아버지의 젊은 날을 돌아봤다. 파묵은 가족을 챙기느라 청춘의 꿈을 접었던 아버지에게 노벨상을 바쳤다.
▶시골집 2남6녀의 막내로 자란 박형준 시인은 '아버지처럼 농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사는 서울 반지하 방에 손수 쌀가마니를 메고 오곤 했다. 아들이 방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고 있으면 시를 전혀 모르는 아버지는 방해될까봐 말을 걸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글씨 그만 쓰고 밥 먹어라"고만 했다. 시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막 나온 새 시집을 관에 넣고, 아버지가 평생 갈던 밭 흙을 그 위에 뿌렸다.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자식들에게 멀기만한 존재다. 엄한 아버지를 가리키는 엄부(嚴父)나 가엄(家嚴)이라는 말을 들어본 지 오래됐는데도 그렇다. 얼마 전 통계청이 한 청소년 조사에서 27%가 어머니와 하루 두 시간 넘게 이야기한다고 했다. 반면 42%는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이 30분도 안 된다고 했다. 1955~63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남자들은 자식과 대화할 틈도 없이 일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래도 베이비부머들은 아버지 세대를 닮지 않으려고 자식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요즘엔 자식이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 같은 아버지'가 바람직한 아버지처럼 돼 있다. 엇나간 자식을 보고도 꾸짖기는커녕 눈치 보는 아버지마저 드물지 않다. 엊그제 광주광역시에서 쉰한 살 아버지가 여고생을 성폭행하고 도망친 대학생 아들을 설득해 자수시켰다. 아버지는 공개 수배 전단에서 아들 얼굴을 보곤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사건 현장을 찍은 폐쇄회로TV 동영상을 몇 번이고 본 뒤 아들이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따로 불러 설득하고 설득해 마침내 아들이 사실을 털어놓게 했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경찰에 전화를 건 뒤 아들을 데리고 경찰지구대에 갔다. "아들을 잘못 가르친 죄인"이라고 했다. 요즘 그럴 수 있는 아버지가 몇이나 될까. 아들의 잘못을 무작정 덮으려 하지 않고 아들이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게 이끈 아버지. 그렇게 결심하기까지 아버지는 얼마나 고민하고 눈물을 쏟았을까. 드문 부정(父情)이 악의 수렁에 빠진 아들을 건져냈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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