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가정

잘가요 엄마

하마사 2012. 5. 15. 18:13

마흔네 살 생텍쥐페리는 1944년 7월 코르시카섬 전투비행단 기지에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전 엄마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합니다. 작고 늙으신 사랑하는 나의 엄마, 이 시대는 왜 이토록 불행한 걸까요." "엄마, 제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엄마를 안아드리는 것처럼 저를 안아주세요." 7월 31일 이른 아침 '어린 왕자'를 쓴 작가이자 공군 소령 생텍쥐페리는 정찰기를 몰고 지중해로 날아오른 뒤 돌아오지 못했다. 이 마지막 편지는 이듬해 7월에야 어머니에게 전해졌다.

일본 국민작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는 1977년 자전소설 '내 어머니의 연대기'를 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꿈을 꾼다. '고향집 앞길 같기도 한 곳에서 어머니는 두 손을 휘저으며 누군가에게 빨리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주인공은 스물셋 젊은 어머니가 아기인 나를 찾아 헤매며 깊은 밤 달빛 쏟아지는 길을 걷는 모습을 상상한다. 어머니는 조용하고 심지가 굳었지만 때로 토라진 소녀 같았다. 1991년 세상을 뜨기 앞서 이노우에는 "내가 죽고 30년이 지나도 사람들 마음에 남을 작품"으로 이 책을 꼽았다.

▶소설가 김주영이 어머니의 삶을 100% 그대로 옮겨 적은 작품 '잘 가요 엄마'를 냈다. 서울 사는, 일흔 다 된 주인공이 새벽 3시쯤 시골 동생 전화를 받는다. "두 시 조금 지나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소설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혼자 힘으로 길러야 했던 한 여인의 삶과 죽음을 그렸다. 글자는커녕 숫자도 모르는 까막눈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과부하가 걸린 노동"이었다.

▶김주영은 '엄마는, 두 번이나 사내를 갈아치운 여자가 감당해야 할 이웃의 조소와 경멸을, 모질고 벅찬 노동으로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극복하려 했다'고 썼다. 그는 엄마가 안방 새아버지 곁을 떠나 썰렁한 건넌방에 건너와 잠든 그를 껴안은 채 흐느꼈던 때를 기억했다. 엄마가 흘린 눈물은 모로 누운 소년 김주영의 뒷덜미에 뜨겁게 젖어들었다. 소풍 때 말고는 점심을 먹어본 적 없는 소년은 '내게도 엄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쏟는다.

▶시 쓰는 김용택은 "나는 어머니의 가슴을 뜯어먹고 비로소 시인이 됐다"고 했다. 김주영은 "내 생애에서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마디뿐"이라고 고백한다. 김주영은 일흔셋이다. 이노우에도 어머니 연대기를 썼을 때 일흔이었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몸과 삶을 파먹고 또 파먹어도 끝이 없을 줄로만 안다. 제 머리 하얘질 때까지도 모르다 잿가루가 된 어머니의 유골함을 들고서야 아주 조금 깨닫는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2/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