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재조명한 전성곤 교수]
일본을 묶는 유일신 '일왕'… 정치적 필요로 재구성된 것
자국 외의 동양은 내려다본 오리엔탈리즘적 지식인들, 日 제국주의 논거 만들어
지금 한일 사태 해결하려면 이런 역사적 배경 깨달아야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비에 씻겨 말간 얼굴을 한 '소녀상' 앞에서 전성곤(41) 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저 같은 일본 연구자들은 지금처럼 한일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곤혹스럽지요. 지식인으로 할 말은 해야 하지만 자칫 더한 오해를 부를 수도 있고…."
전성곤 교수는“일본 근대학문의 토대를 닦은 학자들 사고 바탕에는 동아시아 주변국들을 내려보는 시각이 깔렸었다”면서“‘천황’을 정점으로 한 자기 중심의 인식틀이 지금까지도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김지호 객원기자 yaho@chosun.com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208/19/2012081901363_0.jpg)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는 신중했던 일본 정부가 '일왕 관련 발언' 이후 크게 반발하는 모습이다. 일본인들에게 '천황'이란 대체 무엇인가.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인종과 민족, 영토, 문화, 지역 등을 소통시키고 통합하는 상징이다. 근대 일본은 천황을 국가의 정점에 뒀고 일본 안팎의 이민족들도 '신민'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 점에서 천황은 '우리'와 '타자'를 구분해 주는 상징이자 일본인을 일본인답게 해주는 '유일신'이다. 그 속에 선민의식이 숨어 있다."
―왕실은 영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도 있다. 일왕은 뭐가 다른가.
"근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전에는 쇼군이 통치했고 천황의 존재는 미미했다. 메이지부터 다이쇼, 쇼와 등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라는 황실 조상신을 태양신으로 보편화시켜 지금의 천황상을 주조해 냈다. 천황을 전국에 순회시킨다든가 흰 말을 탄 모습을 선별 노출하는 등 국민 사이에 제국의 구심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서구에서 막 수입된 인류학·고고학·역사학·민속학 등의 신학문들이 '근대 천황'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나.
"역사학의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인류학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고고학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민속학의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일본 근대사상의 원류이자 제국으로 가는 길을 연 학자들이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일본 신화 재구성의 공모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도리이 류조는 일본중심주의를 위해 대만, 요동반도, 만주, 북해도를 조사한 '제국주의 시선'의 소유자였고, 일본판 융합론을 제창했다. '동아고고학'의 선도자 하마다 고사쿠는 한반도 남부와 규슈의 유물이 유사하다는 '과학적 실증물'을 통해 국경을 초월한 사유를 제창했다. 하지만 일본 천황이 살았다는 지역의 유물이 가진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자국중심주의를 뒷받침했다. 이처럼 네 학자는 서구 이론을 받아들여 일본중심주의를 재구성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이었다."
근대 일본‘식민 담론’의 초석을 놓은 학자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야나기타 구니오(민속학), 하마다 고사쿠(고고학), 기타 사다키치(역사학), 도리이 류조(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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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인 지식인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일왕을 학문적 주제로 삼는 것을 꺼린다. 거론하는 학자도 어느 선을 넘을 경우 우익단체 등의 테러를 걱정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금기가 되는 것이다. 일본 내부에도 자성의 움직임은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일본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면 해법은.
"무엇보다 감정적인 다툼의 소지를 줄여야 한다. 그 점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인식 기저에 자리 잡은 내적 오리엔탈리즘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근대로 가는 과정에서 '천황 제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것을 국가 내부의 지도층과 시민들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깨닫도록 하는 데 양국 지식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과의 현안에 대해서도, 인류 보편적 시각에서 문제를 보고 발언해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동아시아에서의 공존과 공영의 담론을 주도할 수 있다."
☞내적 오리엔탈리즘(Inner Orientalism)
'오리엔탈리즘'은 팔레스타인계 미국 영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가 1978년 출간한 책 제목이다. 18~19세기 유럽이 동양을 내려다보던 편향된 시각을 말한다. 사이드는 유럽 중심의 인식이 ‘열등한’ 동양에 대한 서구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했다. 전성곤 교수는 이 용어를 근대 일본의 인식론에 차용했다. 일본이 주변국을 바라보는 시선의 바탕에 일왕을 정점으로 한 자민족우월주의가 내재돼 있다는 뜻이다.
-조선일보, 201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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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日王, 독립운동가에게 사과하라"… 뭐가 잘못인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항의 서한'이 양국 갈등을 더 부추기고 있다. 그는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서한 발송의 표면적 이유로 내세우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대통령의 아키히토(明仁) 일왕(日王)에 대한 비판이 결정적이었다. 일본 전문가 Q씨는 "한국의 일왕 비판에 대응하지 않으면 더 이상 총리직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이 지난 10일 우리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독도를 찾았을 때만 해도 일본의 대응은 비교적 차분했다.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자신들이 원하는 '독도의 분쟁 지역화'에 이용하려는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러던 일본이 급변한 계기는 지난 14일 이 대통령의 일왕 비판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한국교원대에서 열린 '학교 폭력 책임교사 워크숍'에서 한 교사가 그의 독도 방문 소감을 묻자 "(일왕이) 통석(痛惜)의 염(念)이니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 없다"고 했다.
일본 정치인들은 이 발언이 나오기 무섭게 "예의를 잃었다", "무례하다"며 경쟁적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노다 내각이 추가 '보복 조치'에 착수한 배경에도 일왕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의 정치권이 일왕 비판에 대해 왜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부친인 히로히토(裕仁)는 1926년 즉위 후 식민 지배 시기에 우리 민족 전체를 박해하고 탄압한 인물이다. 태평양전쟁 당시엔 젊은 한국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전선에 내몰고, 꽃다운 처녀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끌고 갔던 '특A급 전범(戰犯)'이다. 우리 민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남북 분단도 그가 통치하던 일제 식민 통치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일본 왕실에 '한국에 오고 싶으면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주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요구다. 이 대통령의 발언 시점에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은 아니다.
1970년 12월 추운 겨울에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유태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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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일왕이 일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해 전범인 일왕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일본 왕실의 존속을 인정해줬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히로히토-아키히토 부자(父子)는 국제사회의 요구가 있을 때만 몇 ㎝씩 더 과거사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다.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는 헤이세이(平成)를 연호(年號)로 사용하고 있다. 사기의 '내평외성(內平外成)'과 서경의 '지평천성(地平天成)'에서 인용한 헤이세이는 '온 세상과 일본 안팎의 평화를 바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 왕실이 내세우는 평화를 위해선 진실로 잘못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는 용기부터 길러야 한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 사실을 상기해보라. 일왕은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아키히토도 브란트처럼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사진을 역사에 남기기 바란다.
-조선일보 기자수첩, 201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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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욱일승천기
예정대로라면 지난 7월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열린 그 유명한 바그너축제의 주인공은 러시아 출신 성악가 예브게니 니키틴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2년 전 이 축제의 개막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역에 발탁됐고 리허설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공연 직전 니키틴이 어린 시절 헤비메탈 밴드에서 웃통 벗고 드럼 치는 모습이 독일 TV에 방영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의 오른쪽 가슴에서 나치의 상징 문양( ) 문신이 발견된 것이다.
▶2차대전 후 독일에서는 히틀러 망령을 떠올리게 하는 나치 문양이나 제복, 나치식 경례가 법으로 금지돼 있다. 니키틴은 "문신은 어렸을 때 한 것이지만 내 인생에서 하지 말았어야 할 큰 실수였다"고 사과했다. 공연은 옷을 입고 하기 때문에 공연 중 문신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니키틴은 곧바로 바이로이트를 떠나야 했다. 한국 성악가 사무엘 윤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인공 역을 대신 맡아 훌륭하게 소화해 바이로이트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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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욱일승천기는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이었다. 생사람을 인체 실험 대상으로 삼은 731부대, 일본군이 죄 없는 중국인 100명을 누가 빨리 칼로 목 베나 시합했던 남경대학살의 현장에도 욱일승천기가 펄럭였다. 일본군 성 노예들의 한이 서린 곳, 우리네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징병 현장에도 욱일승천기는 나부꼈다. 일본이 패전 후 진실로 과거를 반성하고 용서를 빈다면 욱일승천기를 영원히 땅속에 묻어버리는 일부터 했어야 했다.
▶일본축구협회가 19일부터 일본에서 열리는 U-20(20세 이하) 월드컵 여자 축구대회를 앞두고 홈페이지에서 욱일승천기를 관중의 경기장 반입 금지 품목에 올렸다가 일주일 만에 삭제했다고 한다. 일본이 독도 문제, 댜오위다오 문제로 한국·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마당이기에 이 같은 번복의 배경이 궁금하다. 런던올림픽에서도 일본 체조선수들이 욱일승천기를 떠올리는 유니폼을 입고 나와 논란이 됐다. 일찌감치 나치 문양을 금지한 독일과 욱일승천기를 여태 떠받드는 일본의 격차만큼이나 두 나라 국격(國格)의 차이가 느껴진다.
-조선일보, 201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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