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어느 정치인생

하마사 2012. 1. 12. 19:35

돈키호테라고 해야 할지, 시대를 거스르는 지사(志士)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만나본 정치인 중 제일 별난 사람이 장기표(67)씨다. 5차례 9년간 투옥, 12년간 도피 생활, '서울대 법대 출신의 전설적 도망자', '재야(在野)의 대부'…. 그는 1992년 총선에 앞서 '왜 나는 합법정당 결성에 나서는가'라는 글을 발표하고 민중당을 창당한 뒤 서울 동작갑에 출마했다. 그는 초년 기자에게 노태우 정권에도, 김일성 체제에도 비판적인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때 지구당 사무국장으로 그를 뒷받침한 사람이 김문수 경기지사다. 장씨를 비롯한 51명의 민중당 후보는 모두 낙선했고, 당은 전국 득표율 2% 미만을 얻어 정당법에 따라 해산됐다.

그것이 20년 실패의 시작인지는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개혁신당, 무지개연합, 새시대개혁당, 푸른정치연합, 한국사회민주당, 새정치연대, 녹색사회민주당…. 그는 열 개가 훨씬 넘는 정당을 짓고 또 헐었다. 수년에 한 번씩 통화하거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아직도 정치를 하시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처지에 정치를 놓지 않는다는 게 기적처럼 보였다.

집안 살림은 부인이 논술·독서 지도를 해서 꾸린다고 했다. 사는 집은 서울 봉천동 25평 아파트다. 수배 중 만난 부인은 정치까지 말리지는 않지만 선거에는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그는 때만 되면 총선과 대선 등에 무일푼으로 나섰고 다 떨어졌다. 마산공고에 다닐 때 유독 수학을 잘했다지만 정치판의 수는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일까.

아마도 그가 국회의원이 되는 게 목적이었다면 벌써 됐을 것이다. 그의 운동권 후배 수십 명은 여·야로 나뉘어 국회에 들어갔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이회창 총재도 마찬가지였다. 2004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은 김문수 의원은 울면서 "형님이 고생하는 거 더는 못 보겠다. 전국구 최상위 순번으로 오시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동지들을 윗목에 놔두고 혼자 아랫목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어려운 판에 구색맞추기용 객(客)으로 합류하기를 사절했다. 그는 자신을 '시장민주주의자'라 칭한다. 국민 개개인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토대를 위해선 10%의 부유한 국민이 세금을 많이 내서 90%의 가난한 국민이 혜택을 보는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그는 20여권의 책을 냈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경제' '지못미 정치'는 청소년 권장도서에 선정됐다. '부부사랑 그 지혜로운 행복'이란 책의 저자도 그이다.

그가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과 함께 주도하는 '국민생각'이란 중도(中道)신당 발기인 대회가 11일 열렸다. 다시 실험에 나선 그를 만났더니 "사회보장제도를 안 하면 경제도 안 돌아가고 국민도 망하게 된다. 이제 시대가 그걸 알게 됐다"고 했다. "이번엔 반드시 집권세력의 일원이 되겠다"고도 했다. 한나라당은 집권 가능성이 희박하고, 민주통합당은 집권할 경우 정책이 춤출 것이 뻔한데다 대북정책을 믿을 수 없기에 반대한다고 했다.

여전히 장씨는 이상주의자일지 모른다. 그가 한 번 더 실패한다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이런 그를 두 딸은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둘째 딸은 아버지의 전기를 자신이 쓰고 싶다고 했다. 그를 실패자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치를 성직(聖職)처럼 아는 사람에게도 늦볕이 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조선일보, 201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