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한·미 FTA 놓고 최루탄까지 터뜨리며 충돌
국회는 이제 물리력 외의 다른 방안을 찾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럴 바엔 몸싸움 합법화가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 박두식 정치부장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이 어제 국회를 통과했다. 한·미 FTA의 국회 처리는 수십년간 되풀이돼 온 낯익은 방식으로 이뤄졌다. 여당은 군사작전 하듯 각종 위장전술을 편 끝에 야당을 따돌리고 본회의장에 먼저 들어갔고, 선수를 뺏긴 야당은 의장석 주변에서 구호를 외치며 의사(議事)진행을 방해했다. 과거 여야 충돌과 달랐던 것은 국회의원이 된 지 6개월밖에 안 된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의장석을 향해 최루탄을 터뜨린 신종 폭력 수법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 한·미 FTA는 여야 충돌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작년 말 여당의 예산안 단독처리 이후 여야 의원 50여명이 '몸싸움 방지 모임'을 만들었다. 한나라당의 국회사령탑인 황우여 원내대표와 FTA를 주관하는 국회 상임위인 외교통상통일위의 남경필 위원장이 바로 이 모임 소속이다. 이들은 최근 여야에서 각각 한·미 FTA의 합의 처리를 요구하는 서명을 받았고, 거기에 동참한 의원이 국회 전체 의원의 3분의 1에 가까운 90여명에 이른다.
야당의 조건도 좋았다. 작년 10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1·2·3위를 차지한 손학규 대표와 정동영·정세균 최고위원은 한때 적극적인 통상주의자였던 사람들이다. 손 대표는 경기도지사 시절 외국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였는가를 담은 '손학규와 찍새와 딱새'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누구보다 FTA가 대한민국의 미래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는 인물이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한·미 양국이 FTA를 타결지었던 노무현 정부에서 NSC(국가안보회의) 상임의장을 맡아 외교·안보·통상정책을 이끌었다. 그 시절 정 최고위원은 미국 사람들에게 "FTA는 한·미관계의 기둥"이라고 치켜세웠다. 정세균 최고위원은 통상 분야 주무장관인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이 세 사람이 이끄는 민주당이라면 한·미 FTA가 꼭 여야 충돌을 거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져볼 만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반대의 길로 갔다.
이들은 "'노무현 FTA'와 '이명박 FTA'는 다르다"는 식의 논리에 몸을 기댔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작년 말 재협상에서 우리가 자동차 등 일부 분야에서 양보한 것을 구실 삼아 반(反)FTA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나 작년의 재협상에 가장 반발해야 할 것 같은 현대자동차 등 민간기업들은 정작 FTA 조기비준을 요구해 왔다. 이것만 봐도 야권의 FTA 반대론이 정직하지 못한 주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야권이 막판에 FTA 반대의 가장 주요한 이유로 삼았던 ISD(투자자·국가 소송제도)는 노무현 정부 시절 타결된 내용과 한 글자도 달라진 게 없다. 정동영 의원은 자신의 입장이 오락가락한 것에 대해 "그땐 무지했었다"고 했다. 4년 전 야권의 대선후보였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벌거벗고 나서는 상황에서 FTA가 여야 충돌 없이 국회를 통과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지난 몇 달간 진행된 여야의 협상은 몸싸움을 향한 통과의례에 가까웠다. 여당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한 협상보다는 순식간에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단독처리' 카드에 끌렸고, 야당은 내부에서 나온 어떤 타협·협상 주장도 '적(敵)과 내통하는 이적(利敵)행위'로 몰아세웠다. 이런 분위기가 되면 협상은 위험천만한 선택이고, 오히려 몸싸움이 안전하고 편리한 방안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세계 9위의 통상대국에, 경제의 87.9%를 무역에 의존하는 나라에서 통상 분야의 가장 중요한 협정인 한·미 FTA가 최루가스 냄새가 진동하는 여야 충돌 끝에 통과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어제 국회를 누볐던 전사(戰士) 대부분이 그간의 전공(戰功)을 앞세워 다시 국회의원 배지를 달 것이고, 일부는 대선에 나설 것이다.
이럴 바에는 국회법에 '몸싸움 허용 조항'을 집어넣는 게 나을 듯싶다.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세계를 향해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 없이 "몸싸움은 한국 국회의 전통에 따른 적법 절차"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각종 현안 처리에서 몸싸움 외의 다른 방법을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우리 국회의 지적(知的) 수준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대신 해머나 전기톱, 최루탄 같은 무기는 쓸 수 없게 법으로 금지하면 국회의원의 안전도 보장될 것이고 지켜보는 국민도 마음을 졸이지 않게 돼 금상첨화일지 모른다.
-조선일보, 201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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