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부가 태어나서 '독만권서'(讀萬卷書)와 '행만리로'(行萬里路)를 해야 된다고 하였다. 30년 걸려서 이 과정을 끝내고 보니 무엇이 남았는가? 혼자 있을 때마다 자문자답해본다. 졸업장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하나 남는 것이 맛있는 집을 알아보는 안목이다. 중년 남자가 스스로를 달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맛있는 요리를 먹는 일 아니던가!
충남 서산에 가면 시청 앞의 꽃게장 잘하는 집을 가야 하고, 울산에 가면 고래 고기 잘하는 식당을 가야하고, 통영에 가면 굴밥집이 있고, 연산에 가면 오골계 잘하는 집이 있고, 괴산에 가면 버섯탕 잘하는 별미식당이 있다. 여수에 가면 서대 요리를 먹어야 한다.
박대 비슷한 생선이 서대인데, 봄철이 제철이지만 서대를 말려서 먹기 때문에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다. 보통 서대보다 3~4배 큰 서대를 '용서대'라고 부른다. 이 '용서대' 조림을 잘하는 집이 배가 닿는 여객터미널 근처에 있다. 이 용서대 맛을 알게 된 계기는 10년 전쯤에 만난 영광김씨 12대 종손인 김재호(69)씨 덕분이다. 여수의 만석꾼집 후손으로 여수를 대표하는 고택인 봉소당(鳳巢堂) 주인이기도 하다. 그가 여수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필자를 무작정 데리고 간 집이 여객 터미널 근처의 봉정식당이다. 식당을 가는 도중에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좌판을 깔고 100m쯤 죽 늘어서 있었는데, 봉소당 종손은 그 생선장수 아주머니들 손을 일일이 잡으면서 안부들을 물어보는 게 아닌가. "큰아들은 취직했느냐, 남편은 수술 잘 되었느냐, 셋째딸 대학에 들어갔느냐" 등등이었다. 100m좌판 길을 통과하는 데 어림잡아 30분은 걸린 것 같다. 그날 용서대 맛도 잊을 수 없지만,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필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난리를 겪어본 부잣집 후손의 처신은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오래된 부자의 경륜이 저런 거구나!'를 배웠다. 여수는 1948년에 '여순사건'이라는 혹독한 난리를 겪어본 도시이다. 평소에 주변 사람으로부터 인심을 잃었던 부자는 이때 죽창에 찔려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정작 여수 최고의 부잣집인 봉소당은 인명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돈을 쓰는 데 극히 인색한 졸부들을 볼 때마다, '난리를 겪어보지 않아서 저런 처신을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일보, 201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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