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고교 전문 심리상담사들 "들어만 줘도 80%는 문제 해결"
의논 상대 아버지는 0.9%뿐
하루 4명 이상 상담실 이용 "어른 생각에 별것 아닌 일도 아이들에겐 죽을만큼 심각해"
서울시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서울시교육청이 작년에 중·고등학생 3만78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425명(4.6%)이 우울증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의 '2010 청소년 통계'를 보면 15~24세 청소년 10만명당 사망원인에서 자살이 6.4명으로 가장 많았다. 지난달 여성가족부가 한국·중국·일본 청소년 457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 청소년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한·중·일 중 가장 낮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울시와 시교육청은 올해 3월 1일부터 시내 중학교 377곳(배치율 100%)과 고등학교 165곳(53%)이 자체적으로 전문심리상담사를 고용할 수 있도록 했다. 2014년까지 시내 모든 초·중·고교에 이를 확대할 계획이다.
서울 불광동 세명컴퓨터고 전문심리상담사 김정혜(24)씨를 통해 들은 학생들의 이야기는 생생했다. 김씨는 호서대 산업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시교육청에서 하는 청소년 상담센터 '위(WEE) 센터' 등에서 상담사로 활동해왔다. 김씨는 "아이들에겐 심각한 고민이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아이들의 겉모습만 보고 어른들이 문제를 지나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활달하던 A양은 어느 날 김씨에게 상담 신청을 하더니 갑자기 "집에 가도 행복하지 않다. 우울해 죽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A양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다소 가부장적인 아버지 앞에 어머니가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새벽에 우연히 보게 됐다. 그때부터 '아빠=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아무에게 이런 고민을 얘기하지 못하면서 아빠에 대한 미움과 거리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A양은 "아빠가 너무 미워 죽이고 싶다"고까지 했다.
- ▲ 세명컴퓨터고 전문심리상담사 김정혜씨가 자신을 찾아온 학생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씨는“어른들이 조금만 신경써주면 학생들은 훨씬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B군은 갑자기 환각과 환청 때문에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상담 도중 "저기 있는 칼 든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김씨는 "다른 아이와 비교를 당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쌓인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터진 경우"라고 했다. 상담실을 찾은 C군은 여자친구와 '진도'가 너무 빨라서 고민이었다. 김씨는 "다른 학교의 전문상담을 하는 동료도 예상보다 학생들의 고민이 너무 많아 놀라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무엇보다 아이들에겐 고민을 들어줄 어른이 필요하다"고 했다. "많은 학생이 '진짜 죽고 싶어요'라며 고민을 털어놓죠. 그런데 한두 시간 얘기하고 나면 '이제 좀 살 것 같다'며 미소를 지어요.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80%는 해결되는 거죠."
여기에 경험자의 진심 어린 조언이 곁들여지면 아이들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학기 초 거의 학교에 나오지 않던 E군은 상담 후 다시 학교를 나오기 시작했다. 김씨가 상담을 하면서 성적을 떠나 학교는 나와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하자 '나를 위해 진심으로 충고해준 사람은 선생님이 유일해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마음을 바꿔 먹었던 것이다.
김씨가 아이들과 만나는 상담실은 이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다. 3월부터 현재까지 상담실을 다녀간 학생은 120명 정도로 하루에 4명 이상이다. 5월 17일까지 예약이 꽉 차 있고 쉬는 시간엔 상담 예약을 하러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한다.
처음 김씨가 학교에 왔을 때 학생들 사이에서 '상담실은 혼나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새 선생님에 대한 경계심도 있었다. 김씨는 사흘간 모든 교실을 돌아다니며 "상담실은 선생님과 편하게 얘기하는 곳"이라고 알렸다.
학교는 상담실을 위해 교무실과 독립된 약 10평짜리 방을 하나 내줬다. 꽃무늬로 도배된 상담실엔 편안한 소파와 따뜻한 차가 준비돼 있고 한쪽엔 칸막이로 가려진 공간도 있다. 김씨는 "다른 학교는 교무실 한쪽에 상담실을 만들어 학생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도 있다"고 했다.
김씨는 학교에 배치된 상담전담 교사도 필요하지만 부모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월 여성가족부 발표를 보면 청소년 중 50.4%가 고민을 의논하는 상대로 친구를 꼽았고 어머니는 29%, 아버지는 0.9%였다. 친구끼리 털어놓을 때 공감(共感)을 얻을 순 있지만 조언이나 해결 방향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씨는 "무조건 '고민 있니'라고 묻기보다 다가가려고 노력하면 아이들이 자연스레 마음을 연다"고 했다. "바쁘신 아빠들은 진심을 담아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해주세요. 아이들은 '닭살 돋는다'면서도 굉장히 행복해합니다." 김씨는 "어른이 봤을 때 별것 아닌 고민도, 아이들에겐 죽을 만큼 급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조선일보, 201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