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사업관련 기독교의 생태보호론 (이명진목사칼럼 )
서 론
(호세아서 4:1-3)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매년 스코트랜드만한 면적의 열대살림이 사라져간다. 인도는 원래 삼림의 85% 상실했다. 20세기 개발도상국들은 전체 삼림의 50%이상 파괴된다.미국인77%, 미국 어린이90%는 목 속에 안전 기준량 이상 납이 들어있다. 1만명 이상 농약중독으로 사망한다 미국인은 매일 5 파운드의쓰레기 버린다. 4만명이 농약중독으로 질병 앓고 있다.
오늘의 시대에는 이상기후, 환경호르몬, 대기오염 ,수질오염, 유전자 조작 ,각종 암과 유전병, 산림파괘, 오존층 파괘, 사막화현상등이 심화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오늘날 자연환경 파손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괘는 가장 시급하고도 절박한 문제이다 환경호르몬으로 인해 남자들이 정자밀도가 50년전보다 50%가 감소하였다 산림, 습지같은 동식물들의 서식지가 점점 파괘되고 있다 현재 매년 1%의 생물이 멸종되어 가고 있다 20-30년 사이에 지구상의 생물의 1/4이 멸종하리라고 예측한다 최근에 나타난 광우병 돼지콜레라 조류독감 등과 같은 이상한 질병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깨트리며 불러들인 질병들이다 인류는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계속 살아갈수 없다 천연자원도 고갈될 뿐만 아니라 환경재난을 감당할수 없기 때문이다
환경문제는 신앙의 문제이다 환경문제는 단순한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환경보전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동일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파괘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요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이다
오늘날 물살처럼 교회에 질주해 들어오는 문제중 하나가 환경파괘의 문제이다 즉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폭력이다. 자연에 대한 폭력도 폭력이다 자연에 대한 폭력은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것이며 그분에 대한 도전이다 지금 세대같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무시하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받는 세대는 없었다 (죌레)
한국교회는 환경보전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같다 환경보호는 환경운동가만의 일이 아니다 이시대를 진정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마16:2-3)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우리는 환경 재앙시대에 살고 있다 벨사살 왕 연회석 상에 나타난 손가락 글씨처럼 우리를 경고하고 있다 (단5장) 문제는 해석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해석해 주어도 믿지않는다 인간의 욕망은 자기를 파멸로 던져넣을 만큼 강렬한 것이다 그러기에 위기를 맞이면서도 고칠줄 모른다 이 지구상에서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종은 오직 하나 인간이란 종밖에 없다 (라이언) 인간은 이 지구에 존재하는 암세포가 아닌가?
환경파괘가 심화되면서 그 책임이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성경, 기독교의 가르침에 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생태학자들이 많다 과연 그러한가? 생태학자들은 환경보존을 이유로 우리나라 4대강 살리기 사업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선동하는데 기독교의 환겨보호론은 무엇인가 어덯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어진 절박하고도 시급한 문제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본 글은 이런문제에 다소라도 해답을 주기위해 쓰여진 것이다
I. 자연관
환경, 환경문제를 알기위해 자연에 대한 올바른 관(觀) 과 성찰이 필요하다
현대사회의 환경오염의 근본 원인을 서양의 자연관에서 찾고 서양의 자연관을 대체할 것으로 동양의 자연관을 주장할 만큼 동서양의 자연관은 큰 차이를 보인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자연관을 갖게 된 이유는 지리적,문화적으로 다양할 것이나 정신세계의 큰 틀을 구성하는 종교는 자연관의 성립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자연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기독교 사상에서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오랜 세월동안 동양의 대표적 종교로 여겨지는 즉 유교, 불교, 도교의 자연관에 대해서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A. 서양의 종교와 자연관
1.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
자연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는 “태어나다”라는 뜻을 가진 physis로, 이것은 모든 것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쇠퇴하여 사멸하는 것을 가리키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자연은 “그 자체 안에 운동 변화의 원리를 가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우주의 생물학적 양상으로 국한시켜 풀이하기 위해 동물이라는 도식 개념을 설정했고, 이에 따라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일종의 거대한 동물이라고 보았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개별 사물들은 본질, 정령, 영혼을 소유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런 영혼들이 살아있는 것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물질을 구성하는 한 원소가 다른 원소를 변하게 하거나 본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스스로 다른 원소로 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와 같은 것으로 파악했으며, 모든 것이 더불어 살아간다고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그리스 시대의 고전 사상
대체로 인간을 자연에 대한 명령자로 인식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본 것으로 인간이 이처럼 동물보다 나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고, 인간의 역사가 쇠퇴하는 것을 막기위해 환경에 변화를가하는 인간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보았다.
3. 기독교적 자연관
신은 남자를 창조하고 에덴동산을 동식물로 가득 차게 한 후에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한다. 그리고 아담이 동물에 이름을 부여한다. 이것은 동식물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만 죽은 뒤에도 영생하는 피조물이므로 다른 동물과는 그 지위가 처음부터 달랐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는 동물을 다스리는 인간의 능력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변모시키는 것은 신성한 신의 계획의 일부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은 유럽인의사고에 지속적인 영향을미쳤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장 28절 말씀으로 서구문명의 바탕이 되는 기독교의 자연관이 가장 잘 드러난 구절이라고 생각된다.
기독교 사상의 모태가 되는 고대 히브리인의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에게 대적하는 자연이라는 별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자연이라는 개념은 없고 다만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자연은 위대한 창조주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신은 세계가 존재하게 하는 근원자 이며 만물의 제1원인이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신의 창조질서에서 오는 것으로 본다. 이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서의 명령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 기독교 신학에서 현실의 세계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과정이라고 보고, 이것은 각각 창조, 구원과 최후의 심판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그 과정은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끝이 있는 하나의 연결된 ‘선’의 개념으로 보았다. 그 과정은 신에 의해 빈틈없이 짜여져 있고 질서가 잡힌 완벽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사이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신의 뜻의 발현이다.
4. 기계론적 자연관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체를 분리하는 2원론의 자연사상을 확립했었다. 그는 정신과 물체가 완전히 독립된 세계의 실체이며, 그 중 물체의 세계가 자연이라고 했다. 그 물체는 무한히 분할될 수 있으며, 분할된 물체의 질적 차이는 객관적으로 계측 가능한 형태ㆍ크기ㆍ운동 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자연학의 기본 명제는 물질은 작은 부분(입자)으로 형성되지만 무한히 분할될 수 있으며, 모든 현상은 입자의 기계적 상호작용으로 파악된다. 이것이 바로 기계론적 자연과학이며, 거기서 자연을 기계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기계론적 자연관이 성립된다. 기계론적 자연관은 뉴턴에 의해 더욱 확고해졌다.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 확립된 기계론적 자연관은 양적인 갈릴레이의 접근방법을 발전시킨 결과로서, 결국 정신과 물질을 분리시킴으로써 물질세계의 과학적 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게 하였고, 아직도 과학계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이 되고 있다.
B. 동양의 종교와 자연관
1. 도교의 자연관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했던 시기에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발생․전개된 도교는 유교와 함께 동양인들의 의식 속에 거대한 세계관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도교는 동양인의 정신으로 대변될 만큼 동양인의 전통적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으로는 ‘도’이다. 도는 천지만물을 발생하게 하는 것으로써 노자는 도가 변화하며 나타내는 천지만물의 발생원리를 자연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도교에서 비롯한 동양의 자연관은 ‘자연’을 명사로 보는 서양과는 다르게 천지만물을 발생하는 ‘상태’를 자연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자연은 천지만물을 표현하는 존재의 의미라기보다는 근원으로서의 도가 움직이며 천지만물을 발생하는 원리 또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써 도와 천지만물과의 관계는 사람에 비유하면 혼과 몸의 관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도교의 자연은 바로 도의 상태이며, 도의 상태는 또한 무(無)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궁극적 존재로부터 살아있는 모든 만물은 그 내재적 생(生)에 의해 자생자화하는 자연으로 존재케 된다. 그리고 자연의 도는 인위를 나날이 덜어내어 마침내는 완전한 무위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서 무위는 인위가 제거된 자연한 상태를 의미하고, 완전한 자연 상태에 이르도록 하며, 만물이 자생자화 하도록 하여 안정되고 자성함을 일컫는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굳이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목적의식, 즉 인위를 버리고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이치에 맡길 때 일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도교의 이러한 목적의식의 부정은 바로 도의 자연적 실천성, 즉 무위로 나타난다. 자연은 궁극적 존재의 무주재성(無主宰性)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자기 그대로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도교의 도의 특징은 바로 자연의 특징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도교에서의 자연은 곧 무위이다.
무위는 도의 궁극적 운동방식으로서 무위에 의해 무불위의 결과가 있게 된다. 즉 도의 생성과 복귀 운동은 그 자신의 자연함을 따르는 무위에 의한다. 노자는 이렇게 자연을 따르는 무위를 존재론적 영역에서 궁극적 실천의 영역으로 전개한다. 다시 말해서 근원적 존재의 순수한 운동양식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 인간의 행동양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현상세계의 인간 역시 근원적 존재의 나타난 모습이며, 우주 만물의 일부분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위는 근원적 존재의 운동양식인 동시에 인간의 순수한 행위에 대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만물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고립된 존재로 구분될 수 없으며 그 체계의 중심이 도추이고 도추를 핵심으로 할 때 자연의 절대평등인 천균이 된다는 것이다. 도가들은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관심을 보여 왔다. 그리고 그런 태도 때문에 이들에 의해 과학기술상의 업적이 상당히 달성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가사상에는 과학발달과는 거리가 먼 태도 역시 보이기도 한다. 그 하나는 도가사상의 강한 회의적 경향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신비적 특징이다. 지식에 대한 근원적 회의 속에서 도가사상가들은 적극적으로 자연현상을 연구하고 그 체계적 지식을 쌓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그 신비적 경향은 도가사상의 전통 속에서 신선술, 연단술, 방중술 등을 크게 발달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분야는 사실상 당시에는 상당히 진보된 과학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후에 적지 않은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2. 불교의 자연관
불교는 원래 인간 고뇌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인간중심의 종교이다 자연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다 불교는 인간의 모든 고뇌 108번뇌가 인간 욕심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런 고해의 바다에서 해탈하는 것은 수도를 통해 깨닫는 것이다 무엇을 깨닫는가 ? 세상 우주만물은 모두 실체가 아니며 끊임없이 변하고 회전되는 것으로 그것에 어떤 영구적인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서 모든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 초기에 천태종의 사명지례(960-1028)는 인간 중심의 불교의 가르침을 넘어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내재가치를 인정하고 아울러 미물이나 무생물인 벽돌조각도 불성을 함유한다는 독장적인 사상을 수립하고 전퍼하여 오늘날 생태학적 컨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존재에 대한 법공(法空)을 주장하는 불겨가 갖춘 근본정신과 응용논리는 미래 환경보전운동을 담보할수 있는 무궁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동국대 최동순 교수) 한국의 원효대사는 화정(和淨) 사상으로 만물의 평등을 주장하며 자연의 소중함을 앨깨웠다 원효는 사물의 수단가치를 지양하고 사물 그자체가 갖고 있는 본질적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 화정을 이루는 것은 일심(一心)을 통해서이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이 인연 관계에 따라 서로 맺음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다. 물질의 근원은 단단함을 뜻하는 땅과 축축함을 뜻하는 물, 따뜻함을 뜻하는 불, 움직임을 나타내는 바람으로 이루어진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하는데, 바로 이 네 가지 요소가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자연계라 보았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물질의 순환 및 생명의 사멸과 탄생은 모두 연기의 법칙에 따른다. 모든 우주의 현상은 개체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마음 표현까지도 모두 업으로 나타나는 인과의 고리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끝없는 윤회를 거친다. 따라서 한 개체의 태어남과 죽음은 언제나 이 연속적인 윤회 안에서 가능하며, 이것은 우주 안의 모든 것이 결국 떨어져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일련의 원인에 의존하는 존재로 자연을 보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로 의존적으로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자연관에서는 인간과 자연은 일체불이의 공존을 이루고 있으며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지속되는 이이불이의 관계이다. 즉 불교의 자연관은 의정불이(依正不二)로 표현할 수 있다. 불교의 기본 사상은 이 의정불이의 자연관에서 비롯되어 자연과 인간의 공존관계에서 비로소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고, 인간의 내부에 부처의 성질이 있고, 인성 속에 천명이 들어 있다고 보게 된다. 불교의 자연관에 따르면 자연과 인간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편견과 아집으로부터 탈피하여야 하며 양자의 관계는 차별없는 평등관계로, 축출없는 동반관계로, 상충없는 상보관계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3 유교의 자연관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유가의 근본정신은 인(仁)에 그쳤고 자연에 대한 관심에는 있지 않았다. 혼탁한 세상에 대한 대처를 고민했던 사상가들에게 자연은 그들의 관심사 밖의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공자가 관심을 두었던 부분은 오직 인간에 대한 문제였을 뿐 그 외의 실용적인 부분에 대한 성찰은 배제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그는 농업을 중시하지 않았고, 대중들에게 특정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포괄적 교양인이 될 것을 피력했으며, 모든 생산 기술직에 대해 '천한 일'이라고 일컬으며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후대의 유교 사상 역시 공자의 이러한 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유교에 있어서의 자연관은 상당히 빈약하고 미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성리학의 자연관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자연을 객관적인 물질적 존재로만 파악하지 않고 그에 못지않게 규범적인 관념의 존재로 파악하였다. 가령 천체에 일식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은 왕조의 불길한 장래에 대한 천(天)의 계시로 받아들였으며 오랜 가뭄이 계속되면 그것은 지배 군주의 악덕에 대한 천의 분노로 해석하였다. 천은 신적인 성격을 가진 동시에 자연현상 그 자체와 혼합해서 존재하며 자연현상을 통해서 스스로를 인간에게 계시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천의 뜻을 배반하여 죄를 짓고 악을 쌓으면 천은 자연현상을 통하여 벼락을 내리기도 하고 가뭄이 계속되기도 하는 것이다. 역으로 천의 뜻을 받들어 덕(德)을 펴고 선(善)을 행하면 천은 풍우를 순조롭게 하고 성좌(星座)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실학의 자연관
조선의 유교문화에는 다른 동양의 여러 나라의 경우와 비슷하게 초월적인 신에 의하여 인간과 사회가 규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연 그 자체와 인간사회를 일체화시킴으로써 자연은 해방의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규제의 원리가 되었다. 그로 인해 실학의 경우 '자연으로부터 벗어나자'는 형태로 전개된 경향을 보였다. 실학은 자연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규범적 인식을 극복하고 순수한 물질적 존재로 객관화하는데 있는 것에서 전통적인 자연관과 차이를 보였다. 실학사상에서는 자연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배원리를 깨트려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교에서 자연은 만물을 낳고 성장시키는 생명의 원천이다. 유교적 세계관에는 서양 종교에 보이는 인격적인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대 중국 사회의 ‘천天’ 또는 ‘제帝’의 개념에는 서양의 하나님처럼 인격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단지 주재자, 조정자로서 인식되었을 뿐이다. 그마저도 공자 이후 천天이 점차 인간과 사물의 내재적 원리로 전향되어 감에 따라 인간과 사물에 있어서 초월적인 천天의 능동적 역할은 축소되었다.
“중국인의 세계관은 유럽과는 전체적으로 다른 사상 계통에 의거한 것이었다. 모든 존재물의 조화로운 협동 작업은 존재물 자체에 대해 외적인 초월적 권위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물들이 우주의 패턴을 형성하는 전체의 계층 가운데 모든 부분을 구성한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났다. 따라서 그들이 따른 것은 그들 본성의 내적 지시였다.” 이러한 유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만물이 생장生長하는 힘은 인격적인 창조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생명력에 기인하는 것이다. 자연의 본성이 끊임없는 생명의 재창조에 있다
요약
자연을 신의 피조물, 즉 객체로 보는 기독교 사상에서 비롯한 서양의 자연관은 자연은 원시적이고 야수적인 상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하여 통제되고 빚어질 때가 최선의 상태라는 의식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서양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별개의 관계로 보고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자 현실세계에 대한 목적론적 목표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은 현실세계의 부와 명성을 목적한 도구로서 이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용을 위해 자연현상에 대한 분석과 검증을 통한 현실적 이론이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서양의 자연관과는 다르게 유불선을 기초로 한 동양의 자연관은 자연을 객체로 보지 않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 인간은 자연에 비해 우월한 지위에 있다거나 하지 않고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자연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에 순응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자연현상을 대할 때도 외적 양태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감상을 통해 자아의 내면적 성숙을 기대하는 우주중심적 시각을 가지게 된다.
II. 환 경 관
A. 환경의 개념
1.환경이란 무엇인가? 환경의 일반적인 개념
환경이라는 용어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적 환경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일을 구성하는 자연의 조건을 말한다. 지리적 조건, 기후적 조건, 토양, 수질, 공기 등의 여러 가지가 있을 분 아니라 이러한 조건들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중첩적인 자연조건들이 있는 것이다.
환경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유형. 무형의 모든 객체를 뜻한다.
환경을 자연환경(natural enxironment)과 생활 환경(lixing enxironment)으로 나누고, 자연환경은 지하, 지표, 해양 및 지상의 모근 생물과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비생물적인 것을 포함한 자연을 총칭하며 생활환경이란 대기, 물, 폐기물, 소음, 진동, 악취 등 우리의 일상행활과 관계되는 환경을 의미하고 있다.
2. 자연, 환경 그리고 창조
지구환경위기를 둘러싼 논의에서 자연, 환경, 생태학, 창조질서 등의 개념이 자주 언급된다. 이 모두가 비슷한 내용들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이 단어들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인식과 이해를 갖추어야
.
우선 '자연'이란 개념을 살펴보자. 자연은 생물학적 의미와 형이상학적 의미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자연은 동식물의 생물과 산과 바다, 광물자원같은 무생물 전체를 의미한다. 한편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자연은 인공적인 것과 구별되는 본래적인 것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자연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소여성(所與性, 부여된 바)이다. 여기서 자연은 법, 역사, 문화, 이성 등의 반대개념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나 '도란 자연을 본받는 것(道法自然)'이란 표현에서 보듯이 윤리적 규범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한편 '환경'이란 단어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자연환경은 물론 사회적 환경, 문화적 환경 등도 포함된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환경이란 말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자연을 인간의 주변세계화하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가 바탕이 됨을 알 수 있다. 한자어로 環境은 '고리', '원', '두른다'는 뜻의 環과 '지경' 혹은 '경계'를 뜻하는 境이 어우러진 말이다. 인간을 둘러싸는 것, 인간의 주변이라는 의미로써 다분히 인간중심주의적 자연파악임을 알 수 있다. '환경보호', '환경보전'이란 구호 속에서 다분히 그같은 인간중심주의적 가치관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독일의 사상가들 가운데에는
'환경' (Um-welt)이라는 말 대신에 '공동세계'(Mit-welt)라는 말을 제안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생태학이란 본래 생물학의 한 분야로서 생물체 혹은 생물군과 자연환경 사이의 상호의존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개념이 중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을 상호 관련된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생태계', '생태학'이란 말은 인간과 자연을 공존공생의 관계로 파악하는 전일적(holistic)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이 개념은 자연을 기계역학적 구조, 즉 죽어 있는 물질로서 파악했던 근세의 자연과학적 자연관에 대한 대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기독교회나 신은 자연이나 환경이라는 개념 대신에 '창조질서'란 개념을 사용한다. 창조란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고백에서 출발한다. 성서가 말하는 창조 이야기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해명에 관심하기 보다는 인간과 우주 전체에 대한 근원적 언급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과 자연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신앙은 자연으로부터의 인간해방과 동시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창조신앙을 통통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자연은 더 이상 신이 아니며, 인간이 숭배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마음대로 착취하거나 억압해도 되는 대상이나 물건도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만 자연을 돌보고 가꾸어야 할 청지기적 사명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오늘 우리시대의 사회문제 중 가장 크고 근본되는 지구환경위기 문제는 바로 자연에 대한 올바른 개념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간중심주의적 자연이해나 자연중심주의적 자연이해를 극복해야 하겠다.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윤리적 신앙적 책임관계를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자연이해가 요청되고 있다.♣
3. 환경의 속성
(1)변화의 속성=환경의 모든 속성은 계속변화한다 단순에서 복잡으로,획일에서 다양으로, 불안정에서 안정으로변한다
(2)평형화의 속성=환경은 전체적으로 보아 상호작용함으로서 일정수준을 유지하게된다
(3)자기조정의 역활=환경,생태계의 각개체는 그의 생존을 위해 자기환경을 적응해가려는 속성을 가진다(=보정작용) 이러한 자기조정과정이 진화이다.
B. 환경문제, 환경오염
1.환경문제;
환경이 오염되고 파괘됨으로써 생태계의 조화와 균형이 깨어져 인류 생존에 위협을 주는 일체의 현상을 말한다
2.환경 문제를 인식하게 된 배경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환경문제 인식은 바로 공업화 사회가 촉진되면서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환경파괴로 인해 대두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3.환경문제에 영향을 주는 요인
환경문제에 영향을 주는 요인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인구의 증가다. 지구상에 더 많은 인구가 살게 됨으로서 소비생활의 규모가 점차로 커져 온 것은 자연히 자연환경을 대규모로 가공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고, 그 규모가 커짐으로써 가공의 단계를 넘어서 파괴의 단계에까지 진입한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4.환경오염(공해)의 일반적인 개념
공해란 공공에 미치는 해, 산업의 발달, 교통량의 증가에 따라 부근 주민이 정신적, 육체적,물질적으로 받는 여러 가지 피해와 자연 환경의 파괴, 즉 소음, 진동, 매연, 먼지, 악취, 폐수, 지반침하, 유독가스, 방사선 폐기물 따위로 인한 피해를 말한다.
5. 환경오염의 특징
(1)발생원인이 복잡하고 다양해서 그로인한 영향과 피해정도의 측정과 예측이 어렵다 일단 오염이 되면 원상태로 돌아가기가 무척 어렵다 원상태로 돌이키는데 다량의 에너지가 요구되며 이에너지는 또한 제2의 오염을 발생한다 사전예방일때만큼 효과가 없다
(2)자각증상이 없다 소리없이 은밀하게 진행된다 한계치를 넘어야 증상이 나타난다
(3)경제적으로 볼대 환경오염은 시회적비용이요 경제적약자가 오염에 먼저 너출되고 큰 피해를 받는다
6.환경오염의 영향
(1) 오염물질이 인체에 축적되어 각종 질병을일으키고 신체조직에 이상을 일키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된다
(2) 자연생태계가 파괘되어 생물계의 균형과 조화가 깨지고 기후에 이상을 가져와 생존에 위협을 초래한다
(3) 자원을 구갈시키고 노동력을 저하시켜 산업기반을 약화를 초래한다
(4) 오염으로 추가비용을 증가시켜 경제성장을 둔화시킨다 그리고 사회적비용(세탁비,정수시설,기관지염 방음시설등)을 증가시키게 된다
(5) 기타 정서생활을 침해하고 토지 오염으로 지가하락, 학교학업을 방해한다
7. 환경철학과 환경파괘 원인과 해결
환경철학의 탐구 영역은 생명의 문제, 과학기술의 재검토, 과학 혁명의 구조와 방향, 생산 윤리, 소비 윤리, 가치관의 문제, 그리고 생산약식의 변동과 관련한 새로운 사회체제론,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재검토 등 많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의 문제는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다
*환경의 파괘 주범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을 망쳐놓고 있다.
*인간의 인생관,가치관, 사회의 여건과 가치관에 따라 자연환경에대한 개념도 달라진다
*인간의 노력과 국가정책에 따라 환경문제도 해결될수 있다
C. 현대 환경론의 구분 D . 페퍼
1.. 현대 환경론의 일반적 구분
(A) 이데오로기에 의한 구분 ( 이데로로기-신념체계):환경운동 초창기
1) 생태지향적 (Ecocentrism)
-초자연주의 사조에 기인한 것. 자연은 인간의 유용성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 생물도 그자체로서 인격적 존재이다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수용력이론=“초과되면 멸망한다” 종의 다양성은 안정에 기여한다
-<성장한계론> <생존을 위한 투쟁> <작은 것이 아름답다>
-종류;@보수적 생태지향주의=성장억제파 성장한계론 구명선윤리, 환경보호.
@진보적생태지향주의(신화경론자)=급진적 행동주의자들. 계몽을 통한 개인이나 사회조직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에 근본적 변화를 추구한다
생태학의 4대 원칙-베리 코모너 <알기쉬운 공해추방방식> 카톨릭 정의평화연구소
].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상호연관의 법칙
2. 모든 것은 어디에론가 간다(질량보전의 법칙. 지구 쓰레기는 누구도 없앨수 없다.
자연계에 내버린 오염물은 인 간에게로 돌아오게된다
3. 자연이 가장 잘안다 자연은 놀랍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고 안정을 취하고 있다
인공의 것은 자연을 파괘하기쉽다
4. 공짜점심은 없다.
자연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한다 거저되는 법이 없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자연은스스로 존재할권리를 갖는다 사람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보전 되어야한다 자연이 가장 잘안다 자연의질서속에서 살아야행복하다 인간도 자연의일부다
*과학기술은 자연환경을 파괘시킨다. 자연스스로 회복되고 자정할수있는 한계를 넘으면 기술도 소용없다
*생태계는 서로 연계되어 있기에 하나의 생태계가 파괘되면 생태계전체가 망가진다 과학기술이 생태계를 파괘한다
*과학기술의 무한한 발달을 억제시키고 도덕적 각성등을 통해서 환경파괘를 막아야한다
문제점:-
*생태주의자들은 인간중심이 아닌 자연중심을 주장하나 결국인간중심의 사상이다--자연을 잘 다스리면된다는것
*환경파괘방지를 위해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멈추어야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함.
*과학기술발달 자체가 환경파괘주범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잘못 사용한것이 문제이다
*양자택일의 논리이다 자연이냐 ? 인간이냐? 기술발전이냐? 중단이냐? --더 나은 방안이 제시되면 무용지물이된다
*도덕적각성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도덕은 그 누구에게나 옳고 유익이있는보편타당성이 있어야하는데 생태주의 해결방식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모든개인에게 동시에옳고 만족을 줄수없다
**. 생태중심주의 비판
... 생태계는 스스로 자신을 기르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한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즉 자기조직(auto-organizao)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따라서 지금이니까(즉 지금처럼 사태가 악화돼서) 그렇지 그 자체로 본다면 (에덴)동산이 스스로 자신을 기르고 보호하기 위해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증스럽게도 동산을 더럽힐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조화롭고 자기조직적이며 자기충족적인 자연을 방해만 하는 불필요한 존재, 즉 "남아도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그런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불가피한 현실이기 때문에 생태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제발 아무 것도 한다고 나서지 마라", "자연을 돌본다거나 보호한다고 들지도 마라, 왜냐하면 자연 스스로 자신을 돌볼 줄 알기 때문이다", "제발 자연을 해치지만 말아다오".
그러나 과연 자연이 생태학자들이 전제하는 것처럼 완벽한 조화를 구가하는가? 이러한 자연 개념은 전체로서의 자연 세계의 모든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연에는 항상 조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카프라 자신이 바이러스와 관련해 이를 입증한다.
(이 바이러스의) 유일한 기능은 (다른 유기체의) 세포 재생산 구조를 점거해 새로운 바이러스 미립자(particulas viroticas)를 재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 단 하나의 세포에 의해 여러 개의 바이러스 미립자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다세포 유기체가 이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었을 때 짧은 시간 안에 대량의 세포가 파괴당할 수 있고 따라서 특정한 질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이것은 "생물계에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한다. 그러나 예외적인 현상만은 아닌 것 같다. 생태여성신학자인 류터(Rosemary Ruether)는 Lynn Margulis를 인용해 오직 다른 존재들을 파괴함으로써 생존하는 종(種)이 있다고 말한다.
이 경향(인간의 환경 파괴 경향)은 단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Lynn Margulis가 지적한 대로 심지어 오래된 박테리아도 이러한 왕성한 증식력을 보이면서 성장하는 경향을 갖는데, 그런 식으로 다른 존재들을 근절시킬 때 결국 환경이나 종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46)
이런 식으로 생태학자들이 인간중심주의에 반해 작성하는, 그리고 생태신학자들이 신중심주의의 이름으로 공유하는 생태중심주의는 부분적인 자연 현실에서 출발해 그것을 이상화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렇듯 생태학자들은 부분적인 자연 현상을 이상화해 "완전하게 생태학적인 상태"라는 개념을 작성하고 나중에 이 개념에서 출발해 현실을 판단하고 단죄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개념에 따르면 자연의 모든 존재는 완벽한 조화 속에 공존하고 따라서 완전한 균형을 이룬다. 거기에는 한 존재의 다른 존재에 대한 착취나 파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주의는 가공적인 개념일 뿐 아니라 또한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크게 도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상관관계를 갖고 상호의존적이며 각 존재는 자율성을 갖는다고 전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는 각 인간이 고유한 자율성을 갖는다고 전제하지 않았거나 또는 모든 인간인 상관관계를 갖고 상호의존적임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 생태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모든 존재가 자율적인 존재로서 동등하다면, 즉 어느 존재도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할 수 없다면,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아 병이 든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나름의 고유한 자율성을 갖는 이 바이러스를 위해 병자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경우도 상정할 수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태학적 사고에서는 이 경우를 판단할 만한 기준이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2) 기술 지향적 (Technocentrism)
-환경문제를 시인하나 과학기술로 환경문제를 극복할수 있다고 신봉한다
-신고전주의 학파의 경제적 합리주의를 토대로 발생하다
-환경관리주의를 신봉한다 대중참여를 무시함. 과학과 경제 권위자의 의견만을 존중한다 맹목적 성정위주, 진보망 상에 빠져있다
-겉으로는 낙관주의의 견해를 갖고 있으나 이면에는 자신감의 결여와 모순이 있다
-생물윰리와 자연의 생존권을 무시한다 단기익을 중시하나다
-종류; @보수적기술지향주의=성장신화를 신봉한다 지나친 낙관주의.
@진보적기술지향주의=균형을 전제한 물질부요를 중시한다 조심스러운 사회개혁주의와 중재주의를 주장한다
* 과학기술 지향주의
*서구 사회 근대이후 오래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사상
*과학기술의 발달로 환경문제는 해결된다. 인류역사는 어려움을 당할때마다 기술발달로 위기를 극복해 왔다
*과학기술 자체는 중립적가치를 가진다 기술은 그자체로는 선한것도 악한것도 아니다. 오직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의지가 문제가 되는것이다 과학기술자는 그 기술의 응용결과에 대해서 예측할수 없다. 책임이 없다.
( 그러나 이이론은 현대에 와서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없는 것이되었다 1,2차대전후 기술의 위험은 명백해졌다)
(3) 수정주의 (비판적 생태주의) :
*환경문제는 과학기술문제만이 아니고 사회의문제,특히잘못된 경제문제와 구조에서기인한다
*사회적으로 과학기술을 통제,조절하지 않으면 인류미래가 망한다 사회를 개혁하고 경제구조를 바꾸면된다
*기술은 만인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문제: 맑스주의적이론임. 또한 수정된 생태주의 이론임. A,B를 혼합한 사상임. 그러나 생태주의의 변형임 환경문제를 기술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전반의 문제로 생각한 것은 긍정적인 점이라고 할수 있다
(B) 사회과학적 이론에 의한 분류
(1) 기능주의에 기초한 다원론
-기능주의에 근거한다
-끊임없는 개혁을 통한 사회경제체제의 점진적 변화성취 추구
-민주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린는 적절하게 사회체계속에 융해되어 전체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적절하게 조절한다
-기술지향과 생태지향 양대지영간의 절충과 타협으로 한경문제 사회문제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환경문제는 서로 다른 이해집단의 갈등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함 다수의 의견의 반영 감시로 편견을 통제하고 전체의 합의를 존중하며 적용되어질 때 사회문제는 해결이 된다고 함
.환경기능론;블라쉬(프랑스 지리학자)
1)자연환경은 단지 인간이 반응할수있는 다양한 가능성의 기회를 제공할뿐이며 인간은 환경을 변화시킬 능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수있는 많은 길을 제공하고 있다
2) 인간의 문화행위와 과학기술을 강조한다 (20세기 자연을 극복할수있다는, 인간능력이 부각이되면서..)
3)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자연적인 힘과 문화적인 힘이 인간에게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이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룰수 있는 가능성을 선택해야할것이다
(2) 맑스주의에 기초한 급진적 견해
-사회체제를 완전히 뒤엎어 버려야 환경뭉제 해결이 가능하다
-환경문제는 자원을 소유한 계급(자본가)과 이의 소유를 원하는 계급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이문제는 경제체제의 내적구조 모순의 결과이므로 다원론자들이 말하는 점진적 사ㅎ회개혁으로는 환경문제해결이 불가능하다 사회체제를 단번에 바그어야 해결된다.
(C) 자연관에 다른 근본적인 철학입장을 기준으로 한 분류
(1) 환경 결정론(Determinsm)
-환경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규정한다 물리적 환경은 경제사회조직 생리적 측면가지 영향을 끼친다 -히포크라테스
-진화론자들, 다윈론자들이 주장한다
-현대 생태학적 철학=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다라야한다고 주장.
*.환경 결정론;라첼, 로맹, 샘플등 주장
1)모든 인간의 행동,노동 창조등은 환경내의 자연적요소들에 의해 미리 결정되거나 통제된어있다 문화란것도 자연조건에의해 적용되어진결과이다
예:스텝지역의 주민들은 양치는일이 주업무이다 이들은 신싼한 목초지를 위해 자주 이동한다 사치품에 대해관심이 없다 북잡한 기계대신 단순한 기계를 채택하고 그래서 수공업이 발달했다 족장제도가 발달했다 이러한 환경조건에 스텝지역의 종교적통일성을 유지하게되었다 다윈진화롬 1859년
2)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을 인정하지 않는다
(2) 자유의지론(Free Will Philosophy)
-1972. 듀안이 주장함
-“인간은 자유의지로 다른 존재보다 자유로운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실존주의자들
-인간에게는 자우의지가 주어져 있다 의지가 없다면 객체의 세계에서 유리된다 인간은 자연과 싸울 수 있는 자유의 지가 있다 인간의 운명은는 어쩔수 없는 힘(신, 법)에 의해 이미 정해져있는거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 이상으로 진보할수 있다
-인간관계가 결여된 자연은 스스로 가치가 소멸된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은 인간이 자연을 과학적으로 바라볼때 뚜렷하게 구분지어지는 철학적 입장에 따라 대두되는 것으로, 결정론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별개의 실체로 인식하여 자연을 객체화하여 하나의 기계적 이미지로 파악하고, 자유의지론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보고 구분하지 않으며 자연은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지에 따라 인식된 환경으로 파악하므로, 과학에 의한 실재 환경의 객관적 인식 가능성을 부정한다.
결정론적 자연관에서는 자연을 인간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기계적인 객체들의 집합으로 보고 자연은 인과법칙으로 설명가능하고 조절 가능한 기계인데 반해,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관찰자이며 궁극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 인과률 안에서 자연을 조절, 활용할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또 인간은 과학적 방법에 따라 자연을 작은 기계로 분해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인과법칙을 발견하여 이것을 다시 종합하면 전체로서의 자연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실재 환경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고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식은 주관성이나 가치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이므로 확고부동하고 보편적인 참지식이 되므로 모두가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적용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지식을 제공해 준다고 본다.
이러한 결정론적 자연관에는 이신론(Deism)과 환원주의(Reductionism)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자유의지론적 자연관은 결정론적 자연관이 인간의 독립되고 고유한 선택과 행동의 자유 그리고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외면한 것이라 하여, 이를 전적으로 반대하여 인간의 의지와 인식능력에 따라 자연이 파악되므로 모든 것이 인간의 전적 책임 아래 존재한다고 본다. 또 자연은 결코 인간과 분리된 객체가 아니며 인간도 자연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의 위치에 서 있으므로 자연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자연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식을 밝히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실존주의의 자유의지론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결과이며, 또 우리의 자연에 대한 이해 즉 오직 인식된 환경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은 실존주의적 현상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유의지론적 자연관에서는 인본주의(Humanism)와 주관주의(Subjectivism)적 색채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2. 종교적 관점에서 환경을 보는 세가지 입장 노르만 L 가이슬러 )
(A) 유물론적 환경관
-기술을 현명하게 이용함으로 환경을 통제할 수 있고 빈곤을 정복하고 질병을 감소시킬 수 있다.
-인간능력에 대한 무한한 낙관론
-무신론, 세속적 인본주의가 그 철학적 바탕이 되다.
(1)자연이 풍부한 자원을 갖고 존재한다. 에너지는 창조되지 않는다. 물질세계는 영원
문제:세계 자연은 영원하지 않다. 자원은 고갈되고 자연은 파괴된다.
(2)에너지는 무한하다. (문제: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무용한 에너지가 증가한다.)
(3)인간의 기술은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기술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문제 일어난다.
(4)세계는 불공평한 분배로 신음하고 있다. 고통원인
문제:분배제도 자체보다 불공평 분배원인이 되는 인간의 죄악이 문제이다. 이기심, 탐욕
(5)광범위한 교육으로 불공평한 분배문제 해결가능하다.
문제:인류역사는 교육을 통해 구원되지 않는다.
교육을 받은 자들이 더 교활하고 악해질 수 있다.
(B) 범신론적인 환경관 자연이 신이다. 신비주의 자연숭배
(1)자연은 하나님의 현현일 뿐 아니라 살아 움직인다. 자연속에는 영혼이나 생명이 있으며 들어가 있으므로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문제:자연은 기계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범신론과는 창조와 현현을 혼동하고 있다.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의 반영이지 하나님자체가 아니다.(조각 조각품)
(2)자연은 살아있다:자연은 살아있지 않다. 무생물도 있다.
(3)모든 종(생물)은 하나님의 현현이다:종이 신격화 될 수 없다.
(4)인간과 자연은 하나이다. 따라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문제:조화와 동일시를 혼동하고 있다. 자연과 협력 자연과 하나됨
人은 하나님의 현상대로 창조됨 자연, 생물
(5)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자연의 종이다. 지배권이 無, 자연은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다. 지배대상이 아니라 겸손해야 한다. (돌고래 생존률은 인간보다 높다)
문제:지배와 봉사라는 이분법에 입각해 있다. 훌륭한 지배자는 자기백성을 섬긴다.(막10:15, 빌:5-8)예수
지배와 곧 파괴라는 관념은 가정에 불과하다. *창1:28지배권 뿐 아니라 땅을 가꾸고 경작 보호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地=하나님의 정원, 人=하나님의 정원사 땅주인=하나님(시24:1) 우리는 돌보는 자.관리인
(C).기독교의 환경관
(1)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창1:1). 시99:1,딤전4:4 물질세계는 훌륭하며 창조자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2)하나님은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 시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 다. 욥14:11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것이니라 (시50:10,12)삼림의 짐승들과
(3)세계는 하나님의 반영이다. 물질은 선하다. 좁은 것이다.(창1:4,10,12,18,21,25)
“보시기에 좋았더라”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이다. 시139:7-12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4)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히1:3 예수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거 계신다.
시104:10-14 예수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매
하나님은 자연세계에 생태학적으로 간섭하고 있다.
하나님은 손은 폭풍우, 번개, 비 속에서 볼 수 있다(시77:17-18),바람 어둠 산 드신다(암4:13), 그 큰 힘을 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
(5)세계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다.
노아 대홍수 심판후 모든 생물과 언약(창9:16) 무지개:홍수로 멸망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과 생물 언약관계 맺다. 따라서 우리는 식물 동물을 보호:보존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은참새까지 관심을가지신다(마10:29)잠12:10의인은그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 니라
(6)인류는 환경의 관리자이다.
하나님=창조자,소유자 인간은 관리자, 청지기이다.
1).번식시켜야할 의무가 있다(창1:28)“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인류에 대한 것이지 개인에 대한 것 아니 다(마19:11-12, 고전7:8) 인구증가시키는 것이지 인구과잉을 말하는 것 아니다(과잉번식_멸망?)
2).지배의 의:인간은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연 받았다.
정복(kabash)=짓밟거나 종속시키는 것자연에 대해서는 일정한 형태의 통제나 강제를 의미
지배(radah)=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으며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자연과는 별도 존재
3).자연의 관리자가 되라는 명령!
자연을 보살피라 경작한다(abad)=섬긴다
보살핀다(shamar)=관리한다,관리하고 보존한다
지배자이자 종 섬기는 자=모순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지배자이었다.(막10:45 빌2:5-8) 히13:7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라 벧전5:2 양무리를 치라 벧전5:3 양무리의 본이 되라
3. 기타: 환경론의 여러 형태들
(1).엔트로피이론으로 보는 환경
엔트로피 법칙은 역사를 진보라고 보는 관념을 무너뜨릴 것이며, 과학과 기술이 보다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든다는 믿음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엔트로피는 물리학에서 확립된 계념으로, 그 이론적 기초가 이미 열역학 제 2법칙 등을 통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며 80년대 초에 제기되어 전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던 엔트로피 이론은 20세기 최고의 철학으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1)에너지의 두법칙
에너지란 절대 만들 수도 없고 또 없애버릴 수도 없다는 법칙이다. 에너지란 자유로이 형태를 바꾸어 갈 수 있으며 변환시킬 수도 있지만 그때마다 반드시 어떤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2)자연은 무질서를 좋아한다
온도가 높아서 빠르게 운동하는 입자와 온도가 낮아서 천천히 움직이는 입자가 서로 갈라져 있는 것보다 뒤섞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내는 양이 엔트로피이다. 결국 높은 온도에 있는 열이 낮은 온도로 흐르는 것은 무질서도 즉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기는 변화이다.
(2).기이아이론으로 보는 환경
지구 생물권을 단순히 주위환경에 적용하기만 하는 소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지구의 제반 물리화학적 환경을 활발하게 변화시키는 능동적 존재로 규정했다. 러브록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에 ‘가이아가설’이 라는 명칭을 붙였다.
D. 환경과 윤리
1.생태 및 환경 윤리학의 논점
생태 윤리학자들은 처음부터 생태 및 환경 윤리학을 기존의 윤리학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새로운 윤리학으로 이해하고, 그것의 탐구 영역을 설정하고자 시도했다. 이것을 우리는 생태 윤리학의 여러 관점 가운데서 생물중심주의적 이론이라 부른다. 그리고 어떤 생태 윤리학 생명의 고유한 가치뿐만 아니라 무생명적 자연물도 그 자체 고유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윤리학적 전체론이라 한다.
2.환경 및 자연보호의 윤리적 문제
(A). 인간의 기본적 가치.
(1) 물질적 가치; 생존 건강, 재물, 물질부요
(2) 사회적 가치; 분배정의, 참여의 자유, 상호공동체. 개인적 성취
(3) 환경적 가치; 자원의 안정성, 생태계의 보존, 환경의 보전
(B)자연및 환경보호의 윤리적 문제
환경보호란 개념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관한 모든 논의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것은 분명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하여 계획되고 실천되는 것이 현실이다.
환경적 삶의 질, 즉 주택, 노동공간, 여가시간 등 주관적인 삶의 질을 결정해 주는 것이다.
환경 정책의 결정은 그 적용 범주 및 모든 범주내에서의 이용가치와 이용을 신중히 고려해야만 한다. 환경정책의 개념은 학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 되거 있는데, 다음의 두가지 측면에서 파악해볼수 있다. 첫째는 인간자신에의한 인간환경의 합목적적 형성 이라는 적극적 측면과, 둘째는 환경에 관련된 인간활동의 규제라는 소극적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오염 물질의 종류와 그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환경오염 문제에 대한 접근법은 아주 복잡하고 다차원적일 수밖에 없다. 현제 지구 환경이 위기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검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위기의 평가 역시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한계를 갖는다. 또 위험에 대한 실험적 검증조차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의 진행과정은 언제나 가설적 피해상황만 예측할 뿐이다.
(1)자연보호의 윤리적 문제
자연보호의 목적은 환경보호와는 달리 반드시 인간 중심주의에만 입각하지 않고, 감각중심주의, 생명중심주의, 전체론 그리고 인간중심주의 가운데 그 어느 입장을 취하던 상관없다.
오늘날 자연보호 문제는 인간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될 절대 절명의 의무로 인식되어야 할거이고, 이것은 또한 인간의 생존과 연관된 매우 중요한 윤리학적 문제를 함의한다고 하겠다.
(2)동물보호의 윤리적 문제
동물실험에서 발생하는 고통은 동물에게 직접가해진 것인데 반해, 인간의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가해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고통이며 사람이 동물을 도구화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어떤 종류의 실험이든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실험은 도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관점이 제시될 수도 있다.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정당치 못한 일이다. 그러므로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실험은 다만 기본적학문 연구라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만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한스 요나스의 책임 윤리
요나스의 책임 윤임의 윤리는 이런 새로운 도덕신학을 위한 절대적인 상위규범을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내재적인 자기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생명이라는 초월적 의욕이라는 것이다. 요나스의 철학은 세단계의 발전과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존재 분석의 문제를 다루는 고대 말기의 그노시스 연구이고, 둘째 단계는 그후 자연철학과 조직철학을 접목하는 시기이고, 마지막 단계는 이론철학에서 신천철학, 즉 인류가 결코 거부할수 없는 기술의 요구에 대항하는 윤리학을 정초하는 시기이다.
요나스의 신학과 철학의 전통적인 관계를 간섭으로 보기있는데, 인간의 역할을 결정함에 있어서 신학이 창조의 관리자나 감시자의 모습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속에 스며들어 있다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 요나스에게는 인간의 생존에 대한 가치, 즉 인간의 존재가 문제이다. 미래 세대에는 권리보다는 의무의 수행과 인간의 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한마디로 환경위기로부터 초래될 절멸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윤리학은 포기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요나스는 도덕적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새로운 윤리 즉 책임의 윤리를 주장 한다.
인류의 삶이란 자연으로부터 분리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의무에는 자연의 미래에 대한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에 대한 잭임은 자연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공리적인 고려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연도 그것 자체로써 우리 힘의 자의성에 항거할 수 있는 존엄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자연에서 생성된 존재로서 자연이 생성한 다른 유사한 것들 전체에 대하여 신의를 지킬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윤리는 소박한 삶의 윤리인것이다.
III. 생태계 파괴 원인
1.위기의 진단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자구환경 파괴를 심각하게 걱정하게 되었다. 60년대에는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식량과 에너지의 부족이 문제시되었고, 70년대에는 핵 발전이 과연 미래 에너지로 적합한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80년대에 들어와서는 바야흐로 환경문제가 전 세계적인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다.지금 인류가 당면한 생태학적 위기를 살펴보면 에너지 고갈문제, 지구 온난화문제, 오존층의 파괴, 생물종 멸망, 지구의 사막화이다. 인류의 산업화와 경제개발이 지금과 같은 양상으로 계속 전개되어 나간다면 머지않은 상태에 지구생태계가 파괴되어 인류가 자멸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2. 생태계(Eco-system) 위기의 원인 (예장 통합측 환경선교지침서 안 참조)
그동안 인간은 산업화와 문명이라는 이름 하에 엄청난 자연파괴를 저질러왔다. 자연
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은 직접적으로 자연을 파괴해 왔으며, 인간의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양식은 자연파괴를 정당화하며 더욱 조장해 오고 있다.
(1) 무분별한 과학기술
현대인이 우상시 하고 있는 현대과학기술은 인간이 마치 하나님의 자리에 선 것 같은 착각
을 하게 한다. 생명공학이나, 첨단 의학기술, 첨단 정보시스템은 인류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고 있으나, 이것들은 또 다른 사회적, 윤리적 문제들을 야기해 인류의 생존의
기초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현대사회 위기의 핵심인 에너지, 식량, 환경의 문제
를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유발하여, 생태계와 생명윤리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2). 소비문화
현대로 오면서 사람들은 내면적 가치보다는 외형적인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며, 편리
함과 풍요로움을 끝없이 추구함으로 소비문화가 팽배하게 되었다. 더욱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사회가 되면서 자원의 낭비와 환경의 오염은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소비를 조장하는 광고와 기업의 탐욕적 이윤추구, 국가의 경제제일주의가 소비문
화를 더욱 조장하고 있다.
(3). 사회구조의 문제
비민주적인 정치체제, 불균형적인 경제발전, 부정의한 사회구조는 삶의 질을 저하
시킬 뿐만 아니라, 환경의 질도 구조적으로 저하시키고 있다. 특별히 최근에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와 정보화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의 불균형을 심화시킴으로 자연과
힘없는 자들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대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서 부유
층은 과도한 자원소비와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반면에, 빈곤층은 생존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중앙집중화 된 사회는 필연적으로 지역공동체
를 약화시키며, 문화의 다양성을 파괴함으로 사회구조를 취약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모순된 사회구조 속에서 생태정의가 파괴되고, 생태계 또한 다중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4). 인간 중심주의
지금까지 인간을 위해서 모든 자연 만물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인간들만의
생존과 쾌락을 위해서 어떠한 자연 파괴나 자원소비도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인간중심
주의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살아야 할 지구를 파멸로 가져갔다. 또한 성서의 "땅을 정복
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는 말씀을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중
심주의는 더욱 조장되었던 것이다
(5). 영성의 문제
생태계의 위기는 아담으로부터 유래하는 죄악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하나
님의 형상을 잃어버림으로 시작되었다. 인간의 탐욕과 교만은 동생을 죽인 카인과 같이
피의 전쟁을 끊이지 않게 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바벨탑을 쌓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영적 타락은 인간들과 자연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자연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보지 못하게하며, 급기야는 생명들조차 무자
비하게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없는 죄진 인간의 탐욕이 근본원인이다
(6)인구의 급증
증가하는 인구를 먹이고 입히고 적절한 주택을 제공하며 소비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산과 소비 활동이 가속화되며 환경문제를 악화시키는 커다란 요인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인구증가로 인한 재화 소비의 증가, 폐기물 배출의 증가 도시화로인한 인구집중화로 인공물리환경집중현상을 가져왔다 그로인해 환경의 오염과 파괘가 심각해졌다
(7) 기 타;
환경에 대힌 인식의 부족을 들수 있다 환경은 서서히 조금씩 나타나는데반해 가시적인 경제성장위주정책에 치우쳐 환경문제인식이 부족하게되었고 대책도 소홀하고 미흡한 실정이다.
IV. 기독교가 자연한경파괘의 주범인가?
1.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론들과 그 반론
성경의 인간중심적 세계관 대문에 환경위기가 왔다고 주장하는 환경론자들이 많다
(1). 칼 뢰비트 :
인간을 위해 자연이 존재한다는 인간 중심적 사고, 자여노가 인간의 분리, 그로 인한 진봉,l 절망이 성서전승에서 기인한다
(2). 하이트 헤드
오늘날 환경 위기의 역사적 뿌리는 유대교 기독교 전승에서 찾아볼수 잇다
기독교는 세계가 여탯겄 경험핮 모한 가장 인간 중심적이고 가장 자연에 대한 오만한 종교이므로 현재의 기독교적 혹은 성서적 낡은 사고를 버맂 않는한 인류는 환경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3), 아메리
오늘날 자연파괘는 성서의 창조사상에 기초한 기독교위 무자비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형상성을 인간에게만 부여하고 인간오ㅔ에 다른 피조물에게는 부여하지 않음으로 써 성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깊은 골을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성서가 인간으로하여금 자연을 정복할수 있는 권한가지 부여함으로 오늘날 황경위기라는 결과를 초래할수밖에없엇다
(4). 린 화이트 ( Linn White Jr. )
기독교 비판에 대표적인 인물이며 기독교사상이 현대과학과 기술에 갚은 영향을 끼쳐 자연이 파괘되었다고 하는 신하를 대중하시킨 사람이다 그이 노문은 환경론자들이 고이 되었다
화이트이 주장들 :
1) 성경의 창조론
기독교창조론으로 인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비순환적 직선적 시간개념이 생겼다 이로인해 우주이 시작이라는 개념과 동시에 여우언한 진보에 대한 암무적인 믿음이 서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도한 기독교의 창조론은 애니미즘을 타파함ㄴ으로써 자연의 대상물 속에 있으면서 인간으로부터 자연을 보호해주엇던 에전의 정령들이 사라짐으로 인해 자연의 착취를 방지하던 에전의 장벽들이 무너져버렸다
2) 자연신학의 문제 :
자연신학도 오늘날 환경 파개의부리가 된다 자연신학에서 현대 서양의 근대과학이 나왔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자연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상징체계로 이해하였다 이런 자연에 대한 이해는 과학저기라기보다는 예술적인 것이엇다 이런 분위기 속에 과학은 발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오면서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창조계가 어덯게 작용하는 가를 발견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노력으로 바뀌었다 과학자들은 이런 신앙적 전제를 가지고 자연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곧 자연과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런 자연신학적 전제를 갖고 학문을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은 뉴턴이다
3)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사상
성경에는 아담이 모든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기록이 있다 인간의 이런 행위가 자연에 대한 지배권의 행사를 말한다 땅을 다스리라는 말은 자연은 다만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목적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고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해도 된다는 사상을 싹트게 하였으며 이는 기독교가 고대 이교와 아시아 종교와는 다르게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따라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한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종교가 되었다 과학기술로도 환경파괘문제를 완전히 해결할수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자연에 대해 오만하게 대하고 정통 기독교사상에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은 오직 인간을 봉사히기 위해 존재한다는 기독교 사상을 거부하거나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 가능하다
2. 반론 :
(1). 자연환경파괘에 대해 기독교(성경)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교회와 신학자들과 교인에게는 분명하게 책임이 있다 기독교 자체와 성경자체에 책임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잘못해석한 신학자와 환경에 대해 무지하고 인간 욕심을 채우고저 자연을 착취한 교회와 기독교인에게는 책임 있는 것이다 성경의 잘못된 해석과 적용으로 자연을 무시하고 파괘하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다른 피조물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복은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땅과 하늘은 하나님의 흔적에 불과하므로 땅과 자연은 인간에 의해 이용되고 다스려질수 있다.
(베이컨 ; 인간이 자연애서 모든 것을 빼앗아 쓰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2). 과학기술의 발전은 전적으로 성경의 사상대문에 진전된 것이 아니다 비기독교국가에서도 얼마든지 과학이 발전하였다 과학기술문명의 발전은 인류가 발달하면서 꾸준히 진행되어왔고 특히 데칼트, 뉴턴, 베이컨등에 의해 형성된 기계적 자연관과 적자생존 의 논리를 설파한 다윈의 진화론이 결정적 촉매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나 개입을 거부하고 적저생존을 통한 무한진화와 진보사상을 퍼뜨렸다 사실 16세기 이전에 서구사회에서 자연은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어머니였다 인간은 어머니 품속에서 어린아이같이 자연의 품속에서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적응하며 살았다 자연은 지속적을 생명을 부여하는 힘으로 가득찬 존재이였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고 자연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어머니 표상은 인간 문화행위를 제한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자연,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땅에 대한 표상은 인간 활동의 욕구를 제한 시켜주는 작용을 하였다
계몽주의 이후로 인간 중심적 사고와 이성에 대한 예찬이 발생하면서 과거의 유기적 세계관이 기계적 세계관으로 바뀌면서 과학실증주의적 사고가 팽창하며 과학기술이 발달한 것이지 성경의 가르침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은 역사적으로도 알수 있는 것이다 서구 신학자중 자연과 인간을 대립 투쟁으로 보고 성경을 잘못해석한 불투만과 그이 스승인 헤르만은 과학기술을 예찬했는데 그들이 사상 배후에는 역시 근대의 데카르트적 계몽주이적 사고가 배어있다 역시 계몽주이 이후로 기독교는오히려 때때로 과학기술발전에 장애가 되었다 갈릴레이 종교재판, 다윈의 종교재판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사실 큰 환경파괘는 기독교가 탄생한 후 약 1600년 동안은 일어나지 않은 현상이다 산업화혁명이후에 발생한 것이다 기독교 창조론을 환경파괘와 연결시키기에는 시간적 간격이 너무 크다
오늘날에도 환경 파괘에 대해 경각심을 깨우치고 과학기술이 위험을 알리고 자연보호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펼친 곳은 다른 종교가 아니니 기독교이었다
(3). 성경은 자연을 착취하거나 오용하라는 사상이 전혀 없다 시편에 보면 시편기자들은 자연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로 보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였다
(4). 기독교는 범심론을 부인한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자연은 피조물이다 자연은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도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이다 성경은 자연과 하나님을 구분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세계와 무관한 하나님을 가르치지 아니한다 그런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신학이 아니다 현대인들 중에도 자연속에 신이 들어있다는 범신론 사상이 자연환경파괘를 방지한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5). 기독교가 전적으로 직선적 시간개념을 갖고 있어서 영원한 진보에 대한 암묵적 믿음이 생겼다는 주장은 성경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타종교에서 말하는 동일한 사건의 반복인 순환적 시간 개념과는 다른 역사적 시간관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원한 진보에 대한 믿음 발생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인간은 타락한 죄인이며 탐욕애 끌려 사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멸망의 위기에 직면해 있음를 주장하고 있다
(6). 자연파괘는 기독교가 없었던 시대나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또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자연 생태계 파손에 대해 유대교-기독교애 전족으로 책임을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전하여지지않았고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던 시대에도 동물들이 멸절되었고 자연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물리학과 과학기슬을 통해 자연의이용과 파괘는 기독교가 서구사회에서 지배적 권우를 상실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자연환경 파괘는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즐기려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에서 발생된 것이지 기독교 교리자체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맺는말
창조질서의 위기 상황을 초래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요약된다. 타락의 결과인 물질주의 우상 숭배는 역사와 함께 그 형태를 변신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19 여기에 기독교인들의 책임의식 결여와 기독교세계관의 몰이해, 신앙의 세속화가 한 몫을 거들어 현대의 과학, 기술주의 우상숭배자들은 진보를 미화했고 숭배하였으며 기독교인들도 이를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진보는 좋으나 진보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화된 진보주의는 안된다. 진보주의는 이미 인간위에 군림하고 있는 일종의 우상인 것이다. 우상화된 진보는 진보 그 자체를 위한 것일 뿐, 더이상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진보가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질을 높이는 발전,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청지기직을 돕는 진보가 아니라면 진보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청지기로서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기 위해 진보가 필요한 것이다. " 진보는 인간의 생존보다, 피조세계의 관리보다 결코 앞설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 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교회가 성경의 교훈을 무시하고 시대흐르을 무조건 따라가다가 자연 파괘라는 엄청남 죄악을 저지른 것을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그가 아름답게 창조하신 자연은 일부 신학자들의 잘못된 해석과 인간의 욕망으로 파괘된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V. 환경경보전 방안들
1. 자연보호, 환경보존을 위한 사회적 기술적 해결방안들
(1) 과학기술적 접근; 과학기술 낙관론에 근거함.
H.Kahn 사회진보에는 과학기술이 필수이다 제한받지않는 성장만이 사회의진보를 가져온다”
-과학기술을 발달시켜 공해문제를 해결해 나아간다 핵폐기물 산업폐기물은 우주박으로 보낼수있고수질오염은 오염물질을 잡아먹는 미생물을 개발하믕로 해결이 가능하다 기술이 발전되면 자연조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환경문제는 경제문제이다 환경관리주의(=자연법칙을 동원하여 객관적분석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려는것)의 능력과 효율성을 신봉한다
*비판:근원적인해결이 불가능하다 ,과학저 전문가의 의견만 중시한다 ,분석위주의 태도는 반생태학적성격을 지닌다
(2) 사회경제체계적 접근
-환경문제는 과학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외에 사회 경제, 정치 요인들과 관련이 되어있다. 각국의 과학기술이 유사해도 환경오염의 상태는 다르게 나타난다 산업수준에 따른 산업부분과의 구성비울은 환경문제에 영향을 끼친다
-기술진보,경제성장, 도시화 인구증가,등에서 환경문제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 사회주의사회에서 환경문제가 더욱심각하게 나타났다 이윤축를 목적으로하는 자본주의경제활동으로인해서만 환경문제가 발생한것이 아니다
-정치체제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민주적인 체제가 환경관리에 좋다 환경문제에 대한 각 집단의 입장을 제대러ㅗ 파악하고 정부의 일방적인 처리를 미연에 방지할수가 있기때문이다
(3) 가치론적 접근 방법
-환경의 문제해결은 과학기술이나 사회경제정치 체제의 개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근분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가치론적접근을 해야 한다
-생태학적윤리학, 환경윤리학이 대두하게 되었다 환경윤리학이란 자연에 대한 도덕적가치관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생태학적 양(식)심에 따라 선과 악이 판별된다 생태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여 환경에대한 윤리적가치판다을 한다
-자연보전과 환경의질을 향상시킬때 인간의 생태학적양심을 북돋아준다 여기서 환경교육이 중요하다
환경교육이란 사람이 그를 둘러산 환경과 그속의 모든 생명체와의 상호의존성을 의식하고 환경이 장래에도 생존과 생활에 적합한것으로 남기위한 사명감을 고취시키기위한 교육을 실시하며 새로운 환경관을 배양함으로써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을 유도하는것이다
2.. 환경문제 해결에 대한 종교계의 견해
최근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서구에서 동양과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늘어가고 있다. 이러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환경문제의 사상적 출구가 동양사상에 있다는 것이고 신과학운동의 기수라고 말하는 카프라(Fritjof Capra)의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현대사상과 동양사상」,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도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접촉 가능성과 현대문제 특히 환경문제의 대안을 동양사상에서 찾고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카프라는 이 책에서"현대과학과 기술은 기독교의 오만함에 물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환경문제 해결로써 동양사상과 불교사상에서 그들은 과연 어떤 대안을 말하고 있는가?
(1) 유교의 자연관을 중심으로
유학 사상은 인간 세상의 윤리를 강조하므로 인간의 문화건설을 위해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지 않으면 않된다. 유학 사상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올바른 방법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주역: 인간의 인위적인 문화가 천에 근거함을 역설하고, 나아가 천지의 화육에 인간이 참여하면 더욱 큰 이익을 인간과 우주를 위해 가져온 다고 믿었다. 즉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여 자신의 후생을 도모하되 대자연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손상하지 않으려는 배려가 유가적 자연관 속에 무르녹아 있다.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강조한 것이다.
맹자: “농사를 지을 때를 어기지 않으면 곡식을 다 먹지 못 할 만큼 넉넉하게 될 것이고, 빽빽한 그물은 못에 드리우지 않으면 물고기가 다 먹지 못할 만큼 많아 질 것이다. 도끼를 갖고 벌목을 하는 데 때를 기다려 숲에 드나들면 재목은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아 질 것이다. 곡식과 물고기가 먹고 남을 만큼 넉넉하고 재목 또한 쓰고도 남으면 이는 백성으로 하여금 산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데 유감스럽지 않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왕도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다.이 말은 천지 자연이 주는 이로움을 근거로 하여 인간이 자연을 적당히 이용함으로써 자연을 아끼고 기르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라는 지속적인 개발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처럼 인간의 욕심에만 맞춰 계속적으로 개발만을 한다면 지속적인 개발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연 파괴만이 있을 것이다.
왕양명의 한몸철학: 생태 철학과 관련 된 유학사상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왕양명의 한몸철학이다. 왕양명은 천지 만물과 사람은 본래 한몸이라고 하면서 동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무생물을 포함하는 총체적 우주자연은 본원적으로 인간과 더불어 한몸이며 인간은 우주자연의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양명학에 있어 인간과 자연을 포괄하는 지구, 더 나아가 총체적 우주는 단지 수많은 개체들의 산술적, 물리적 집합체 또는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단지 우주의 평등한 구성원의 하나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 관계망으로 생명체로서의 우주자연의 핵심적 중추의 위상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 도 교 의 무위자연 (無爲自然)
무위자연은 동양의 대표적 사상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좋은 것이요 따라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여기 '자연'(自然)이라는 말이 우리의 눈을 끈다. 자연이란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동양의 무위자연사상은 성경사상과는 대조되는 무신론사상이요 나아가서 모든 것이 신이라는 범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이다. 그러므로 신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환경문제가 인간의 무모한 정복과 착취에서 나온 것이므로 자연을 신처럼 생각하고 경외하는 자세로 대할 때 환경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불교의 연기론 (緣起論)
연기론은 불교사상의 핵심 중 하나다. 우리가 흔히 듣는 인연이라는 말의 학술적 용어가 '연기'이다. 연기론은 우주의 모든 존재는 따로 따로 떨어진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연관구조를 가진다는 사상이다. 모든 존재는 그것 자체로는 절대적 자기 실체가 없고(諸在無我), 자기 스스로 운동할 수 없다(諸在無). 모든 것이 상호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 어떤 사건이든지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도 나의 고통이요 자연의 파괴는 곧 나의 파괴다. 이렇게 불교의 연기론은 모든 사물과 사건을 상호관련성 속에서 파악함으로 환경문제에 근본적 대안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VI. 기독교 생태 보존 사상
A. 창조신앙과 자연에 대한 기독교 역사적 고찰
1. 고 대
(1) 이레니우스 : 2세기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는 당시 영혼만 중시하고 물질을 경시하고 악하게 보는 영지주의를 비판하였다 ㅇ여짖의는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한 신이기에 열등한 신으로 생각하였다. 이레니우는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또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자연계의 파괘도 새아담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으로 회볻된다
그는 만물갱신이론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인간은 물론 만물과 환경마저도 새롬게된다는 것이다 종국에는 만물이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 생명축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기독교정통성을 강조하며 성경에서 근거한 좆기신학 이론을 확립하였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하시는 창조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동시에 구원의 주님이심을 강조하고 만물갱신이론을 통해 구원의 개념을 온 피조물에게가지 화댜함으로 오늘날 생태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볼수 있다
(2) 오리게네스 (약 185-254) : < 제일원리>
오리게네스는 알레ㅔㄱ산드리아의 교부로서 자연을 무시하는 인간 중심의 신학을 제공하였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고나찰이다 비록 그가 종속적인 그리스도론과 영혼 선재설, 민인구원설ㄹ응 주장하여 제5차 콘스탄틴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으나 그는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로 당시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창1:27은 영적창조를 말하고 2:7은 물질세계의 창조를 말한다고 한다 이런 해석은 당시 필로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물질세계는 영혼들의 훈련과회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물질세계도 분명히 ㅍ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영혼은 물질세계에 있으면서 회개와 훈련을 통해 회복되어 본래 영적 상태로 돌아간다 물질세계는 영혼의 회개와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피조된 것이다
자연은 신성으로부터 유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또한 마르키온 이단이 주장한 것처럼 하급의 신이 창조한 것 아니다 오리게네스는 당시 일반적인 생각대로 해와 달과 별등은 생명력과 지각이 있는 높은 위상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그것들은 인간이 바른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교육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이 높은 하늘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며 자세를 가다듬고 우상이나 악마에게 떨어지지 않도록하는 것이다 선한ㅇ 생각은 천상 이해 고무된 것이며 악한 생각은 악마에게서 온다
세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피조물 전체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거대한 동물과 같다 그리거 세상 모든 것들은 각기 영적 권능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모든 피조물은 다양한 형태로 영혼을 지니고 있다 렘12:4 참조
낮은 위사으이 존재를 잏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위상의 존재를 보아야 한다 식물을 이햐하기 위해서는 동물을 이해해야하고 도울을 이해하려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 물질적인 존재와 영적 존재는 상호 용한다
물질적인 것은 영적이느것에 비추어 이해되고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 접근할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가장 하찮은 동뭉 몸도 소홀하지 않으셨다
동물들 안에 있는 영혼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각 식물에게는 디자인 요솟가 있어 뿌리와 열매 잎을 내게 하고 그 속성의 특징을 나타내게 한다 모든 피조물은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존재사실이라고 할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역사안에서 서로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다 오리게네스이 신학의 핵심은 아포카타스터시스 즉 회복, 원상복구이다
몯 피조물은 하나님에게로의 복귀한다 마지막 때에 모든 피조줄이 하나님에게 돌아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세상을 버리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스토아주의 사상을 분명 반대하는 것이다
인간 육체는 비록 죄성이 있으나 마지막 날에 부활할 때는 분명이 온전하고 신령한 육체를 가질 것이다. 피조물의 실제적 상태는 한상 육체를 지닌존재이다 이성적 존재는 육체없이
살지도 않았고 또 살지도 않는다. 순수한 영은 삼위일체하나님은 육체가 필요없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또한 모든 고토오가 종노릇함에서 해방을 받을 것이다(롬8:21-22) 물질은 소멸되지 않고 변화된다 시편102:26
오리게네스는 스토아주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오직 성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성경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체계를 수립해나아갔다 인간은 비록은 하나님을 향한 순례자이나 그는 결코 물질세게를 소홇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물질 세계를 영혼보다 낮게 평가는 하였으나 물질세게도 하나니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영혼이 거주하고 훈련을 받는 주용한 존재이다
(3) 아우구스티누스
이 세상만물은 향유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것들을 이용해야 한다 이세상은 소유될수 없고 오직 이용할 뿐이다 (롬1:20) 우리는 육신적이고 시간적인 것들로부터 영원하고 영적인 것을 취한다 물질적인 거들로부터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향유해야 한다
실재하는 피조물은 오직 이용대상이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자들의 초월적 하나님 개념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이 우리들의 세계의 내재를 통해 현존한다는 신개념을 제시하였다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와는 근본적인 질적 차이가 있다 둘 사에에는 너무도 분명하고 엄격한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창조주로서 최상의 지혜로써 만물을 창조하시고 최상의 호의를 통해서 만물을 보존하신다 피조물이 쇄하는 원인은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둔자보다 더 하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 원래는 하나님만 존재하였었다 만물은 영원불변하게 선한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것들이 선한 동안에만 선하다 또한 동시에 참으로 전채적인 것만 선하다 왜냐하면 우주의 경탄할만한 아름다움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본성들, 모든 현상계의 재료들은 선하다 왜냐하면 온전히 모든 존재들의 창조자는 최상으로 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다가 변하지 아니하게 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한 것이 그것들 안에서 감소시켜질 수 있고 또한 증대싴켜질수도 있다 그러나 선으로부터 감소되어지는 것이 악이다 선의 결핍이 악이다
선이 없는 곳에는 악이 있을수 없다 하나님은 창주주요 우주의 운행자요 생명의 원천이다
하나님 창조는 하나님 자신의 어던 필요성 필연에 의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 호의의 풍부에서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의로우신 호의로부터 만물이 창조된 것이다
창조는 동시에 일어났다 (6일창조가 ) 예수지삭서(집회서) 18:1 “하나님이 만물을 동시에 창조하셨다 ” -필로가 주장
창1:28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축복이다 지배는 비이성적인 것에 국한된다 남녀는 지배관계가 아니다
인간은 모든 동물들을 지배한다 다만 이성을 통해지배한다 인간은 동물과 비슷한 자로서 동물의 모든 성정과 욕구를 절제와 겸손을 통해서 장복했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후로는 스스로 이런 욕구를 제압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들은 부셔졌고 가장 추악한 습관들로 나아갔다 또한 그것들을 다스리고 지배할 때 온전히 모든 짐슬들과 비슷하게 되었다 그리고 붏화로 가득차게 되었고 부패하기 쉬운 정욕들에 인근들을 굴복시켰다
하나님은 동물들은 다스려지고 지배될 대에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게하셨다 역시 그것들은 이성들과 최상의 도덕들과 영원한 생명을 앎으로 양육되게 하셨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욕구들이 그들의 이성과 진리에 일치할 때 사람의 생명은 복되고 평안하다
이런 맥락에서 생태계 파괘는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한 죄의 결과이다 인간이 범죄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않았다면 생태계 파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 범죄로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깨진 것이다 인간성이 회보고디고 이성과 진리를 따라 살아갈 때 생태계문제는 해결된다 본다
2. 중 세 시 대
(1) 중세의 자연 이해 , 수도원 영성
자연은 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물롤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알려질수 잇는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되고 한편으로는 w자연은 은 죄에 빠진 상태이므로 극복되지 않으면 않되는 그무엇이다 초댜교회와 주세시대에는 인간과 피조물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고ㅠ있다 그리스도는 전 우주의 창조주요 구속주이시다 구속의 역사는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 피조물을 포함한다 그래서 구속사는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와 함께 완성된다 ]
고대 자연관은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세계관에 의해 인간과 자연은 깊은 연걸성, 합일성을 갖고 있었으나 중세에 들어서며 자연은 인간에게 타자로 낯선 존재로, 그래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대상으로 드러났다 자연이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중세 기독교히는 언제나 동일한 것을 반복한다는 순환적인 사고에 종지부를 찍었다
역사의 진행은 언제나 직선적이고 하나님이 목표하신 종점을 향하여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다 교회는 하나님을 인간 사회 중심에 올려놓았고 인간과 자연을 그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서 자연적인 환경은 고대세계와 달리 비신성화 되었고 단순하고 중립적인 물질로 그가치가 하락되었다
희랍 철학은 자연은 시작돠 없고 끝도 없으며 변하지 않는다고 가르쳤으나 중세에 이르러도 많은 자연이 파괘되었다 자연의 상대성과 인간중심의 사상의 태도는 생태의 파괘를 가속화시켰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초대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자연에 대해 보인 태도는 11-12세기까지 긍정적이었다 중세이후 서구기독교는 자연에 대해 전적으로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노동에 대한 수도사들이 정신과 육체노동에 대해 영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준비된 r시었다 라틴계열의 수도생활은 특히 노동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어거스틴도 말하기를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진척시킬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창조시에 자연은 아직 미완 상태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조력자로서 자연을 발생시키고 온성할수 있다고 보았다
중세에서 노둥은 신적인 창조행위의 연장이었다 자연은 인간을 통해 준비되고 완성되어야 한다 베네딕투스는 하나님의 사랑은 만물안에 깃들어 있으며 그 사랑을 굥험하는 자마다 온세상을 귀하게 보고 소중하게 다루게 된다고 천명하였다 그는 수도원의 모든 그릇과 전 재산을 축성된 그릇처럼 여겨 아무것도 소홀히 다루지 말라고 명하였다
(2) 빙엔의 힐데가르트
빌데가르트는 중세시대에 여성으로서 수도원장으로서 의사이자 신학자 음악가 박물학자 그리고 오늘날의 생태학자였다 그이 신비주의 신학은 남성위주의 신학과 달랐으며 그이 신학은 자연과 인간 여성과 남성, 창조와 구원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자연의 생명의 힘은 인간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상하고 망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사명은 생명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녹색의 생명의 힘을 양생해야만 한다 그는 음악을 통해 화합과 조화를 추구하려 하였다 물질세계와 이간세계의 차별을 소거하으로 물질세계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자연은 인간과 서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 진동하고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3) 아씨시의 프라체스코
중세시대 수도사들의 금욕정신을 창조세계 자연에 경실고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고대로부터 근대초기까지 서구사상에서 자연에 대해 연구한 클래컨은 자연애 e한 이런 평가들은 아주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중세 수도사들은 창조세게에 매료되고 자연과 살아있는 교감을 나누었다 동방교부 바시리오스( Basil 379) 는 말하기를 자연으로 물러가서 고독가ㄱ운데 수도하느 이들에게 “자연을 관상하는 것은 영혼의 열기를 식혀주고 모든 불성실함과 자만을 몰아내준다” 고 하였다
서방교회 수도사들도 자연과 외적 아름다운 세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자연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금욕수도사들은 창조세계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는 자연을 무척이나 살아하였다 그는 아무거도 소유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자연에 대해 더욱 마음을 활짝 열수 있었다 그는 자연을 순수하게 사랑하였 그는 새들에게 설교하였다
“ 우리 형제인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모두들 끊없는 은혜를 받고 있으니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 창조주께서는 여러분을 무척이나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배은망덕하는 죄에 떨어지지말고 항상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하십시오 ”
이런 설교를 할 때 새들은 모두 경청하고 들었다고 한다
그는 굽비아란 동네에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만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말했다 그후 늑대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수많은 이런 자연 사랑 이여기는 프란체스코가 자연에 대한 깊은 영성과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이 성숙하고 순결한 상태에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피조물들이 사람에게 더욱 온순해지고 사람은 피조물을 향해 더욱 큰 애정을 갖게 된다고 역설하였다 프란체스코는 는 가난과 결혼하고 모든 소유욕애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을 이용이나 착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발견하고 존중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린 화이트가 프란ㅊ체스코가 기독교의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임을 입중하는 것이다
3. 종교 개혁 시대
(1) 말틴 루터의 생태신앙'
중세 자연관이 비록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인간은 여전히 자연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근대 서구으 인간중심의 자연관과 다르다고 볼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 자연에 대해 과학적인 객관적 태도가 확립되면서 기계론적 자연관이 성립되었다 자여은 죽은 것이다 결정론적으로 운명지어진 것이다
인과적으로 규져오딘 것이며 그리고 정적인 폐쇄체계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인간이 이성을 이용하여 정복해야 할 것으로 파악하였다
루터의 창조신앙 :
우주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만물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창조와 보전은 분리할수 없다 창조행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다 인간과 핒물은 모두 한님의 피조물로서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모든 피조물들은 서로 유대관계가 있고 또한 분명한 구별도 존재한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었을 뿌만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피조물은 자신의 구속을 우해 인간들이 구속을 기다린다
창조는 한번의 행위가 아니라 계속적인 행위이다 식물 동물의 태어남은 하나님의 창조위 계속적인 행우의 결과이다 태초에 만물이 창조되었듯이 지금 이순간에도 하나님의 창조는 계소되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계속 창조사역은 자연이 결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며 단니 인간은 위탁받아 누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창조물은 존재의 낮은 질서에 속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도구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통해 섬김을 받으신다 창조물은 하나님이 모든 축복들을 수여하시는 손이요 통로며 수단이다 타락 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창조의 선함에 대한 하나님의 도구들이다
루터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하나님중심으로 바꾸어놓은 신학자이다
(2) 16게기 재세례파 (재침례파)
재세례파는 성서적 제자도와 나눔의 이상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공존하겠다는 사상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화해하고 경쟁적인 생산 수단에는 제동을 걸었다 소유와 나눔 사이에 균형을 세우려는 현대 재세례파의 삶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 그리고 성서에 근거한 삶을 살며 박해 가운데서도 저항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려는 16세기 재세례파들의 이상이 그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3) 칼빈의 생태사상
칼빈에게서 창조세계 즉 자연과 자연친화적 성격의 사상은 여러곳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자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된 자연보다는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연 그자체를 독립적으로 보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자연을 통해서 ,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보려고 하였다 그는 16세기 사람이다 오늘날 발달한 생태주의 관념을 그대로 찾으려하다거나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요 피조물이다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작품답게 가장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지니고 있다 그 아름다움으로써 하나님의 솜씨를 뽐내고 있다 자연은 하나님을 배우게 하는 학교요 거울이다 자연이나 창조된 세ㅔ계가 하나님을 알게해주고 그이 솜씨와 능력과 영광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이 우주 어디나 나타나지 않은 곳은 없다 (자연에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 있기에 그것을 파손해서는 아니된다)
인간은 마지막에 자연보다 틱월하게 만들어진 존재이다 인간은 신의 걸작품으로 생각된다 한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인간이 중요한 존재이기에 선삼위 하나님 세분이 의논해서 만드셨다 인간은 가장 탁월하고 고귀하개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다 자연에다한 지배권과 사용권을 합법적으로 가진다
그의 자연관, 생태사상은 인간중심적이다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자연 지배권과 시용권은 잔혹하고 비정한 것이 아니다 청지기로서 , 부성애적 관심을 가지고 자연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돌보는 책임이나 사명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다 인간은 우월한 존재이나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자연의 일부이다 그몸자체가 자연인 흙으로 되어있다 그는 인간을 자연과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과 연합된 존재로 보았다 창1:28의 정복하라는 말은 잘 돌보고 양육하라는 말이다
사용권 역시 욕망을 버리고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자연도 하난미이 인간에게 주신 선한 선물임을 자각할 때만이 그것을 잘 활용하고 즐길수가 있는 것이다
칼뱅은 인간이 자연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만을 취할 뿐이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사용할수 있으나 언제나 정도를 지키고 절제된 방식으로 행하여야 한다 인간이 자연에게서 추구하는 것은 재화의 획득보다는 자연과의 관계 그자체였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결코 착취나 파괘가 아니다 땅은 인간에게 그것을 가꾸는 조건으로만 주어졌다 그결과 사람들은 게으르고 나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일을 맡기기 위해 창조되었다 아담은 할일 없이 노는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을 경작하며 가꾸어야만 하였다 어던 재화 획득보다 경작행위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이러누관저머에서 인간은 항상 자연을 잘 가꾸고 아끼며 청빈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자연은 인간의 범죄 타락으로 오염되고 파괴되었다 지금도 인간의 죄로 파괴되고 있다 인간이 부패하였기에 자연도 부패해졌다 고통을 받고 있다 자연도 인간과 함께 죄값을 치루고 있다 인간이 좋아져야 자연도 좋아진다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는 것은 마지막 심판후이다 하나님이 친히 회복하실 것이다 그때가지 인간은 자연과 함께 신음하고 고통을 겪을 것이다 회복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자연에게 영혼은 부여되 있지 않다 영혼은 오직 인간게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도 한니의 구속 대상이요 구속적 도구이므로 영과 함께 일하는 동안에는 자연도 영성을 가졌다고 말할수 있다 자연도 하나님의 영적 사역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자연도 참여하였다 우리 몸도 성령님이 겋시는 전이므로 영적 수단이자 매개물이다 주님의 세우신 새언약의 성만찬에는 포도주와 빵이 주님의 몸과 피의 재로가 된다 자연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필수적으로 참여한다
4. 근 대
(1) 존 웨슬레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다
창조의 상태에는 모든 피조들이 연결고리가 있다 또 존재의 계열이 있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다른 피조물에게 반사해야 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형상-도덕적 형상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물을 위해 일할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을 대 모든 피조물은 무질서와 불행과 죽음으로 내려졌다 하님과의 고나계를 통해 회복된 인간은 이제 피조물과의 온전한 관계를 수립할수 있다
웨슬레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하나의 관계로 해석하고 있다 “창조 때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되도록 은혜를 입어 새롭게 창조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웨슬리의 3중적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자연, 정치, 도덕)은 인간론의 기본 구조가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는 동안 피조물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강력한 윤리적 암시도 담고 있다. 웨슬리는 신도들에게 제시하는 세계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환경의 청지기로서 활동할 것을 기대했고, 자신도 그러한 행동에 깊이 관여했다 세계를 단순히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닌 창조세계와 환경을 보전하고 왜곡된 질서를 회복시키는 활동까지 포괄했다
(2) 크리스토프 볼룸하르트의 생태신학 Christoph Fr. Blumhart( 1842-1919):
회개를 통한 인식변화를 강조하였다 생태적 창조신앙을 강조함 . 우주적 그리스도론으로 생태문제 해결책을 제시함. 구약성서의 창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구함
1) 서구의 산업화로 인해 지구 환경은 크게 훼손되었다
2) 세계 1차대전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서구교회도 심판 아래 있다
3) 지구 위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은 미성숙함으로 잘못돤 발전을 가져왔다
4) 자연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체이다
5) 하나님이 생명체를 보호하신다
6) 인간은 맨나중에 창ㅈ조된 피조물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
7) 인간은 인격체이고 다른 피조물은 종류(속)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형상을 지닌 인간을 통해 피조물을 다스리신다
8) 인간과 다른 피조물은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피조공동체이다
9) 인간은 자연에 대한 청지기 사명을 갖고 있다 오늘날 생태계위기는 청지기 사명을 망각하고 인간 탐욕에 기인한 창1:28을 잘못 해석한 것이 원인이 되고 있다
10) 하나님의 세상창조는 걔속 발전한다 발전목표는 하나님 의 안식에 있다 세상창조의 궁극적 목표도 하나님의 안식이다 세상창조이래 어둠의 세력이 항상 자연을 , 생명을 파괘하려고 시도하여 왔다 인간은 사탄에게 속아 범죄 타락하여 피조세계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인간은 물론 자연까지 사탄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다
11) 구원은 하나님 ,사람 자연의 근본적 관계가 회복되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에 의해 창조질서가 회복된다
B. 성경에서 자연의 개념
1. 구약성경에사 자연의 이해
하나님은 인간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대 인간 중심, 인간 역사만을 읽으려해서는 않된다 성경에는 자연환경에 관련된 기록이 얼마든지 있다
1). 성경에서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우연적 존재가 아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것이며 하나니님의 목적에 따라 그분에게 봉사하는 기능 을 가진다 그러므로 저연은 하나님의 役事의 과정이며 변형돨수도 있다 (고대 중동 국가에서 자연은 완성된 피조체이었다) 자연은 숭배대상이 아니다오직 피조물일 뿐이다 고대 중동국가에서는 그들이 섬기는 신들조자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지금도 하나님은 창조하신 자연을 돌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연안에 계시며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고 계시다
우주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창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창조기록의 목적은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란 것을 강조하는데 있다 당시 이스라엘 주젼국가들은 해달별등 눈에 보이는 자연을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창1:1의 창조에 대한 말씀은 그런것들이 모두 하황된 우상숭배에 불과함을 널리 알릴고 있다 두 번째 목적은 하나님이 잋럼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를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음을 강조한다 (창1:26-28)
2), 자연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의 도구이다
자연은 심판과 축복 --구원의 도구로 사용된다 (창4:10) 하나님은 자연 사건 속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개입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고 자연을 돌보고 꾸미는 사명을 감당해야한다
3). 자연은 신인동형론적( Anthropomorphic) 이다
자연전체로 사람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생욱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에 다라 번성한다 (창1:22 8:17) 자연도 하나님과의 계약적이며 (사11:6-9 호2:20)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섬긴다 (신8:7-10)
4), 자연은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생존의 공동광장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알수 있는 매개이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자체이며 자연이 곧 인격을 가진 그 인간이다
5)자연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시8:6-8)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8:6-8)
6) 자연은 인간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
성경사상에 있어서 자연은 결코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인간과 하나요, 인간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매개역할을 한다. 시편기자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한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telling)궁창이 그 손의 하신 일을 나타내신다(declaring)(시 19:1)사도바울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또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인격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람처럼 자연도 피곤하고 병들고 노쇠해진다. 성경은 땅이 울며 탄식한다고 말한다. 성경의 안식년은 사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땅의 쉼과 관련되어 있다. 땅도 쉬어야 한다. 과로하거나 무리해서는 안된다. 땅은 무쇠처럼 한없이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쉬고 돌봄을 받아야 한다. 나아가서 자연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체다. 세계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자연은 인간과 함께 하나님께 찬양한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 148:3-5)
7) 자연은 원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되었다
창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2. 신약성경의 창조세계 : 자연
(1). 예수그리스도
원시기독교 이래 교회는 하나님이 창조주요 동시에 구속주라는 신앙을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러너 그후 구속사 조직신학에 창조신학이 눌려 자연애 대한 관심이 소홀하개 되고 오늘날 환경 파괘에 대해 미처 대처하지 못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수 없다
신약에는 구약애 비해 창조신학을 취급하는 구절들이 풍부하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특히 산상설교와 비유에서 창조신학이 드러나고 사도바을에게서는 창조신앙이 여러군데서 나타난다
1) 자연은 하나님에게 귀속된 것이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창조후에 생물들을 보호하시고 보살펴주신다 하늘에 새를 날개하시고 땅의 들풀조차 보살피신다 예수님은 자연속에서 창조주 하나님 만물을 만드시고 보전허시거 살피시는 분임을 천명하셨다
하나님이 생물들을 먹여주시고 키우신다
(마6:26)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8)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30)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 창조주하나님은 만물을 사랑으로 돌보신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니을 예수님은 아버리고 부르셨다 이는 하나님의 만물에 대한 부성을 말하는 것이다 피조물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보호하시고 돌보신다 마치 아버지가 그 자식을 낳고 보호하듯이 하나님의 부성은 인간뿐만 아니라 온 피조물에게 학대된다 그분은 악인이나 선인에게도 동일하게 햋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신다 마5:43-48
3)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고 삶과 죽음의 주인이시기도 하다 마10:29-31
(눅12:6-7)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하나님은 피조물의 흥만성쇄를 주관하신다 종말론적 심판에서도 인간의 피조물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신분이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두려운 세력에 의해 지배당해서는 아니되고 피조물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4) 예수는 비유를 통해 자연속애 나타난 하나님의 피조물의 질서들을 보여준다
마6:25이하 막4;1-9 눅13:6-9 요12:24 요15:1 등 창조세계에 대해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유비시키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능력과 솜씨 종의 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신학적 내용들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일회적인 창조행위와 창조세계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강복행위로서의 창조행위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 강복행위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번성하고 열매맺어 샬롬에 이루도록 하는것이다 동식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순응함으로 받게되는 하나님의 강복을 인간도 아낌없이 누려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강복 속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사귐을 가져야 하며 그들과 함께 샬롬에 동참할 특권을 누릴수 이어야 한다
막1:13을 보면 주님은 금식하실 때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과의 사귐 속에서 안식하는 분임을 직접 보여주셨다
예수그리스도는 현재 피조세계를 유일한 창조신앙의 표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새롭게 완성될 창조를 보신다 즉은 자의 부활에서 말해주는 대로 부활의 세계는 세속사회의 결혼과 같은 것이 없다 (막12:25) 거기서 우리는 포도나무의 새멺를 먹개될 것이다 (마14:25) 예수가 그리는 이 메시야적 증거의 세계는 이미 이사야 25:6-8의 말슴의 조명하에서 종말론적이며 궁극적인 창조를 가르친다
(2). 사도바울
1)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낸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창조신앙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하나니을 예찬한 옛님처럼 인간은 당연히 눈으로 보이는 피조물 속에서 그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롬1:18-21)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러나 인간은 창조주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창조주를 피조물로 전력시키고 말았다
(롬1:22-25)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고전1:21)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고후4:6)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롬4:17)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자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다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주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지금가지 그분에 의해ㅑ 현존하며 보전돠고 있으며 긍국적으로 창조주하나님의 새창조세계로 돌아간다
3) 예수그리스도도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이시다 그는 창조의 매개자이시다
(고전8:6)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골1:16)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리스도의 선재성 (골1;15) .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하게 창조주요 창조의 보전자이시다
4) 자연도 구원의 대상이다 (롬8:19)
롬8:19 피조뮬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인간이 범죄함으로 타락하여 자연도 함께 저주를 받게 되었다 종말에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다
* 성경의 자연에 대한 결론
1)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일뿐이다 그자체에 어떤 신성을 부여해서는 않된다 범신론은 전적으로 부인되어야 한다 또한 피조물을 신처럼 숭배해서는 않된다
창조기사는 자연종교의 자연관을 거부한다 자연속에는 어떤 마력이나 신성이 없다
창조기사는 자연세계를 귀신이나 신성의 세력에서 해방시킨다 자연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에서 해방시킨다 세계를 자연의 결정론적 자연법칙성과 운명론애서 해방시킨다 자연을 비신화화,탈신격화시킨다 자연은 자연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스라엘, 성경의 창조신앙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접근과 탐구의 분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에 의해 자연에 대한 파괴와 착취도 이루어졌다
(2) 세계의 처분권 소유권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2) 인간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 영광의 흔적을 발견하고 목격하고 확인할뿐만 아니라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에게 대한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의 보전과 보살핌을 깨닫고 그속에서 주어진 창조의 강복에 함께 참여할 권리왕 의무를 지닌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현실저으로 이일에 실패하였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이며 따라서 여기에 새창조 곧 새피조물의 개념이 나타나있다
** 예수,바울 말씀에서 나타난 창조신앙은 단순한 자연에 대한 고찰이나 이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시의 빛에서 주어진 것이다 곧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자유케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시의 빛 아래서 모든 자연만물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의 보살핌에 동참하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기본적인 전제라 할 수 있다
3) 기타 성경의 자연에 대한 교훈
*시19:1-6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라.
*시50:1-6 자연은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시89:11-12 하나님은 자연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시다.
*시104:16-24 자연은 그 아름다움과 풍요함을 나타내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노래하였다.
*시121:1-2 자연은 사람의 도움이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을 가르친다.
*시126:5-6 자연은 자연의 법칙(길)을 가르친다.(눈물로 씨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
*마6:26이하:자연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나타낸다(예수님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심)
*계21:5 자연은 마지막에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다.
*계22:1-2 천국에서 자연환경은 너무 아릅답고 훌륭하다.
3. 인간과 자연의 관계
(1) 인간은 자연의 청지기이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아울러 다른 피조물 특히 자연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게 하는 사명을 주셨다
-다른 피조물보다 더욱 많은 복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 인간이 하나님 창조사역ㅇ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존재임을 밝힌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혈을 기울여 만드셨다
(창2:7)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가 있는 영적 존재이다
-만물을 다스릴 권한과 의무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되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으 신분은 아주 고귀한 것이었다
(시8:4-8)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인간과 자연은 그자체에 존재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간이 그 속에서 쉴수 있는 안식처로 만들어졌다 인간이 만들어진 후 창조세계의 축소판인 에덴동산에 거주하게 된 사실로부터 더욱 분명해진다
-인간이 피조물의 왕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결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세게에 대해 무제한의 지배권을 가진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왕권은 파괘와 수탈을 정당화시켜주는 통치가 아니다 만일 그럴경우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보시고 그것을 아주 좋은 것으로 여기시던 하나님의 평가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것이 된다
욍은 백성들을 수탈하고 멸망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잘 살도록 돌보고 보호하는 존재이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죄로 인한 타락으로 인해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하고 파괘하느 잘못을 저질러왔다구약은 자연을 경배의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고 아울러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보지않는다 하나님이 인간게 주신 통치권은 사람의 터전인 자연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에덴에서 인류 조상의 사람은 자연과 완전 조화를 이루며 산 삶이다 연과 인간이 상호 공존하며 서로 의존적으로 존재하였다
(창2:15)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개역성경은 “다스리며”=아바드=예배하다 경작하다, ) 지키게 하시고(파괘되지 않도록, 그리고 악한자가 유혹하지 못하도록)
-인간은 처움부터 자연을 위해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존재로 그리고 자연을 지키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 지음받았다
-자연을 경작하며(다스리며) 지키라는 말씀은 은혜요 축복이다 동시에 책임과 의무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되 위임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자연질서를 유지하고 보전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자연에 대한 인간 통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되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책임적 통치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인간이 자연애 대해 저질러놓은 환경파괘는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을 저버린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배신행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잘관리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 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 대해 청지기 직분이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자연이 경코 인간의 소유가 아니며 오직 하나니의 것임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뿐이다 자연파괘는 창조질서를 교란시킨다는 소극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위임 관리자(통치자)이다
-인간은 철저히 청지기신분이다 봉사하도록 부름 받았다
-인간의 참 행복은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노동의 삶을 통해서만 구현된다 그는 더불어 사는 책임적 존재로서 살아야할 의무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자연 에덴동산을 잘 경작하고 관리하고 지켜야 하는 신성한 의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창1:26-28의 해석 문제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은 자연을 정복하고 파괘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피조물들에게 이미 복을 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자연을 잘 관리 하지 않고 마구 파손한다면 하나님을 모순된 존재로 만들고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피조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게 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의도와 명령을 정면 거슬리는 일이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자연을 잘 관리하고 자연에 주어진 여건을 잘 개발하고 활용하여 인간과 자연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고 더욱 복된 삶을 누리라는 명령이지 자연을 함부로 정복하고 파괘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을 돌보아야 할 하나님의 청지기로 창조되었다 하나님 형상 개념은 린 화이트가 생각하는 그런 파괘나 정복의 개념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이요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도 폭군이 된다. 쉐퍼의 말대로 "인간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일 수 있고 선한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동양의 범신론사상과 자연경외사상이 성경사상과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범신론은 모든 사물에는 신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이러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자연에 대한 외경사상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동양적 사고에서 산과 바다는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지 다스림과 지킴의 대상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피조물을 비신화화(非神化化)시킨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도 존경과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성경은 자연에 대하여 인간이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자연에 대해 책임적 존재로서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2) 자연과 인간은 상호 의존 관계이며 한 공동운명체이다
성경이 말하는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이 동일한 본질적, 공동운명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3장 7절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동일 본질적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아담-인간, 아다마-땅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음성학적 유사성에서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연과 인간의 공동운명적 성격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의하나님의 징벌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다."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3:17) 위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담에 대한 죄의 심판이 의미심장하게도 땅에게 내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심판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자연에까지 미친다. 여기에서 자연과 인간의 상호관계적, 공동운명적 관계를 보게 된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예언자 이사야는 잘 보여주고 있다."산천은 메마르고 세상이 파괴해지니 하늘도 땅도 함께 슬퍼한다. 땅이 더러워졌다. 그들이 ‥‥ 영원한 계약을 깨뜨린 때문이다"(사24:5) 그러므로 땅을 죽이는 자는 자신을 죽이는 자요 땅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다.
롬8:19-20 인간의 범죄로 자연도 탄식하고 있다
계6:12. 8:12 9:2 대기오염, 계9:18 매연, 황산가스발생 종말에 있을 사건을 예언
계8:7 산림 벌목 사막의 확대됨
계8:10-11 수질오염 예언 ( 말세에 나타날 ).
* 골1:17, 엡1:10, 4:10 계21;2 모든피조물의 구원을 언급함. .
요3:31 15:19, 6:44, 12:32 히11:6 12:22. 인간 구원과 전 피조물의 구원, 이둘의 이중성의 조화방법은 그 누구도 모른다. 다만 개인주의 구원관은 이웃과 다른 피조계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더욱 완전해져야한다
-인간은 근본된 토지를 경작하며 살아야 한다 필요한 식물을 재배하여 더욱 풍족한 삶을 누리며 타생명체와 함께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창조세계를 떠난 인간의 삶은 상상할수 없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기에 인간이 없어도 살아갈수 있으나 인간은 창조세계 없이는 생존이 불가하다
인간의 범죄는 자연에게 가지 영향을 준다 심판도 함께 받는다(창6:7) (창6:11-12)
하나님은 노아 심파후에 새 언약을 맺으시는데 인간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도 언약을 맺으신다 (창9:9-10)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인간이 회복되면 자연도 회복된다 (사11:6-7)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자연도 인간을 경외하지 않게된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고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인간과 자연이 한 운명 공동체임은 법적이고 제도적인 데 까지 확대된다
안식일에는 육츅도 일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인간은 일하면 아니된다
(출23:12) (12)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의 정신을 기본정신으로 갖추고 있다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하지 말고 묵혀야한다 -땅의 생산력을 증가시킨다 보다나은생존을 보장하고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어제시키는 효과가 있다
(출23:10) (10)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채무를 면제한다 (신15:1-3) -종들을 해방한다(출21:2-6)
-묵혀둔 땅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생겨난 수확물은 가난한 자들과 짐승들을 위해 내버려두어야 한다 (출23:10-11)
희년 (50년마다 오는 해)
(레25:11-12) (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레25:18-22 참조)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아울러 토지를 보전하고 지력을 향상시킴으로 인간과 자연이 똑같이 생존할수 있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인간의 고도한 욕망으로 땅은 지치고 지력을 잃고 항폐화되기 쉽다 쉼은 인간에 이해 가공된, 망가진 자연을 회복시키는 생태학적 의미를 지닌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에 있다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 행동은 자연애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인간이 하나님 법을 어기고 자연을 훼손시키면 반드시 그피해가 인간에게 돌아온다 또한 하나님 법을 다라 살려고 노력하면 그에 대한 보상이 창조세계를 통해 주어진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는 당시에 무슨 환경문제나 생태계 위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언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에 넣으신 불변의 법칙을 그대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3) 자연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매개이다
(시19:1-6)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
-인간은 자연을 통해 갖추어진 하나닙의 신비한 특성을 이해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연약성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찬양하게 만든다
(시90:10)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자연은 또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깨닫게 한다
(렘4:23-26)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자연은 하나님을 아는 통로가 된다 롬1:18-23
4)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다 자연의 일부이다 몸은 흙으로 되어 있다 죽으면 흘으로 돌아가야 한다 창3:19 (시103:14)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90:3)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자연은 영원히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땅도 7년마다 쉬어야 하고 50년마다 쉬지않으면 안된다
5) 인간이 타락한후에 인간은 탐욕에 기인하여 자연을 파괘시켰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만물을 잘 관리하라고 명하셨는데 인간 안에 있는 끊임없는 욕심때문에 괸리는 커녕 파괘하고 오염시키는 죄를 범했다.
6) 자연환경 파괘의 회복노력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주님의 재림으로 새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것이기 때문이다
(사11:1-9) ...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65:17-25 참조)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넘치는 나라로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한몸을 이룬 가운데 모든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세계로 묘사한다
하나님이 회복하실 새로운 창조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조화로운 상호공동 세계,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 사랑, 사귐 나눔이 있는 평화의 세상, 죽음이 없는 생명의 세계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골고루 임하는 세게가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처럼 자연과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서로에게 의존하는 종말론적 한님 나라를 지향해야 할 책임을 안고 있다 이길만이 인류의 살길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 결론
하나님은 자연을 사랑하시고 배려하시는 분이다 노아홍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구원하셨다 계약도 인간만 아니라 모든 생물과도 하셨다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다 계시의 수단이며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도구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아니라 피조물에게도 복을 주셨다
자연파괘는 인간의 위기만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행위이다
공중의 새와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D. 성경에 나타난 자연환경보호
1. 성경에 나타난 자연보호 명령
(1)선한 청지기가 되라:고전4:2 맡은 자에게 구한 것은 충성이니라
(2)안식일에 휴식취하라 출23:12 짐승까지,(안식년-토지까지)-생산성 향상제고
(3)토지의 휴식:생태계의 보존 地力회복 토지남용방지(출23:10-11)
(4)희년의 율법:레25:23 토지는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이니라
토지의 소유 집중방지 토지 착취방지
(5)수확에 관한 법:레19:10 곡물 벨 때 밭모 줄이지 다 베지 말고
출23:10-11 안식년에 토지경작금지 사림의 탐욕에 의한 토지남용방지
(6)위생에 관한 율법:레13-14 음식물 손 일상용품 청결유지 명령
레13:52 오염된 의복 불살라야! 레14:43-45 오염된 집은 불살라야
신23:13 더러운 오물등은 땅에 묻어야! 레11:45-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7)전쟁에 관한 것:전쟁중에도 환경파괴말라
신20:19-20 도끼로 그곳의 나무를 작벌하지 말라. 시24:1 욥41:11
(8)토지에 관한 욕심금지:시50:12 세계와 거기 충만함이 내 것이니라(시150:12)
사5:8,10 가옥에 가옥을 연하여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 진저
(9) 창1:26 피조계를 관리하고 다스릴 인간의 의무를 주시다
(10) 벧후1:6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권면하다
(11) 요6:12-13 (빵과 물고기)남은 조각도 버리지말라-주예수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심
결 론
우리는 자연을 피조물로 보는 신앙을 통해 자연을 신격화하지 않으면서 착취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길을 찾을수 있다고 본다. 성서의 피조물 신앙은 우선 자연의 신격화를 막는다. 자연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궁극적인 관심은 만든 분을 향하며 자연 그 자체에 쏠리지 않는다. 물질과 공간에 대한 초월이요 비신성화다. 사람도 만들어진 존재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드는 시간 곧 역사에 대한 초월이요 문화에 대한 비신성화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피조물로 보는 기독교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부름을 좇아 자연과 역사를 넘어서는 초월이다. 자연과 역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며 자연과 역사를 중시하되 자연주의와 역사주의(역사 내재주의)를 모두 배제한다. 자연주의처럼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 보지도 않고, 현대 기술과학이 낳은 역사주의처럼 자연을 사람의 일부로 보지도 않는다. 성서에 따르면 자연은 분명 인간을 위하여있다. 인간에 대해 있다는 말이다. 자연은 인간에 대한 자연이다. 거기서 대상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인간에 대한 자연'은 마음놓고 함부로 대상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인간에 대하여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에 대하여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시편 104편의 영성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체다. 성령이 충만한 프란체스코는 새들과 꽃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다. 주위의 생물과 무생물이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 믿을 때 우리는 바위 하나에서도 신비감을 느낀다. 그 신비감은 존재의 기원을 따져 올라갈 때 느끼는 과학적 형이상학(쟝 기똥, 「신과과학)보다 더 친밀한 신비감이며 존재론적 신비주의 보다는 윤리적 신비주의와 더 가까운 무엇이고 자연에 흡수되는 원시종교의 신비감과도 다르다. 그것은 친구(다른 사람)를 '마주 대할 때' 느끼는 신비감과 같다. 뭔가 얘기가 통할 것 같은 신비감이고 대상을 거쳐 자연을 상대로 보는 정서다.
3. 기독교의 올바른 자연관
1. 자연에 대한 태도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1) 자연에 대한 정복 태도; 서구 사회
(2) 자연과 연합하는 태도 ;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본다 동양 사회. 미국 원주민
낭만주의 운동, 도교, 선불교
(3) 자연에 대한 청지기 태도; 성서적 사상 최근 신학자들, 철학자들.
성경은 인간은 오직 자연에 대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잘 가꾸고 돌볼 의무가 주어져 있으므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성겨의 오바른 가르침을 거역하ㅇ고 인간 욕심에 끌려 자연을 정복하고 파괘하는 것은 비성서적인 견해로 경코 기독교의 올바른 자연관이 될수 없다
2.기독교 (성경)은 다음과 같은 자연에 대한 대한 극단적인 견해들을 반대한다;
(1) 진보주의;(경제주의);과학기술만 발달하면 환경문제 해결된다 오늘의 자연환경문제는 과학기술이 덜 발달한 결과이다 이사상은 진보에 ei한 신념이 강하다
반론 : 인간 본성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간과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그것이 전적으로 선을 위해 사용되 않았음은 인류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2) 어머니 지구론;토인비; 인간은 자연의 아들이다 자연에서 나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땅은 어머니요 인간은 그 아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땅에 대한 도리를 다해야한다
롬1:19에도 자연은 거룩하다고 말씀한다 이정배 교수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남성상 ,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연이 파괘되었기에 환경운동을 여성운동과 연계시킨다
반론 : 범신론적 사상이다 지연을 신성시하므로 일종의 우상이 되고 있다 롬1:19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성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지 자연 그자체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들이 핑계하지 못하도록 자연애 하나남의 신성을 나타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여성운운은 지나친 비역이다
(3) 인간 부분설;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 인가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생명체의 일부분이다 장회익 교수는 글로벌 생명을 주장하였다 후꾸오까 마사노 는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주장한다 인간이란 거대한 생명체에 부어있는 존재이다 자연을 파괘하는 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인간정신은 정보체계이다
반론 : 인간 생명은 자연생명과 다르다 아주 독특하다 유물론적이고 진화론적인 사상에 빠질 위험이 많다 범신론 사랑이 분명하다
(4) 대여론; 현재 자연환경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자손들에게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 관리하였다가 후손들에게 돌려줄 책임이 있다
반론 : 성경적 근거가 없다 자연환경은 하나님에게서 빌려쓰는 것이지 후손들에게서 빌려쓰는 것이 아니다
(5) 환경론적 환원주의; 성경의 모든 예언은 환경과 관련되어있다. 그렇게 해석한다
(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계16:3-4) =이를 수질 오염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종말은 핵무기에의해 온다고 주장한다
-반론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고 시대조류에 다라 해석하는 면이 강하다
결 론
성서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처럼 하나님이자기의 뜻에 따라 말씀으로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에는 하나님의 무슨 '뜻'이 들어있고 '말씀'이 들어있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지 전혀 건드리지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물활론이나 자연신 하고는 다르다는 얘기다. 피조물 신앙에서 자연은 어디까지나 사람에 대하여 있고 다만 하나님께 대하여도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상화를 거쳐 상대화로 가는 길을 발견하며 자연이 인간의 상대가 되어 공생공존하는 길을 발견한다. 자연과 인간이 주체 대주체의 관계를 맺는 길이다. 물론 여기서 자연을 주체로 본다는 것은 주체 '처럼'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을 이용하되 착취하지 못하는 길이다. 즉 하되 함부로 하지 못하는 길이다. 자연을 피조물로 보는 관점은 산업사회 속에서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현대인에게 귀한 신앙의 유산이며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는 과학작들에게 필요한 영성을 제공하리라 믿는다. 과학이라는 것도 결국 무슨 세계관 또는 영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 기독교 환경윤리
1. 환경에 대한 올바른 견해,인간의 의무
인간은 자연을 잘 관리하고 보존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청지기와 창조물은 보호되어야 한다(우리 생존을 위해서) 창조물, 자연의 보존개념은 창조의 개념이 확립되어야 가능하다.
찬양 받으소서, 나의 하나님! 우리의 형제인 바람과 공기, 그리고 흐리거나 청명한 모든 날씨를 당신은 우리에게 베푸시나이다. 이로써 당신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나이다. 찬양 받으소서, 나의 하나님! 우리를 지탱해주고 다스리며, 온갖 다채로운 꽃들과 잎들을 가진 열매를 낳는, 나의 자매인 어머니 땅을 인하여.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일부 극단적인 환경운동가는 인간에게 생명의 권리가 있듯이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인간과 ‘똑같은’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오존층의 파괴, 산림의 훼손, 땅의 침식, 종들의 멸종, 대기와 하천과 대양의 오염 등의 최근의 환경파괴현상을 직시한다면 이러한 권리주장이 왜 나오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환경의 파괴가 곧 인간공동체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경오염과 생태학적 위기는 근본적으로 기술문명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인간중심적 자연 또는 생명철학을 정초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생태학적 근본주의와, 인간만이 도덕적 주체라는 인간중심주의를 견지하면서 환경친화적 진보의 정책과 전략의 추구를 주장하는 환경개량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문제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을 의지와 권리의 주체인 인간에게 한정하며 자연은 오직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는 전통적 윤리관을 고취한 것인지 아니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을 인간 이외의 생명체와 생태계에까지 확장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는 혁명파라다임을 취해야 하는지의 질문이 될 것이다.
사실 양측의 입장이 모두 문제를 안고 있다. 생태학적 근본주의는 ‘환경파시즘’을 산출할 뿐 아니라 다양한 세계관을 전제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전통과 양립할 수 없다고 질타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듯이, 자연과 생태계는 어떠한 인간적 이유로도 침해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나 환경개량주의적 태도 역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환경친화적 정책의 결정은 기술행위의 장기적 효과를 합리적으로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제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관찰과 인식이 그 자체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익집단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전문가들은 도덕적, 정치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정책결정의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인간중심주의 환경위기를 정신사적 근원이라 하더라도, 반인간중심주의가 결코 생태적문제의 해결은 아니다. 환경개량주의가 생태학적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고한다면, 생태학적 근본주의는 기술의 문화적 역사적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술이 단순히 자연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자유존재로서의 인간의 표현이며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매개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진보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연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생태적 철학과 윤리를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물론 인간이 자연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적극적 변형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강한 인간중심주의를 배격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이며 또 다른 동물과 식물처럼 생태학적 상호의존의 체계 안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자기의식과 반성의 능력을 가진 생명체(인간)과 그렇지 못한 생명체와의 존재론적 차이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협의의 도덕적 공동체는 의지와 권리를 가진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에 국한된다. 평화, 유대성, 동반자 관계는 평등한 권리를 가진 인간들 상호간의 구조적 평형관계를 서술하는 것이지, 인간과 자연의 비대칭적 관계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름다움, 신성함, 질서있음, 존엄성 같은 자연의 비도구적 즉 정신적 가치를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연에 대한 비착취적 기술행위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정신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자신의 고유한 선을 추구하기 위해 물질적 욕구에 예속되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하듯이, 자연에도 역시 도구적 가치를 넘어서는 고유의 선이 있다고 인정할 때 자연은 비로소 정신적인 영역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현재 생태계의 위기는 새로운 자유의 개념을 요구한다. 만약 생명과정의 산물인 인간의 본질적 가치가 자유에 있다면, 인간은 자연을 자유롭게 할 때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실현할 수 있다. 현재의 생태학적 조류는 생명이 자유의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인간자유의 실현수단인 기술행위가 ‘생명공동체의 통합성, 안정성, 아름다움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기술행위의 생태학적 한계인 것이다. 이는 동시에 자연의 생명에 대한 존중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평등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명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도덕적 수혜자의 영역이 자연의 전생명체로 확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덕적 고려가 모든 생명체에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의사소통적 관계의 정도에 따라 차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생명체와 사물이 훼손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신체적, 인격적 훼손가능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잡초보다는 정원수에, 정원수보다는 애완동물에 더 많은 가치와 ‘인격’을 유비적 의미에서 부여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기술행위가 전체 생명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술시대에 모든 자연의 생명체가 도덕적 수혜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덕적 고려의 정도는 인간과의 의사소통적 관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과연 “우리의 자유를 실현하면서 동시에 자연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은 가능한가?”하는 질문일 것이다.
2. 환경문제의 윤리적 기초
(1) 탈 인간중심의 윤리관 정립과 자연관의 변화시도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인간중심사고를 벗어나야한다 인간만이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는 종 우월주의(speciesm)는 인종우월주의(racism)나 성차별까지 나아간다 (Peter Signer) 그러나 싱어의 종우월주의는 동물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Animocentrism) 식물도 하나의 현재루 지니고 생존할 필요를 가진다 한발 더 나아가서 생물중심적윤리학으로 나아가야한다
(2) 전일적 우주관의 정립;
조화와 균형의 우주관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의 질서가 곧 인간윤리규범이다 ㅡ우주의 조화와질서는 균형잡힌 정의라고 본다(이낙시만 드로스) ..초기의 희랍철인들은 “정의의 자유화”생각함. 윤리범위를 확대함 안드로 레오포드는 Land Ethics를 주장한다
(3)진보에 대한 윤리적성찰
물질적인 부요가 과연 참 진보인가?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을 다시 고찰해보고 참되고 유익한 진보가 무엇인지를 다시 성찰해본다. (낙관적진보사상은 1차대전이후 무너졌다)
3. 생태학적 윤리이념 방향 김영한 교수
1)생태학적 유대성 실천:창조물의 상호연관
창세기의 기사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어떠한 생태론적 갈등도없다. 인간은 창조의 통합된 부분이다. 인간은 결단코 자연의 지배자나 정복자가 아니다. 창세기 1장 28쩔의 말씀은 땅의 지배명령이 아니라 땅을 관리하고 돌보는 청지기 명령이다.
2)권력의 포기:하나님 형상의 기독론적 회복
인간은 그리스도의 겸허를 본받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근대적 인간의 힘이 지배표상을포기하고 자연과의 생태학적 조화와 통합적인 유기체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
3)전 창조의 약속된 샬롬: 종말론적 희망의 윤리
생태학적 윤리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재림과 더불어 완성될 생태학적 새창조의 약속의 지평을 가지고 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이미 가시화 되었고, 그의 메시아적 재림과 더불어 온전히 구현될 것이다.
-생태학적 신학은 근대과학과 현대신학에 있어서 상실한 자연의 생태학적이고 성례전적 가치를 발견하는 점에 있어서 그 독특한 공헌을 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샤로운 이해에 있어서 자연이 인간중심적으로든 생태중심적으로든 일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왜곡된 이해이다.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로서창조주 하나님, 구속자예수그리스도 생명의 부여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신과의 관계속에서 즉 삼위 일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생태학적 신학은 생태학적 윤리의 이념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여태까지 기독교윤리가 등한시한 창조윤리를 재복권시키는대로 나아가야 한다. 첫째, 그것은 생태학적 유대성의 형성이다. 둘째, 힘의 포기앋. 셋째,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희망의 윤리이다. 생태학적 신학은 구체적인 윤리적 의식을 동반한다. 그것은 생태학적 의식의 활성화이다. 생태학적 의식의 구체적인 모습은 생명에의 외경, 자연에의 순응, 통합적 사고, 자족성의 새로운 윤리적 삶이 요청된다. 그것은 새로운 금욕사상이다. 그것은 포기를 통한 발전이다.
. 4. 생태신학
생태신학이란 환경위기에 대처하는 신학이다 환경위기의 시대에 신학과 교회는 어던 대안을 제시할수 있으며 자연을 어덯게 해야하는가 그독교교인들은 어던 실천적 과제들을 수행할 것인가? 대해 논하는 것을 생태신학이라고 한다 이는 자연의 신학, 환경신학, 창조신학, 생태학적 창조론등의 용어로도 불리운다
성경에는 자연이란 말이 없다 이는 헬라철학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자연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서구신학에서는 창조라는 단어가 자연대신 사용된다
생태신학은 최근에 태동된 신학이다 1970us 이전까지만 해도 자연에 대한 관심이 극히 미미했다 오늘날에는 자연파괘 현상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생태신학은 우선 하나님 ,자연, 인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져한다 성경이 환경파괘의 주범이라는 주장에서 해방되시키고저 한다 생태신학은 서구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인 문제이다 특히 개발도상국가의 한경파괘는 자국의 겨제성장을 우선하는 정책으로 급속해 황폐화되고 잇다 생태신학은 인간중심의 신학이 아니다 환경보호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해도 인간의 자연에 대한 책이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생태학은 오직 윤리학의 일부가 아니다 생태신학의 연구는 주로 성경 연구를 통해 진전되었다 생태시학은 여러 신학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다 생태신학은 일종이 일시적 흐름이 아니다 신-인 -자연에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논의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생태신학의 패러다임은 인간과 자연이 공생적 패러다임이다 생태적 패러다임의 내용은 지금까지 사용하던 메타포를 바꾸는 것이다 메타포의 변화는 인간의 인식변화이며 실천과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생태신학은 21세기의 신학이다 환경문제는 지금가지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내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경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는 엄청난 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 과학으로 해결하려하면 한가지 햐결하면 도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생태신학은 그칠줄 모르는 인간 욕망과 싸우는 신학이다
생태신학이 21세가 신학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데카르트, 뉴턴 베이컨에 의해 형성된 ,20세기까지 지배해온 기계적 자연관의 21세기적 극복이기 때문이다 생태신학은 기계적 자연관을 극복하고 유기적이며 역동적이며 관계적인 자연의 신학을 추구한다
앞으로도 신학은 과학과의 지속적인 대하를 통해 자연에 대한 유기적인 사고를 잗아들이고 과학에 대해서는 자연의 가치와 신학적 의미를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생태신학은 19, 20세기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당미을 추구하는 신학이다 21세기의 신학이다
5. 왜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고 사랑해야 하는가?
인간과 자연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 깊은 산 오솔길 옆 조그마한 연못하나가 있었다.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고 있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싸움이 벌어져 두 붕어는 물어뜯고 했다. 그러자 한 마리는 죽어 물위에 떠오르고, 그놈의 살은 썩어 들어갔다. 그러자 연못의 물도 썩어 들어갔다. 이긴 줄 알았던 붕어, 영원히 잘 살 줄 알았던 붕어가 썩은 물을 먹게 되자 얼마 후에 그도 죽고 말았다. 그래서 깊은 산 오솔길 옆 조그마한 연못엔 지금도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게 되었다.
(1) 자연을 보호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창11,26-28)
(2) 환경파괴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3)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
(4) 피조물도 해방을 희망하는 자임: 창세기 3장, 롬8:19-26..
6. 자연 환경 보존에 대한 기독교의 성경적 대안
"기독교라고 해서 무조건 해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바른 기독교가 아니면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일종의 플라톤적 이원론에 기초한 기독교로는 자연에 대한 해답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눈물을 머금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말은 많은 정통 기독교와 복음적 기독교가 단지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 가게 하는 데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플라톤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공해」, 두란노서원,p.32).
그렇다. 기독교라고 해서, 기독교의 간판을 걸었다 해서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환경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쉐퍼의 말대로 바른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 기독교인이 앞장서서 환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무엇보다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확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확신없이 벌이는 환경운동은 피상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다. 성경적 신학적 이론무장과 함께 구체적 실천이 있어야 할 것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고찰'이라는 주제를 두고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환경개념을 분석해 내거나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성경적 패러다임에서 환경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만 우리의 논의를 머물게 하지 않고,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에 직면한 오늘의 우리 인류에게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을 성경적으로 찾고 제시하는 데까지 우리의 논의를 끌고 가야한다. 그러나 폐수나 쓰레기처리를 어떻게 하며 수질개선과 토질개선은 어떻게 하는지 등 현실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논지를 진행시킬 수 없고, 다만 성경에서 제시하는 기본적으로 원칙적인 답변들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동양과 서양의 만남과 새로운 공생의 길은가능한가
- 힌두교;모든 피조물은 동족관계이다
-자이나교;살아있는 존재를 귀하게 여겨라
-불교;모든 피조물에 대한 자비심을 강조하다
-이스람교;동물과 자연을 존중하라
-바하이교;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역설하다
- 기독교와 타종교의 공조; 환경운동에서 대화 공조가 가능하나 단순히 생존만을 위한 공존 공생은 별의미가 없다 배타주의에 머물러 있을 필요도 없지만 무의미한 포용도 불가하다 타종교 타이론에는 (노자의 사상, 서야의 가이아 이론등) 창조론이 분명하지않아서 공동참여가 어렵다
(2) 기독교의 환경보존 방안
성경에서 가르치는 자연보호 사상을 숙지하고 실천해야 한다
1).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으로의 변화
상기한 바대로 생태계위기의 중요한 원인은 세계관적 요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자연파괴의 배경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놓여있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인한 생태계 위기현상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의 해결책을 던진다. 타락이전의 창조질서에서는 원래 이러한 세계관이 있었지만 인간의 범죄로 그것이 인간에게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간과 만물을 피조물로 하여 양자간에 엄격한 구분을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물론 인간과 자연세계의 자기정체성과 바른 위치, 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이 자연을 다 장악하여 착취하지 않고 청지기로 수종들고, 또 자연도 피조성과 개발 및 능력에서 유한성을 지닌다는 것을 환경문제 해결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2). 그릇된 왕직수행에서 바른 청지기적 역할로의 변모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신분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대신, 하나님을 젖혀두고 자기가 우주 전체를 장악하며 군림하는 폭군의 신분으로 상승시키고자 했고 또 실제로 그런 역할을 했다. 인간은 인류의 발전과 문명화를 위해 자연을 수탈적으로 이용하고 정복했으며 그것의 생존권과 창조질서의 성격을 인정치 아니했다. 지구와 생태환경은 인간의 유익과 창조질서의 보존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구현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돌보고 가꾸도록 위탁하신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것에서 기독교적 생태의식이 출발하게 된다. 인간은 이제 그릇된 왕직수행을 버리고 바른 청지기역할을 할 변모를 하여 자연을 다스리고 가꾸며 우리 인간과 생명의 같은 연대성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고 사랑하며 돌봐야한다.
3). 욕망충족 절대주의에서 창조질서 속에서의 원만한 삶으로의 변화
인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면서 세상에는 많은 불의와 죄인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대개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도 개인적, 집단적으로 이기적 탐욕에 사로잡혀서 서로를 착취하고 또 서로가 세계를 착취하게 되었다. 인류는 국가적, 사회적으로는 성장지상주의의 도그마에 빠져있고 개인적, 집단적으로는 죄로 인해 부풀어진 각종 욕망을 채우는 삶의 방식에 젖어있다. 오늘날의 환경오염은 인간의 무한정한 욕망에 따른 자연의 예속적 위치가 그 근본원인인 것이다. 그 욕망을 채우고 성장을 이루기 위해 또는 '문명의 발전'을 위해 자연계를 수단으로 그것을 약탈하고 착취해왔던 것이다. 각국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정부의 산업화정책을 통해 펼쳐지고, 개인이나 기업들의 무절제한 이익추구와 결부되어 환경파괴를 낳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욕망충족지향의 논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욕망의 절제를 통해 자연과의 조화관계 속에 있고 또 창조질서를 존중하고 지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삶으로의 변화를 이룰 때 환경오염이 이렇게 인간의 생존을 위기까지 이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삶은 하나님과는 물론이요, 이웃과 자연물과도 '더불어 사는 삶'이 될 것이다.
4). 인간 삶의 가치와 목적에 대한 성경적 정립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어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을 지녔는가를 바로 파악할 때 인간은 자연파괴를 통한 욕망성취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생태계파괴가 감소 내지 최소화될 것이다. 기독교인의 생태의식은 인간의 지상적 삶이 지니는 의미를 바로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자연개발이니 문명의 발달이니하는 주장에 절대성이 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지상적 실존의 영구한 것이 아니라 순례적 삶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에 놓인다. 그리고 인간 삶의 목적이 지상개발과 자기 영화에 있지 않다는 것에 무지한 것도 한 이유이다. 성경은 인간이 지상에서 나그네로 산다는 것과 또 그 존재의미는 다른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영광이라고 한다. 인간과 그의 삶에 의미와 궁극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가치와 목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자연계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보다 어쩌면 자연보존에 더 중요한 배경이론이 될 지 모른다.
5). 생명적 생명관의 확립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한 것은 그것의 무죄상태, 그것이 지닌 조화와 질서, 미와 평화 등의 이유 때문이라 하겠지만 피조물들이 생명을 지녔다는 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온 피조계는 이런 생명체들간의 연결고리들로 이어져 있다. 이렇게 생명기원의 신성과 생명체간의 유대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생명이 매우 소중하다는 점과 한 생물의 생명파괴는 다른 생물의 생명파괴나 손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과는 차마 비교할 수 없지만 동식물의 생명도 그저 없애버려도 될 정도로 하찮은 것이 아니며, 또 생태계의 파괴는 그것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생명까지도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분되는 창조의 면류관이지만 그 생명도 다른 자연물의 생명에 의존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여하신 생명을 축복하시고 소중하게 여기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생명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피에 관하여 여러 가지 금령(禁令)을 내리신 것은 그것이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식의 제도를 두신 것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6). 성경적인 기술이해의 정립
기술에 대한 이해는 생태계 보존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기술이 없이 현대 문명과 역사는 굴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수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치 요술상자로 보였던 기술은 현금에 와서는 지킬과 하이드처럼 두 얼굴을 지니게 되었다. 환경문제에 대해 우리가 이러한 논의를 하게 된 것도 기술의 두 얼굴 가운데 선(bonum)의 쪽보다는 악(malum)의 쪽이 더 크고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래로 인간은 기술의 선한 면을 보고 그것에 대한 인간적인 긍정(menschliches Ja)을 했다. 이러한 단순한 긍정은 기술과 그것의 발달만이 인류의 삶을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것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술이 테크닉에서 테크놀로지로 발전되면서 악한 측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가 성경적 입장에서 이런 점들을 조명해 볼 때 우선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대로 기술의 기원은 아벨과 셋계열의 종교적 행위와 대립, 대조적으로 가인의 후손들에게서 먼저 보여진다. 이것은 셋계열이 구원의 특별은총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가인계열은 일반은총으로 일반문화를 개발하는데 주력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성경이 기술의 기원을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기보다 부정적인 기원을 얘기하지만 그것이 기술 자체를 전면 부정하고 죄악시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 자체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인간이 만든 일반은총의 선물이다.
오늘날 테크놀로지는 인간에 의해 타율적 지배를 안 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하여 어떤 자율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의식과 윤리성을 지니지 않은 기계와 물적 존재에 불과하다. 성경적 관점은 문제가 기술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에게 있다고 본다. 또 기술은 늘 인간의 통제하에 있는 정도까지만 개발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라도 사용하기에 따라서 반인간적 결과나 생태계파괴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기술도 아예 개발이 금지되는 것이 유익하다. 왜냐하면 죄성을 지닌 인간이 늘 기술을 선의 측면만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현금에 이르러서는 생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기술문명을 전적으로 포기할 수 없고 또 어쨌던 원시적 자연에로의 회귀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기술전능주의 앞에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성경적 기술관은 기술전능주의와 기술 숭배사상에 대한 비판에 머문다.
** 기독교 생태윤리학과 행동을 위한 주요한 지침.
1). 하나님을 창조주, 영, 구속주로 생각하는 기독교 신 이해는 창조와 그 만물이 하나님에게 사랑스럽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나님의 가치평가는 인간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 중심적이고, 생명체 중심적이다. 모든 생명체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적절한 관심과 보살핌의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2). 기독교 신앙은 자연을 비신격화시키지만 그것을 신성한 것으로 본다. 자연만물에는 신적인 요소가 없다. 따라서 자연 안에는 경배의 대상이 없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과 사물은 신성한 주체로 대우받아야 하며, 그것들은 신성한 대상으로 취급되어야 하며, 필요한 경우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사용해야 하며, 그렇지않으면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놓아두어야 한다.
3). 기독교 신앙은 생태학적 관련성을 확증한다. 모든 만물은 합리적으로나 도덕적인 면에서 볼 때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두 친족관계에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며, 자연과 상호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일부분으로 존재한다. 즉 우리는 자연만물과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의식하면서 그들을 대하고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다.
4). 인간은 자신의 필요와 문화발전을 위한 자원으로서 자연의 산물을 사용할 자연스러운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함께 발전하는 친족으로 존중하는 가운데 그 자원을 아끼고 공정하게 다루며, 신중하게 사용할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
5). 우리의 경험에서 자연만물이 잠정적으로 선한 것이지만, 희망 가운데서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멸시되거나 거부되어서는 안 되며, 그들에게 정도 이상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6). 기독교 신앙은 궁극적인 신비, 자연의 한계, 생물학적인 관련성에 비추어 인간은 겸손할 것을 가르친다.
7). 인간의 통치권은 자연의 착취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착취를 심판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차원에서 볼 때, 통치권은
인간과 자연만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의가 포함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책임있는 대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8).인간이 생태계와의 계약을 파기한 데 따른 생태계 혼란을 보면서, 그 인과관계를 의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공동체가 생태계에 대하여 저지른 죄를 회개하도록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하여 생태계에 심판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9). 생태학적 책임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사역을 대표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의 표징이 되도록 부름받았다.
10).기독교 신앙은 생태학적 덕목- 감내력, 적응성, 관계성, 검약성, 공평성, 연대성, 생물 다양성, 충족성, 겸손-을 뒷받침 할 기반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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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론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고찰에서 얻은 결론은 구속받은 신자는 물론 모든 인간은 타락과 범죄로 인해 빚어진 이 생태계 위기현상앞에 인류의 행위와 역사의 방향을 두고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여 창조질서 회복과 보존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땅을 잘 개발하고 보존하는 데 실패하여 청지기직을 바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죄인 것이다. 그 죄는 후대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죄일 뿐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게 대한, 하나님을 향한 죄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그의 문화명령을 바로 받들어서 주님의 재림시까지 자연을 잘 보존하고 가꾸는 것은 먼저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책임 수행(종교적)이요, 다음으로는 미래의 이수, 즉 후손들에게 대한 바른 책임수행(윤리적)이요, 그리고 자연에 대한 바른 책임회복(문화적)이다. 생태계 회복 내지 보존운동은 종교적, 윤리적, 문화적 행위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 행위의 전체는 아니고 한 부분이지만 말이다.
환경문제를 두고 성경은 오늘의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세계관을 교정하여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하며, 그릇된 왕직 수행으로 자연에 폭군 노릇을 하지 말고 바른 청지기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절대화하는 삶에서 창조질서에 따른 원만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인간 실존과 삶의 의미와 가치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깨닫도록 요구하며, 성경적 생명관과 기술관을 정립할 것을 요구하며, 그리고 지상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삶에서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삶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성경적 관점은 오늘날의 기술중심적 문화를 비판하고 또 그릇된 생태신학과 윤리학과 비판한다. 그밖에 우리가 이런 논의에서 깨닫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인류문명의 발전을 절대화할 이유도, 필요도 없고 또 그것은 현재와 같은 물질주의 방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학기술의 전능성은 허위이며, 그것이 주는 선 외에 그것에서 비롯되는 해악도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유한한 가능성과 그것의 반발로 인해, 또 인간성의 죄성으로 인해 지상 유토피아는 올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노력의 저편에서 하나님에 의해 역사피안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들은 지적, 도덕적 쇄신과 함께 영적, 정신적 갱신이 일어나야 한다.
앞서 언급하였거니와 환경문제에 대한 실천은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여기에 교육의 중요성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성격적 이해를 바탕으로 구체적 실천이 있을 때 그 실천은 보다 치열하고 지속적이고 근본적이 될 것이다.
환경문제는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고 외치는 소리에 덩달아 호응하여 쓰레기를 줍고 합성세제를 덜 사용하는 등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이해에 대한 문제요 인간이해에 대한 근본적 신념을 성경적으로 가지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심리학자 프롬(Erich Fromm)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한대로 현대인은 끝없는 욕망(endless desire)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 끝없는 소비 속에서 쾌락을 느끼고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끝없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환경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 성경의 대안이 있다.그것은 바로 고난과 절제의 삶이다. 고난과 절제는 죄인인 인간이 가장 싫어하고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다(갈5:22-23) 이러한 귀중한 성품이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다. 열매의 배열과 순서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절제'의 열매가 마지막에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절제는 성령의 마지막 열매요 최고의 열매다. 오늘 현대는 소유지향적 세계로 치닫고 있다. 누가 이것을 멈출 수 있는가? 성령충만한 믿음으로, 절제의 영성으로 끝없는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그러므로 환경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요 영성의 문제이다.
환경보존 노력은 단순한 환경보호운동이 아니라 창조질서 보전운동이다 우리 교회가 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단순한 환경보호운동이 아니라 창조질서를 보전하려는 신앙운동이 되어야 한다. 물론 외적으로 보면 비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으나 내적으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하였듯이 환경오염은 인간의 죄에 근거하기 때문에 오염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의문제일 수밖에 없다. 교회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관리자'로 부름받은 청지기로서의 위임받은 환경을 잘 보호관리하지 못하였음을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태계위기'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있는 이때 이에 대한 신앙고백을 바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ⅤII.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찬성과 반대
1. 4대강 살리기 사업이란?
나날이 심각해지는 물 부족, 만성적 홍수와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하천을 건강한 문화생태공간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으로 2011년부터 순차적으로 마무리될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생태복원과 더불어 국민 삶의 질 향상,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한 다목적 녹색뉴딜사업이다. 또는 사강나래라고도 하는데 이 뜻은 4대강의 힘찬 생명력으로 대한민국의 비상을 꿈꾼다는 의미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취지를 국민들에게 바르게 알리고 사업에 대한 신선하고 친근한 애칭을 붙여주기 위한 취지에 잘 부합된다고 하며 앞으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의 각종 홍보에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2009년11월10일 4대강 살리기 사업의 핵심인 보(洑) 건설 착공식이 낙동강의 합천보, 달성보, 구미보, 영산강의 승촌보 등 4곳에서 일제히 시작됐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4대강 사업의 찬성과 반대 여론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특히 사업의 예산안 심사에 들어간 지금, 더욱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4대강 사업의 찬성과 반대 의견을 요약해 보자면, 찬성의견으로는 '수해예방을 위한 근본 대책, 물 수급 여건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수자원 추가 확보 필요하며, 일자리 창출과 경제효과 기대되며, 강 주변 문화시설 만들어지며, 지역경제 발전시킨다.‘ 등으로 볼 수 있으며, 반대의견으로는 '생태계와 자연환경, 수질 등에 악영향 미치며, 환경영향평가 조사를 졸속으로 했다, 대형 건설사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 보를 설치한다고 수질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지천에 대한 수질관리 부실하다, 지방재정 나빠질 수도 있다, 수공이 부실해 질수도 있다' 등으로 요약 할 수 있겠다. 본고에서는 찬성과 반대의견을 여러 매체에서 하나하나 파악해보았고, 성공적인 4대강 사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과제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조사해 보았다.
2.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추진배경과 진행현황
(1) 추진배경
인류의 4대 문명이 강에서 발생했듯이, 강은 문명의 젖줄이며 국가 발전의 동맥으로서 강의 관리는 국가 경영의 기본이다.
해외 각국에서는 일찍이 강을 중심으로 지역개발사업을 펼쳐 경제를 부흥 시키고 국민 삶의 질 향상시켜왔다.
∙ 미국은 테네시강 개발사업(TVA)으로 대공황 극복 및 경제 재건하였으며,
∙ 인도는 다모다르강 유역개발사업(DVA)으로 국가 신성장 동력 확보하였고,
∙ 독일은 하벨강 복원프로젝트를 통해 자연 상태에 가깝게 강 복원 추진하였다.
◦ 제1차 국토계획(’72~’81년)에서 4대강 유역 개발을 추진하여 치수와 이수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나 급격한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수질오염, 기후변화로 인한 집중호우와 물 부족 등 일부 문제 발생하였다. 기후변화 등으로 홍수 및 가뭄 피해 빈발에 따라 근원적인 대책 마련 필요하게 되어, 4대강 사업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 물 부족국가 인 우리나라에 2011년 8억m³, 2016년 10억m³의 물 부족이 예상되나 다목적댐 건설 반대가 심하여 근본대책 마련하기 위함이다.
※ 4대강 주요 지점의 하천유지용수 부족을 고려하면 2016년 17억m³ 이상의
물 확보 필요하다.
제방 · 준설 · 저류 · 하천활용 등 종합적 정비로 홍수 · 가뭄 등 물 문제의 근원적 해결
◦ 주기적인 가뭄발생으로 지역적 물부족 심화 및 하천의 건천화 발생
- 2001년 가뭄시 제한급수(86개 시군, 30만명), 농업용수 부족(50개 시군)
- 2008년~2009년 제한 및 운반급수(48개 시군, 7만 세대)
◦ 홍수피해 급증 및 사전예방투자 부족으로 수해복구에 과다한 비용 발생
∙연간 홍수피해액 1970년대 0.17조원 → 최근 2.7조원(’02~’06년)
∙연간 홍수예방투자 1.1조원, 복구비 4.2조원
◦ COD와 부영양화를 초래하는 TP 등의 오염도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으로 오염원 집중관리 필요
습지 · 친수 공원 조성 등 하천환경을 정비하고 상 하류를 연결하는 자전거 길을 설치
국민소득 증대로 수상레저․문화 활동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나, 이를 충족시킬 다양한 공간 및 프로그램 부족하다.
∙일본은 3만불(유럽은 2만불) 시대에 요트 등 수상레저 활성화 하였음.
침체된 실물경기의 회복을 위해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를 통한 일자리 창출 및 내수 진작 등 필요
◦그 동안 계획들 간 연계성 부족으로 사업시행 효과 미흡하였음. 침체된 실물 경기의 회복을 위해 4대강 살리기를 통한 일자리 창출 및 지역경제 활성화 등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범정부차원에서 강별 종합계획을 수립, 단기간에 예산을 집중 투입함으로써 물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강(江) 중심으로 국토를 재창조하는 종합 프로젝트(package project) 이다.
「국토해양부(http://www.4rivers.go.kr/), 4대강마스터플랜 pdf자료」 ,http://www.mltm.go.kr/ebook/4river_masterplan/EBook.htm, 중 발췌
(2). 추진현황
첫째, 향후 물 부족과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 보(洑) 설치, 농업용 저수지 증고, 중소규모 댐 건설 등을 통해 13억㎥의 용수를 확보.
둘째, 기후변화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하는 홍수에 선제적으로 대응. 200년 빈도 이상의 홍수에 대비하고 퇴적토 준설, 노후제방 보강, 댐 건설 등을 통해 9.2억㎥의 홍수조절용량을 확보 .
셋째, 하천의 수질을 개선하고 생태를 회복. 하수처리시설 확충과 녹조저감시설 설치 등으로 2012년까지 본류수질을 평균 2급수 수준으로 개선하고, 생태하천 및 습지조성, 농경지 정리 등을 통해 생태를 복원.
넷째, 하천은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다기능 복합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생태공원, 산책로·체육시설 등을 확대 설치하고 총 1,206km에 이르는 자전거 길 을 조성.
다섯째, 강 살리기로 확보되는 인프라와 수변공간을 활용하여, 관계부처가 다양한 연계사업을 추진함으로 해서 지역경제 발전과 지역문화 창조에 기여
이상 5가지 핵심과제는 본 사업과 직접연계사업 그리고 연계사업으로 구분하여 추진할 계획. 본 사업은 물 확보·홍수조절·수질개선 등을 위해 4대강 본류에 시행하는 사업으로 국토해양부와 환경부, 농수산식품부가 담당.
여섯째, ’11년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 완료(댐․저수지 등은 ’12년 완료)
3. 반대의견
1) 강물을 보에 가둬놓으면 생태계와 자연환경, 수질 등에 악영향을 미친다.
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는 시설을 없애는 게 강 살리기의 기본인데 강을 막아 어떻게 수질을 개선시킬 수 있겠는가? 강의 유속이 보 설치 이전보다 10배 이상 느려지고 각각의 보에 물이 11∼39일 머물면서 녹조류 성장을 촉진해 수질 악화가 불가피하다. 또한 '물그릇'을 키우기 위해 강바닥에서 5억7000만㎥의 막대한 토사를 긁어내는 것 자체가 하천의 수생태계에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대규모 토목사업이 단기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다면 하천 생태계의 큰 그림이 바뀔 수도 있다.
2) 둑을 쌓고 댐을 만든다고 물이 맑아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10여개의 댐이 건설될 예정인 낙동강 안동시~낙동강하구언 구간의 경우 유속이 초당 2㎝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이 경우 안동에서 바다까지 20일이면 흘러가던 물이 200일 정도 머물게 돼 수질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3) 환경영향평가 조사를 졸속으로 했다.
많은 환경문제 전문가들이 4대강 사업에 대한 환경영향평가의 부실함을 지적하고 나섰다. 장장 634km에 이르는 방대한 수계에 미칠 영향의 평가를 불과 네댓 달 만에 모두 끝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부실함이 느껴진다. 아무리 그 동안 축적된 자료를 활용했다 해도 너무 빠른 평가이기 때문이다. 평가를 제대로 하려면 이모저모 따져 계획을 세우는 데만도 몇 달이 걸릴 것이다. 부실한 환경영향평가를 토대로 한 토목사업은 하천의 생태계를 파괴시킴은 물론, 4대강을 터전삼아 살아온 수많은 국민들의 삶을 앗아갈 수도 있다.
4) 본류관리 훌륭하지만 지천 수질관리 허술하다.
본류에 대한 관리는 훌륭하다. 하지만 문제는 지천에 대한 수질관리가 허술하다. 지천이나 샛강 관리가 안 되면 아무리 본류를 잘 관리한다 해도 헛수고다. 또 지천 살리기와 하천의 모래밭을 살리는 것이 하천을 살리는 길이다.
5) 4대강 사업이 대형 건설사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
4대강 사업이 대형 건설사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4대강 사업 공사 입찰에서 대형 건설사들이 공구 나눠먹기 담합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6) 4대강 사업으로 시·군 재정을 거덜 낼 수도 있다.
정부가 4대강 사업으로 발생하는 준설토 처리를 지방자치단체에 떠넘겨 큰 반발을 사고 있다. 게다가 오염된 준설토에서 나오는 침출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도 마련해 놓지 않았다고 한다. 재정 여력이 열악한 자치단체에 적치장 설치비 250억~300억원은 엄청난 부담이다. 연간 예산의 10~15%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향후 골재 판매의 수익성은 불투명하다. 준설토를 적치장에 오랫동안 쌓아둘 경우 침출수로 인한 하천이나 인근 농경지의 오염도 문제다.
7) 수공, 4대강 참여로 수도요금 올릴 수도 있다.
수자원공사의 4대강 사업 참여시 공사 재무전망(2009년~2014년)에 따르면 2013년 이후부터는 금융비용이 매년 4천억원 가량 발생할 것으로 전망돼 4대강 주변지역 개발에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고 정부의 재정지출 증가가 예상된다. 또한 수도 등 공사의 기존 사업들의 사용자에 징수하는 요금에 비용이 전가될 가능성이 있다.
4. 찬성의견
1) 4대간 사업 반대자들 중에는 정치적 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이 많다
정치계나 공직자들 중 일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환경문제도 아니고 기술적인 문제도 아니며 오직 정치이념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세계 각국이 물부족을 대비하고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강을 개발하고 물을 저장하려고 하며 중국조차 운하를 만들려고 하는데 오직 우리나라 일부사람들은 정부시책, 구체적으로 말해 이명박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정부가 하는 일이 무조건 싫은 것이다 특히 4대강 사업은 국가를 위해 주민들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임은 저들 양심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다음 대선에서 4대강 사업이 서울 청계천사업같이 지금 집권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까 극히 염려스러운 것이다 청계천 사업 때도 지금 4대강 반대자들은 극열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완공후 서울시 공기는 아주 좋아졌고 여러종류 물고기가 다시 올라오고 있으며 유엔에서조차 환경 개선에 성공한 사례로 보고하고 있으니 그들은 불안한 것이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공정하게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극렬하게 반대할 명분이 없다 오죽하면 야당출신 전남지사도 누가 뭐래도 4대강 사업은 국민을 위해 반드시 해야한다고 주장하였겠는가? 4대강사업반대자들이 법원에 고소한 집행정지가처분 신청은 모두 법원에서 패소하였다 보에 올라가 반대 시위하던 이른바 환경론자들은 명분 없이 시위를 하였다 왜냐 하면 과거에 그들이 요구하던 환경 개선작업을 4대강 사업에서 거의 다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4대강 사업에 대해 극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닌 정치적이념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4대강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어도 그들은 계속 반대운동을 펼칠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은 수질검사를 한다고 외국 서적을 뒤적이면서 계속 강변을 맴돌고 있을것이다
2) 수해예방을 위한 근본 대책으로 필요하다.
우리나라 연간 수해 피해규모는 2.0조원으로, 피해 복구비가 예방 사업비보다 4배에 이르는 사후복구에 치중한 결과 피해규모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홍수피해에 대한 국제비교 분석결과 단위 인구 당 인명피해는 일본의 5배, GDP 대비 재산피해는 일본의 14배에 이르는 수준으로 수해예방을 위한 근본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따라서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른 집중 투자로 수해 방지는 물론이고 4대강을 중심으로 국토를 재창조 하여 후진국 형 물 관리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3) 물 수급 여건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수자원 추가 확보를 위한 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물 부족은 만성적인 현상이다. 더욱이 용수부족은 점차 심해져 2016년에는 약 10억톤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수자원 추가 확보를 위한 조치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4) 잃어버린 강의 기능 되살려야 한다.
첫 번째 기능은 치수다. 폭우가 내려도 범람하지 않고 하류로 흘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4대강은 토사 퇴적으로 인해 오랜 기간 치수 기능이 크게 약화돼 왔다. 두 번째는 맑고 깨끗한 물을 공급해 주는 이수 기능이다. 생활용수·농업용수·산업용수 등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을 항상 풍부하게 공급해 줘야 강은 제 기능을 다한다. 그러나 4대강은 여름 한철 물이 흐르고 나머지 기간은 물이 부족해 이수 기능이 크게 떨어진다. 사용한 물을 맑게 처리해 강에 버리면 희석과 자정을 통해 자연의 물로 되살리는 배수 기능이다. 그러나 지금 4대강은 생활하수·농경배수·산업폐수 등으로 시궁창이 돼가고 있다. 네 번째는 강물과 수변에 건강하고 풍부한 생물종이 살아가는 생태 기능이다. 이는 깨끗한 수질과 풍부한 수량, 그리고 잘 보존된 수변 공간이 유지될 때 가능하다. 그러나 4대강에서 건강한 생태기능을 찾아보기 어렵다.
5) 환경단체는 보를 막으면 수질이 나빠진다고 주장하지만 해외 사례를 보면 수질이 개선, 생태계가 살아나는 등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환경단체는 보를 막으면 수질이 나빠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뉴브강은 댐 건설 이후 수질이 개선됐고 수량이 풍부해지고 지천의 수위가 올라가 생태계가 살아나고 숲이 우거져 자연보전지역도 설정하게 됐으며 재생에너지도 확보하고 홍수도 방지하는 등 많은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6) 일자리 창출과 경제효과 기대된다.
3년 동안 모두 22조원이 투입되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통해 34만개의 일자리 창출과 40조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기대된다.
7) 4대강 주변지역을 관광레저단지로 조성해 지역경제를 발전시킨다.
4대강 주변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주변지역을 관광레저단지로 조성해 지역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 한강의 경우 삼국 문화권을, 낙동강의 경우 가야문화권을, 금강은 백제문화권을, 영산강의 경우 마한 문화권을 테마로 한 관광단지가 조성될 수 있다.
8) 각종 문화공간이 개발되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시행하면 강 주변에는 역사문화자원이 새롭게 정비돼 테마공원, 복합레포츠단지, 예술 공간, 관광숙박시설 등이 대거 들어서고 각 지역문화 특성에 걸맞은 체험관광과 숙박시설이 대거 개발되고 4대강을 자전거로 종단하는 스포츠 관광 상품도 개발될 것으로 보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9) 사업에 참여하는 업체들에게는 새로운 기술개발, 경험 축적으로 도약대 역할 할 것
4대강 사업은 사업에 참여하는 건설사 등 업체들에게도 도약대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된다. 우선 건설사들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이번 4대강 살리기 사업에서 새로운 경험을 통해 국제 건설시장을 포괄할 기술개발과 경험 축적에 나설 예정이다. 그리고 이번 4대강 사업에서 축적된 기술과 경험을 토대로 전 세계 물 관리 건설 시장의 진출도 더욱 용이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수문식 승강구조로만 이루어졌던 기존 댐의 수문 방식은 전도식 등 다양한 기법이 선보일 예정이며, 보 중심부에 형성될 수변 공간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새로운 형태의 공간으로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
5.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올바른 판단
(1) 환경론의 입장에서
1) 자연은 자연을 가장 잘알므로 강이나 산을 그냥 내버려주어야 한다는 극단적 생태주의자들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다 사람은 자연을 잘 관리하고 보호해야한다 그냥 방치하면 인간에게 큰 피해를 가져온다 산림녹화에 힘쓰고 강에 댐들을 많이 건설한 남한은 수해예방에 많은 효과를 보았다 그렇지 못한 북한은 홍수 때 큰 피해를 당하고 있지 않은가?
2) 환경보존 문제는 정치적 이념을 떠나야 한다 그래야 순수성이 보전되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수 있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순수한 동기로 일을 추진해야 한다. 자원확보와 환경보호, 친환경경제정책은 세계 여러나라가 시급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이니 이념에 사로잡혀 추진을 방해한다면 국가,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3) 지나친 이상주의에 사로잡히면 정책 수행에 에 많은 어려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이론은 완전한 것이 없다 반론 없는 이론도 없고 완전한 정책도 가질수 없다 이런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중지를 모아 최선의 대책을 도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실 4대강 사업도 공사 후에 정확하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100%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상당 추진되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완공후에 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대책을 마련하고 사업을 완공해야 할것이다
상) 기독교인은 이시대에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된 항상 성경에 근거하여 행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환경문제는 이론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니 일샹생활에서 환경보존을 실천하는 노력을 경주하여 타인에 모범이 되어야한다
(2) 사업을 시행함에서 다음 사항을 고려하여 시행해야 할것이다
-이미 4대강 사업은 60-70%를 완공하였다 이제는 올바르고 잘되게 추진해야하는 실정이다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바람직한 성공을 위해 다음 사항을 고려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1) 국민의 지지가 필수인 만큼 정부와 국민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2) 친환경적 하천정비체계 구축해야 한다.
3) 사업 특성상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4) 4대강 공사진행 과정에서 우려들을 말끔히 해소시킬 수 있는 성과를 실증해야 한다.
5) 국내외 전문가들의 객관적이고 건강한 지적은 경청해야 한다.
6) 공사 중 수질 악화를 막아야 한다.
7) 지역 특성을 살리는 하천정비가 돼야 한다.
8) 강마다 따로 모니터링 본부를 두고 맞춤식으로 관리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9) 수리수문학적 변화와 수생태계 변화에 대한 예측및 대안을 마련할 연구사업이 필요하다.
10) 건설사들의 담합을 없애고 깨끗하고 투명한 사업으로
결 론
우리는 피조물의 신음을 종교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전문가들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 전체의 문제이다. 수천년의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환경오염에 비해 지난 200여년 동안 일어난 환경오염이 훨씬 크며 또한 오염의 속도는 지금도 가속적으로 빨라지고있다. 이러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국경이 없다.
환경문제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며, 국제정치의 주제가 되었고 지구적 관심이 되었다. 환경 문제는 복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 즉, 인간이 지구 위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물리학자인 C.F. 바이첵카는 「시간이 촉박하다」에서 "환경문제는 조용한 시한폭탄이다. 인류는 자살하려는가"라고 외쳤다. 환경문제가 심각한 것은 그것이 급하고 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몰트만(J irgen Moltmann)의 말대로 "환경의 위기는 현대세계가 가지고 있는 모든 체계의 위기"가 되었다. 새삼 재론할 필요도 없이 환경문제는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믿는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성경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창세이래로 이 피조세계는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아왔다 현대 물질문명 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노력해 왔다 그리하여 자연에 가한 대규모의 파괘가 곧 인간의 승리인것처럼 인식하여 왔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괘하는 행위는 인간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재난으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싸워서 이기는 행위를 부요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기려왔다 그러나 편익과 부여를 무분별하게 추구한 결과 자연은 급속도로 파괘되었다 권숙표 ( 환경전문가)에 의하면 GNP 5천불에서 1만불시대로 가려면 자연생태게가 3-5배 파손되어야 한다 우리의 소비와 낭비의 풍요로운 생활은 자연생태계의 파괘와 황폐와 비례한다
인간은 결코 자연을 거슬러 싸워서 이길수 없다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자연을 지키며 가꾸며 살아야 한다 성경에는 에덴 동산을 가꾸고 지키도록 사람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2:15)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다 성경의 원어에도 만민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막16:15 롬8:21 골1:23)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이땅을 가꾸며 살아야 한다 생태계를 보전하는 노력은 이제 온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지도 모를 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절박한 문제이다 자연에 대해 교회가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자연에 대한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교회는 인간을 구원하시며 동시에 자연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 사역은 인간 구원뿐만 아니라 자연의 구원에도 관심을 갖고 수행되어야 한다 파국을 치닫는 생태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저 절망하고 포기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구원은 항상 절망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지는 절망속에 희망이란 사실을 다시한번 명심하자 우리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새창조에 대한 신앙을 확고하게 갖고 생명과 생태계 보전이라는 소중함을 알고 절박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환경 문제는 인간이 지금까지 겪어온 여느 문제와 다르다. 인류와 지구 자체의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생태학자들은 이 중차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거기서 자족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론적 접근이 갖는 문제나 한계를 늘 되돌아 보고 다른 사유 체계에서 오는 문제 제기나 기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생태학은 학문 중의 학문으로 군림해온 근대 물리학의 오류에 다시 빠질 수도 있다.
환경문제는 기독교세계관의 핵심 분야인 창조교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 또한 환경보호는 피조세계를 잘 다스리고 가꾸라는 문화명령의 일부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피조세계와 관련된 문화명령은 특히 기독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자연을 잘 다스리고 가꾸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창2:15)에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일 뿐 아니라 이웃사랑의 표현이다. 환경이 파괴될 때 일차적인 피해자는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이므로 잘 보존된 환경은 이웃 사랑의 기초가 된다.
** Please Let me hear soon ! God
나는 너희에게 날마다 밝은 빛을 비추어 내마음을 알려주나
너는 깨닫지 못하는구나
미풍과 산들바람을 불게하여 내 다정한 음성을 듣기를 바라지만
너희는 모른척하는구나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려주어 천국의 음악을 들려주건만
너희는 귀를 귀울이지 않는구나
때로는 큰빗방울과 천둥을 내려 너희관심을 끌려고하지만
너희는 무감각하구나
저녁때 고운 석양과 밤의 별들로 윙크하게 하였으나
너희는 관심이 없구나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너를 비추이듯 너를 보호해 주건만
너희는 아무 감사도 모르는구나
너희가 피곤에 지쳐 밤에 잠을 자고나면 새 날을 주고 나를 따르기를 바라나
너희는 너의 욕심대로만 살려고 하는구나
나는 너희에게 외아들까지 주어 너희생명을 구하고 나의 축복을 받으라고 했으나
사람들은 너무 내 사랑을 몰라주는구나
나는 너희의 목자가 되어서 너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목자가 되려하나
너희는 나를 목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네 생각대로 네 욕심대로 네 길을 가는구나
부록 1. 현대 생태신학자들
(1) Dieter. T. Hessel : 생태 正義를 강조함, 사회적 목회 주장 <기독교와 생태학 > <사회적 목회>
(2) Douglas J. Hall :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의 자연에ㅡ 대한 청지기 강조
< The Steward >
(3) Sallie McFague : 생태여성신학을 주장함 "세계는 하나님의 몸이다 "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을 주장함 < The Body Of God >
맥페이그 교수는 60대 후반의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부 교수이다.
맥페이그는 신학함에 있어서 그 중심축이 우주 및 생명에 놓여져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맥페이그는 하나님과 세계(우주)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표현해낼 수 있는 상징과 이미지 또는은유를 책임있게 재생산하고자 한다.언어의 한계를 세계관의 한계로 이해했던 그녀는 하나님을 아버지, 곧 가부장적 형태로 고백하고 언표해온 서구 기독교 도그마 속에서 지배적이며 정복적인 삶의 방식을 통찰하고 있다.따라서 맥페이그는 여성 경험에 기초한 신에 대한 새로운 은유들, 예컨대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은유를 통해 생명 중심적, 창조 중심적 신학을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다.하나님을 어머니로서 재 신화하는 경우 전 우주 및 이 세계는 종래와 같은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몸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어머니에게 있어 자식은 아버지에게보다 훨씬 더 분신으로 여겨진다. 어머니와 자식은 더 이상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다시 말해어머니 은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말할 때 종래처럼 우주 및 자연에 대해 외적으로 관계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창조주)를 말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한 몸으로 포괄하는 유기적 전체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우주 없이, 우주는 하나님 없이 생각할 수 있는 상황 속에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신학의 으뜸 과제란 생태학적, 우주적 감수성에 적합한 새로운 언어로서 자기발전적으로 계발시켜 나가려고 하는, 특히 여성 경험에 일차적으로 강조점을 두었던 그의 해석학적원리 속에서 찾아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4) Bernard W. Anderson, : 인간의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자연에 대한 통치권을 강조함
인간은 자연을 정성껏 돌보아야한다 창조론은 구속사사건 틀에서 전재하지만 자연에 대핸 수탈은 잘못된 것임을 강조함 < Creation Verusu Chaos >
(5) Rosemary R. Reuther : 생태여성 신학 제장 행동하는 생태신학자 < Gaia and God >
< The Radical Kingdom >
로즈마리 류터는 가톨릭 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여성 생태학자로서 시카고지역 에반스톤에
위치한 게렛 감리교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류터는 가톨릭신학자답게 자신의 전통을 중시하고 재해석을 통해 여성생태학적 모티브를 찾고자 한다.1992년 출간된 그의 책 ‘가이아와 하나님’(Gaia and God: An Ecofeminist theology of EarthHealing)은 러브록과 마굴리스에 의해 사용된 가이아이론, 곧 전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고,그 속의 모든 개체들에게 고유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지구라는 유기체가 존속된다. 이 이론 속에서는 인간중심주의를 말해온 기독교 특유의 입장이 자리할 수 없게 된다. 인간 역시 다른 생명체와공존하는 자신의 제한적 역할을 감당하는 지구생명체의 일부라고 보기 때문이다.
류터는 생태학적 여성의 빛에서 기독교 전통을새롭게 조망하기 시작한다. 종래의 가부장적 전통 속에서 해석의 정당성을 얻지 못했던 본문을 새롭게 읽어 보려는 것이다.
그는 지구를 구원하기 위하여, 즉 생태학적 영성과 신학을 위하여 성서내의 계약전통과 성례전
전통을 전면에 내세운다. 류터는 가부장주의 내에서 인간을 탈 중심화시키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지닌 형태로인간을 재중심화 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Fransis A. Schaeffer : "린 화이트 주장은 플라톤적 이원론에 물든 기독교에 한정된다" 이원론을 배격함 기독교인의 청지기로서의 자연에 대한 책임을 강조함
생태계 위기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올바른자연관을 수립하고 인지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이 저절로 존재하였다는 사상을 비판한다 우연한 것에는 내재적 가치가 없다 또한 환겨보존을 위해서는 인간에게 위임한 자연에 대한 사용권을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호를 위해자연에 대한 바르게 사용하는것이다. 인간은 범죄로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회복되고 바르게 사용하게 된다
그는 범신론적 해석을 반대한다 범신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리고 인간의 가치와 기타 피조물의 가치가 충돌할 때 해결한 길이 없다 또한 범신론은 인간의 특수 지위를부정하고 비인격화하기 때문이다
(7) Matthew Fox : 창조영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함, 우주적 그리스도론 제창함
급진적 생태신학을 재정립하려함
인류 생존을 위해 창조 중심의 영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첫 이유를 생태계의 위기를 제시 하였다. 현대 생태적 위기는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고양시키는 영성인 ‘창조영성’의 부재에 있다고 보았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를 ‘타락과 구속의 전통’으로 규정하면서 그리스도교 전통에 잠재해 있는 지혜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원론적이고 가부장적인 모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호의존과 상호연결을 거부하는 이분법이 깔려 있으며, 타락과 구속 패러다임이 이를 부추겼다고 지적한다.
폭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로 창조 중심의 전통, 즉 원죄보다 원복을 강조하는 창조영성의 회복을 요청하였다. 폭스는 창조영성이 타락, 구속 전통보다 훨씬 오래된 영성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조화와 아름다움이 깃들인 우주를 환대하고 우주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우리가 영광과 고통으로 얼룩진 이 세계에 영광스럽게 태어났다는 것을 신뢰하게 된다. 창조영성이 하느님을 경험하는 방식은 만유재신론이다. . 창조의 길은 우리 안에 신적 능력이 있음을 일깨우고 그것을 신뢰하라고 촉구한다. 창조의 길은 창조성과 벗하는 방법으로 명상으로서의 예술을 권하고 있다. 창조성은 비판과 방향제시를 필요로 한다
(8) 위르겐 몰트만 :(Jurgen Moltmann)
삼위일체론 적 생태신학 제장함. 하나님의 창조면류관은 인간이 아니라 안식일이다 <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생태학적 위기, 곧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의 위기로
서,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 및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그의 창조물인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에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의 후반기 신학적 실존은 창조 및 생명문제에 뿌리내리고 있다 하겠다.위기를 만들어내는, 그리하여 대체되어야만 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방식은 착취적 지배관계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몰트만은 자연의 독립을 존중하며 자연과의 상호적인 관계에 참여하는가운데 인간이 자연과 사귀는 일의 의미를 역설한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자연의 소유주나 지배자로의 위치에 있었지만 ,모두가 창조세계로서 인간 중- 12 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의 공동체 안에 자연과 더불어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안에서의 상호적 관계에 대한 이러한 강조를 신학적으로 근거지우기 위하여 몰트만은 그의 신론에근거하고 있으며, 여기서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적 사귐은 상호 관계의 긴밀한 공동체로서의 그의창조세계의 삶을 위한 모델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나님과 세계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으며 무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말한다하더라도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기독교만의 특성이라고 강조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몰트만이 내재적 본질 개념을 통해 전통적 의미의 영성 대신에 영육을통전하는 생명력 자체의 종교적 의미를 부각시킨 점을 높게 평가한다. 생명력으로서의 종교성이야말로 오늘날 생태학적 신학을 말할 수 있는 근본 모티브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9) 요릭 슈피겔 : 생태학 환경윤리에 강조. 환경윤리를 경제 윤리의 한 부분으로 판단함
< 시민 사회의 신학 >
(10) 클라우스 베스터만 (C. Westermann)
베스터만은 구속사를 신학의 핵심주제로 삼은 폰 라드의 제자이다. . 베스터만은 자연이란 인간 삶의 근거로서 그것이 없으면 구원 사건 자체도 성립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종래의 구속사 입장과는 전도된 의견인 것이다.계속해서 그는 창세기 1장 26절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해석을 종래와는 전혀 다르게 시도한다.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구원 행위만큼이나 중요하게 부각되는 축복행위의 빛에서 하나님형상을 역동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유일회적이고 반복 불가능한 특성을 지녔다면 그 분의 세계를 향한 축복행위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동적인 성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성서신학자 베스터만은 창조사건을 구속사보다 우선시킴으로서 자연의 독자성을 확보하였으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개념의 빛에서 하나님 형상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신학이자연을 자신의 주제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11) J.B. 맥다니엘 / 녹색은총의 생태론자
최근 미국내 생태신학자로서 활동하는 학자로서 맥다니엘교수를 주목할 수 있다.
남성 신학자로서 탈 가부장적 기독교의 등장과 그 성격을 규명했던 저자는 그러한 페미니스트의마음을 가지고서 자연생태계에 대한 신학적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1996년 ‘세속과 초월’(withRoots and Wings)라고 하는 출중한 책을 펴냈다. 본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생태계 위기에 대한 신학적 전망 및 평가를 근거로 종교 간의 대화 문제를 피력하고 있다.
본 책에 저자는 녹색은총의 의미를 강조하고 녹색은총의 의미를 간과해 버릴 때 적색은총, 곧 교회공동체에서 핵심으로 고백하고 있는 십자가은총이 공허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녹색은총만으로 인간 삶이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이지만 녹색은총과 적색은총이 함께 만나 상호 연결되지않으면 인류의 삶 속에 미래적 전망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녹색은총이란 인간 삶의 토대를 이루는 자연환경 전체를 지시한다. 이것은 최상의선물이며 이것 없이는 인간 삶이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자연의 변화를 매일매일 주목하지 못한다면, 예컨대 지난 일년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사라져버린 생명의 종이 무엇이며 자신의 주변 환경에 서식하고 있는 풀, 나무, 꽃들의 이름을 명명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나아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없고, 자연은 욕망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은 녹색은총을 소멸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녹색은총과 . 적색은총을 연결시켜 우주 생태계 구원을 신학,곧 기독교의 목표로 삼는 맥다니엘은 적색은총의 의미를 기독교 이후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저자에게서 생태계 구원이 종교 간의 대화문제에 있어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향후 그의 학문 활동이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부록 2 : 환경보전 운동 역사
1. 개신교 환경운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유미호,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기획실
세계 교회가 생태계 문제를 신앙적 관심과 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은 1960년대였다. 그리고 창조신앙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신학적 과제로 삼게 된 것은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WCC) 5차 총회에서였다. 1983년 밴쿠버에서 열린 제 6차 총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생명'이라는 주제 아래 '창조질서의 보전'이라는 실천적 과제가 정해졌고, 1990년에는 우리 나라 서울에서 세계교회협의회의 '정의, 평화와 창조질서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JPIC) 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94년에는 진보와 평등성이라는 지구적 가치에다 '삶의 질', 또는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접목한 '생명신학' 프로그램이 시작하기에 이르른다. 이러한 세계교회들의 움직임은 생태적 관심을 신학적 주제로 다루게 하여 기독교 환경운동을 구체화하는 실천적 배경이 되었다. 사실 1970년대 서남동 교수의 생태학적 신학론의 태동 이후 80년대 후반 들어 신학의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다양한 환경논의들은 기독교 환경운동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기독교 내의 환경운동은 1970년대에 크리스챤아카데미나 YMCA가 근대화에 따른 환경파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환경문제가 사회적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기장여신도회전국연합회 등을 시작으로 교회여성들의 관심과 실천이 서서히 싹을 틔웠다. 그리고 1982년 들어서 비록 사회단체의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환경운동을 부문운동이 아닌 전체운동으로 펼치게 될 '한국공해문제연구소'(현 기독교환경운동연대, http://www.greenchrist.org, ☎02-522-8905)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초창기 연구소는 반정부활동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공해문제를 폭로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들을 마련해갔다. '온산공해병'과 '소각장 건설의 문제점',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밝혀내고 사회문제화시킴으로써 사회 전반에 공해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 것을 대표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물론 기독교신앙을 바탕에 둔 실질적인 기독교 환경운동의 시작은 1990년대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 시기에 태백, 인천, 광주, 부산 등지에서는 기독환경단체들이 속속 조직되었으며, 운동의 주체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들 단체들은 짧지만은 아니했던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경험을 토대로 하였기에 그 운동에 힘이 있었다. 사회 속의 환경운동은 물론이고 교회 속의 신앙적 환경운동도 전개되었다. 특히 1984년에 세계환경의 날(6월 5일)을 기념하면서 6월 첫 주일을 '환경주일'로 정하여 지켜온 것은 교회연합사업에도 한 몫을 하였다. 리우회의 이후 환경문제가 전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던 1992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각 교단에서는 환경위원회를 구성하고 첫 연합사업으로 환경주일 공동예배자료를 발간하였던 것이다. 이후 각 교단에는 교단적인 차원에서 '환경주일'을 정하고, 지금까지 해마다 환경설교와 기도문, 예배자료 등을 만들어 전국교회로 보급해오고 있다.
이외에도 물질문명에 흠뻑 젖어 있는 삶을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으로 돌아서게 하는 회개운동인 '생명길 좁은문'운동, 교회가 지역사회의 환경센타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는 '녹색살림터' 모델 개발 및 보급, 매일 정오에 1분씩 공동의 환경기도문을 놓고 기도하게 하는 '창조보전을 위한 기도운동', 창조신앙사경회, 환경전도활동 등은 이 시기 적잖은 기독인들이 환경문제를 신앙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신음하는 피조물들을 위해 헌신하는 길을 걷도록 해주었다. 생태적 관점에서 성서를 다시 보면서 환경문제를 체계적으로 학습시킨 '환경통신강좌와 '단순한 삶을 위한 생활훈련'은 교회와 지역사회 내 선한 청지기를 세울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생태적으로 사고하며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게 하는 기초를 놓았다.
1998년에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교회의 환경운동과 생명신학의 접목하는 차원에서 제정한 '녹색교회 21'이 더욱 내실있는 환경운동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개 지역을 순회하면서 연 '녹색교회 21' 교육은 죽어가는 생명, 신음하는 피조물을 돌보아야 할 교회들이 해야 할 구체적인 과제들을 찾게 하였다. 특히 구체화의 첫 단계가 2000년 들어 시작된 '교회를 푸르게' 하는 일이다. 이 운동은 교회가 회색도시에 나무를 심어 푸르름을 회복하고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감싸안게 하였다. 또 최근 들어서는 10여 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생명밥상운동'도 전개하고 있는데, 우리의 밥상을 살리고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이 목적이다.또 이 시기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를 중심으로 1998년 이후 매년 실시된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영성', '21세기 생태위기와 인간의 삶', '생태감수성 회복을 위한 교회지도자교육'은 운동의 질적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즉 단순히 이웃으로서의 자연을 사랑하자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기독교의 구속적 사랑(아가페)과 함께 그 동안 잊혀졌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도 우주의 신비와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창조의 영성을 회복해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목표로 삼도록 하였다. 또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기독교수도공동체인 '동광원'의 땅을 빌려 운영하는 환경농장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는 주말농장 프로그램들은 땀흘려 농산물을 일구어 먹는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깨닫게 하는 커다란 베품이 되고 있다.
이 시기, 또 다른 특징은 인적 물적 자원은 물론이고 이미 탄탄한 조직을 갖추고 있는 교회들과, 지역의 운동조직들(8곳: 서울, 광주, 대구, 부산, 인천, 전북, 태백, 함양)이 환경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리산 식수댐 건설 반대성명 및 대정부 건의', '영월 동강댐 반대 및 물사랑 서명운동', '새만금 갯벌의 생명과 평화를 위한 기도회' 개최, '2001 기독인환경선언문' 공동 발표 등은 대표적인 연합사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운동은 핵에너지 위주의 에너지 정책 반대, 유전자조작식품 반대, 새만금간척사업 백지화를 위한 활동 등 일반 환경운동 및 종교환경단체와의 연대에로까지 닿아 있다.
현재 기독교 환경운동의 주체는 개인, 지교회, 지역교회연합, 교단, 전문환경단체 등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환경운동이 단순히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운동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관련된 운동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환경문제는 어느 한 가지 이론이나 처방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자기중심성(개교회주의, 성장제일주의)을 탈피하고 다양한 신학적 모색과 더불어 녹색교회로의 전환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부록 3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환경선교지침방안 (안) 일부
V. 환경선교의 과제
3. 개교회의 환경선교
1) 환경보전을 위한 예배와 교회활동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환경주일 지키기, 창조보
전 설교, 피조물을 위한 기도, 자연과 함께 하는 예배 등을 시행한다.
2) 환경보전을 가르치고 훈련한다. 이를 위해 환경특강, 창조신앙 성경공부, 환경학
교, 녹색수련회, 환경시설견학, 자연학습, 농촌 일손 돕기 등을 시행한다.
3) 교회생활에서 환경보전을 실천한다. 이를 위해 환경부서 설치, 예산편성, 교회 푸
르게 가꾸기, 환경친화적인 교회건축, 절제된 냉난방, 검소한 식생활, 국내산 유기
농산물 이용, 쓰레기 분리수거, 합성세제 안 쓰기, 일회용품 안 쓰기, 재생비누 만
들기, 재활용품과 친환경상품 보급 등을 시행한다.
4) 지역사회 환경보전의 파수꾼이 된다. 이를 위해 마을 청소, 지역의 산과 하천 돌보
기, 환경오염 감시, 환경보전을 위한 지역연대 등을 시행한다
4. 개인의 청지기적 삶
환경보전의 대원칙은 생명을 살리려면 좁은 길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조금씩 불편하게 산다.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환경을 지킬 수는 없다. 독성물질(합성세제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가용 이용을 줄여야만,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는다. 종이는 물론
모든 물건을 아껴 쓰고 나누어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면 개인이나 사회 및 자연의
건강에 유익하고, 경제적으로도 이익이 된다. 개인 컵과 장바구니· 손수건 챙기기, 겨울
철 내복 입기 등 불편하기만하고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작은 움직임에서부터 환경
살림은 시작된다.
2) 조금씩 천천히 산다.
바쁘게 살면 패스트푸드를 먹게 되고 일회용품을 쓰게 되고 자가용이나 기계를 이용
하게 되므로, 환경을 파괴하고 에너지를 낭비하고 건강을 해치고, 삶의 여유가 없어서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다. 이런 점에서도 안식의 계명은 중요하다. 천천히 살기 위해서는
삶을 단순화하고, 욕심을 줄여야 한다.
3)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산다.
합성세제, 합성수지가 편리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화학제품들이다. 또, 자동화된
기계들이 좋아 보이지만 소비를 부추기게 된다. 창조질서에 따라 천연제품을 사용하며,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일하고, 집주변이나 주말농장에서 텃밭을 가꾸면,
에너지를 절약하고 삶이 건강해진다.
4) 광고나 유행으로부터 자유롭게 산다.
우리는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광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 광고들은
우리의 물욕을 충동질하며 돈을 사랑하고 유행을 따르게 만든다.
5) 자연을 가까이 하고 피조물을 사랑한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가고. 이 모두가
아름답고, 신기하고, 경이롭다. 작은 풀잎, 벌레도 자세히 보면 정말로 사랑스럽다. 냇
가에 물 흐르는 소리도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 신비로 가득한 자연을 관찰하며 그 안에
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 환경보전의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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