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가정

故 옥한흠 목사 장남 성호씨가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

하마사 2011. 2. 16. 13:15

"평생 사랑을 말했지만 자식에겐 사랑을 감췄던 그 사람… 아버지"

 

 

"어쩌면 아버지는 없었던 것과 같아요. 늘 '빈자리'였습니다. 아버지를 필요로 할 때 존재감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부재(不在)를 부재로 느껴본 적도 없죠. 제가 아버지가 된 뒤로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뿐이고, 아버지는 속으로만 미안해했을 뿐이고…."

지난해 9월 별세한 고(故) 옥한흠 사랑의교회 목사는 한국 개신교계의 거인이었다. 2만여 목사·선교사 제자와 수만 신도들에게 그는 영적인 아버지와 같았다. 정작 그의 맏아들 옥성호(44)씨는 "나에게 아버지는 영원히 실종된 존재"라고 했다. 교회의 부흥을 이끈 그 거인은 집에선 '없는 존재'와 다름없었다. 언제나 일과 세상에 시달리던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그런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장남 옥성호씨가 책을 썼다. 제목은 '아버지, 옥한흠'(도서출판 국제제자훈련원).


밖에선 '큰 존재'… 가족에겐 '없는 존재'

성호씨가 아버지를 또렷이 기억하는 순간은 3년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아버지가 돌아온 때. 초등생 3형제는 어머니와 경남 진영에서 살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서먹해 '충성!'이라고 거수경례를 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씻자"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시골집 앞마당 수돗가에서 어린 아들들을 씻겨줬다. 중학생이 된 성호가 감기를 앓고 있을 때, 아버지는 방에 들어와 젖은 수건을 몰래 널어주었다. 그가 기억하는 단 두 번의 '애정 표현', 그것으로 전부였다.

고(故) 옥한흠 목사의 사진 앞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남 성호씨. 그는“아버지는 저희 형제들 학교 졸업식 때도 오지 않을 정도로 항상 교회와 신도가 가족보다 먼저였다”며“가족사진도 1998년에 촬영한 것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미국서 공부한 아버지가 택한 건 고통스러운 교회 개척의 길이었다. "월급 목사로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제자 훈련' 철학을 실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신 거죠. 안정된 생활을 원했던 어머니와 다투기도 많이 했어요. 어머니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가 너무 미웠죠." 성호씨는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를 할 때, 남의 집 2층에 세들어 사는 게 부끄럽고 싫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버지에겐 언제나 가족보다 교회와 성도가 먼저였다. 졸업식때도 아버지 얼굴은 보기 힘들었다. 가족사진도 13년 전 1998년 6월에 찍은 것이 마지막이다. 성호씨의 책 표지에 있는 옥 목사와 성호씨 모습 역시 "할아버지와 아빠 둘이 찍은 사진이 없어 섭섭하다"는 성호씨의 딸이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아버지는 '매주 가정 예배를 드리자'는 약속조차 지키지 못했다. 두세 번 하고 말았다. "고2 때, 새로 산 가정예배 교재에서 처음 재미를 느끼고 늦게 귀가하신 아버지 뒤를 쫓아 들어갔을 때, 옷도 벗지 않은 채 이부자리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힘없는 모습을 봤어요." 더 이상 가정예배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옥 목사는 생전 세 아들에게 줄곧 "너희가 목사가 되겠다고 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목회자의 자질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았던 아버지는 "너희는 모두 목회자로서 자질도 소명도 부족하다. 행여라도 아버지를 믿고 목회한다는 소리 할 생각 말라"고 했다. "목회자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다. 한국은 목사가 너무 쉽게 되고, 또 너무 많아서 문제다."

2007년 초 성호씨가 세태에 물든 신학을 비판하는 책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내려고 했을 때, 아버지의 말은 이랬다. "너는 왜 그렇게 세상을 삐딱하게 보니? 다른 건 몰라도 내 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사람으로 각인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성호씨는 아버지에게 '내지 않겠다'고 거짓말하고, 몰래 책을 펴냈다. 그러나 그 책이 개신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자 아버지는 마냥 기뻐했다. 아들의 재능을 본 여느 아버지가 그러하듯. 이후 성호씨는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로 두 권을 더 펴냈다.

강철 같기만 하던 아버지는 지난해 3월, 40여년 만에 처음 성호씨에게 눈물을 보였다. 지난해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금메달을 딴 뒤, 식사자리였다. "연아가, 연아가…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겠니. 너무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또 다른 눈물은 병실에서 봤다. 항암 치료차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옆 얼굴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호야, 내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나처럼 재미없게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성호씨는 "아빠 젊을 때 누가 카바레 가서 춤추자고 하면 재밌었을 것 같으세요? 아빠는 평생 자신에게 가장 만족을 주는 삶을 사신 거예요"라며 한참을 달래야 했다. 옥한흠 목사는 "그렇지, 그런 거지?" 하며 그제서야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 가치 널리 알리고 싶어 책 출간"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특허 관련 벤처기업 미국 지사장으로 일하던 성호씨는 미국 생활을 당분간 접고 지난달 귀국했다. "목회자가 될 생각은 없다"는 그는 현재 사랑의교회 출판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 개인이 아니라 목회자 옥한흠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성호씨는 안성의 아버지 묘소를 잘 찾지 않는다. 거기 가면 늘 '빈자리'였던 아버지의 그 '빈자리' 마저 사라졌음을 느끼게 될 것 같아서다.

성호씨의 휴대전화 번호는 옥 목사가 생전에 쓰던 그 번호다. 밖에서는 수만 신도를 이끌었지만 집에서는 한없이 무심했던, 평생 사랑을 설교했지만 자식에겐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던 그 아버지의 번호다.


☞ 옥한흠 목사는…

교회 연합과 갱신 운동을 이끈 개신교계 지도자. 1972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78년 사랑의교회를 개척했다. 그가 주도한 평신도 교육 프로그램 ‘제자훈련’은 ‘제2의 종교개혁’으로 불리며 교계 전반에 확산됐다. 대형 교회들이 세습 논란을 빚던 2003년 정년을 5년 남기고 만 65세에 조기 은퇴해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 20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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