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으로 떠난 聖者, 하늘 가서도 세상 바꾸다
'아프리카 수단서 헌신의 삶' 이태석 신부 선종 1주기… 추모열기 뜨거워
7년여 의료·교육봉사 하느라 암 걸린 자신의 몸은 못챙겨
李신부 저서 월 2만부 팔리고 활동 돕는 인터넷 카페 회원 2300명→1만4000여명 폭증
다큐 '울지마 톤즈' 매진 사례
아프리카 남(南)수단에서 의료·교육봉사 활동을 펼치다 대장암이 발병해 지난해 1월 48세의 나이로 선종(善終)한 이태석 신부(1962~2010)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전쟁과 가난, 질병으로 얼룩진 이역만리(異域萬里) 땅에서 "아침에 눈떠서 잘 때까지 무조건 퍼주는"(2006년 10월 조선일보 인터뷰) 삶을 살다가 정작 암세포가 번지는 자신의 몸은 챙기지 못했던 그의 남다른 생애가 남긴 감동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불꽃 같았던 7년
이태석 신부는 2001년 12월부터 2008년 연말 말기암 진단을 받아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못할 때까지 7년여를 남수단 톤즈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인제대 의대를 나와 군의관을 마친 그는 2001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말 남수단으로 날아갔다. 로마 살레시오 교황청대학에 유학하던 중 방학 때 그곳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 ▲ 고(故) 이태석 신부가 건강하던 시절 남(南)수단 톤즈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현지 어린이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의대를 졸업한 후 나이 마흔에 사제가 된 그는 7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보여주었다. /이태석 신부 제공
20년에 걸친 내전이 할퀴고 지나간 수단은 '아무것도 없고, 할 일은 태산인' 곳이었다. 이 신부는 그곳에 병원·학교·성당을 하나씩 지었다. 그 자신이 몇 차례 말라리아로 고통을 겪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의 걸음걸이와 눈동자만 봐도 무슨 병인지 알아챌 정도가 됐다. 병원에 오지 못하는 환자를 위해 고물 지프를 몰고 오지를 누볐고, 한센병 마을을 찾아 환자들의 상처를 닦아줬다.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고, 브라스밴드를 만들었다. 이 밴드는 대통령 행사에 초청받아 '출장연주'를 다닐 정도로 인기였다. 늘 '괜찮다'며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모든 일을 척척 해낸 그를 현지인들은 '쫄리'라 부르며 따랐다. 그의 세례명 '요한(John)'과 성[Lee]을 붙여 애정과 존경을 담아 부른 이름이었다.
◆감동 물결… 채워지는 빈자리
이태석 신부의 활동은 그가 2009년 펴낸 유일한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생활성서사)와 그의 사후에 나온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에 담겨 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는 10만부가 넘게 팔렸고, 최근에는 한 달에 2만부씩 판매되고 있다. '울지마 톤즈'는 작년 9월 개봉 이후 34만5000명의 관람객이 들었다. 작년 11월 극장 상영을 끝냈던 이 영화는 재개봉해달라는 요청이 밀려들어 12월 중순 다시 개봉했는데 지금도 거의 매진되고 있다.
이 신부의 활동을 돕기 위해 결성된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WithLeeTaeSuk)의 회원은 이 신부 선종 전 2300여명에서 1만4000여명으로 급증했고, 수단어린이장학회(이사장 이재현)의 후원자도 3000여명으로 늘었다. 카페에는 "신부님을 알게 돼 행복합니다" "신부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더 많은 이들의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움직이게 하신 것 같아요" 등의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이런 감동에 힘입어 이태석 신부가 떠난 후 비었던 톤즈 현지의 활동도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이 신부가 속했던 살레시오회에서 파견된 우경민 신부가 뒤를 이어 활동하고 있고, 의료진도 다음 달 현지로 출발한다. 브라스밴드는 현지 청소년 가운데 선임자가 꾸려가고 있다. 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쓰던 고등학교 교사도 완공돼 오는 3월 입학식과 함께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또 이 신부가 한국 유학을 주선했던 토마스 타반(26)과 존 마엔(24) 등 수단 청년들은 이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의 특별배려로 의대 편입이 추진 중이다. 수단어린이장학회 장민석 이사(신한은행 지점장)는 "이태석 신부님은 우리들이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던 삶의 가치를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온 국민이 스스로에게 고해성사할 기회를 주셨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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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유행가를 '성가'로 만드는 힘
- ▲ 박은주 기획취재부장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 속이 오히려 후련해진다. 이런 걸, 카타르시스(정화·배설)라 한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지난해 1월 14일 선종한 이태석 신부 이야기는 그런 카타르시스와는 좀 거리가 있다. 책('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으로, 극장 다큐멘터리('울지마 톤즈')로, 방송 다큐로 이태석 신부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실컷 울었는데도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신부는 내전으로 엉망이 된 아프리카 수단에서 2001년 12월부터 7년여 동안 한센병과 말라리아 환자를 치료했고,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내일은 오늘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찌 그렇게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부산에서 태어난 이 신부는 10남매 중 9번째다. 형님 중 한 분이 신부이고, 누님 한 분도 수녀다. 10남매 중 셋이 종교에 몸을 맡겼다. 그 집안 피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신부의 형님이 신부가 될 때 집안에 소동이 일어났던 것을 봤던 그는 신부 꿈을 가라앉히고 의대에 진학했다. 그렇지만 결국 신부가 됐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원래부터 그럴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우리 마음은 훨씬 편해질 것이다. 봉사할 사람은 양심이 아니라 DNA가 결정한다고 믿으면 죄책감을 조금은 면할 수 있다.
기록화면으로 남아있는 이태석 신부의 모습은 흔히 상상되는 '성자'의 모습은 아니다. 흑인 아이들의 머리를 꿰매며 그는 말한다. "(피부가) 다 새까마니 실이 안 보이네." 아이가 아프다고 꼼지락거리면 머리도 한 대 때린다. 톡 하고 말이다. 근엄 떠는 성직자가 아니라 가식 없이 친근한 '아저씨' 같은 모습은 보는 이의 양심을 더 세차게 찌른다.
사실 이역만리에서 의술로 사람을 살리는 이들은 지금도 수백명도 넘는다. 이태석 신부와 2회 한미자랑스런의사상을 공동수상한 심재두 샬롬클리닉 원장 또한 지난 93년부터 역시 의사인 부인과 알바니아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알바니아에서 그는 결핵을 퇴치하고 의료캠프를 만들어 난민을 보살펴왔다. 뿐만 아니다. 26회 행사를 치른 보령의령봉사상 수상자들, 올해 10회를 맞은 한미참의료인상 수상자들 상당수가 국내외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이때, 이 땅에서 신부의 모습에 사람들이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단지 그가 세상을 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의사상을 수상하면서 이 신부는 "백신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 고도의 의술로 불치병을 고친 것도 아닌 내세울 것 없는 조그마한 의술로 (아프리카에서) 몇 년 살았을 뿐인데…"라고 말했다. 공(功)을 드러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가식하지 않는 종교인의 모습. 온갖 다툼이 연일 신문을 장식하는 우리 교회, 성당, 절에서 실망한 종교인들에게 진짜 종교가 이런 것임을 다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선종 3개월 전,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진 이태석 신부는 가발을 쓰고 휴대용 반주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윤시내의 철 지난 유행가 '열애'가 성가(聖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들린다. 이게 종교의 힘이다.
-조선일보, 20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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