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본질/봉사(섬김)

'얼굴 없는 천사' 또 돈만 두고 갔다

하마사 2010. 12. 29. 09:56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로 중년 남성 전화 걸어와
3584만원 남긴 곳 알려줘 11년째… 총 1억9720만원

올해도 어김없이 전북 전주시 노송동에 얼굴 없는 천사(天使)가 찾아와 세밑 한파를 녹였다. 11년째 이어진 천사의 신화는 작년과 같은 날짜 및 시각인 28일 오전 11시 55분쯤 동 주민센터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시작했다.

올해 전화는 민원 창구의 주민등록 담당인 심야은씨가 받았다. 상대는 불과 수 초 사이 "매년 하는 게 있는데 '송 헤어샵' 골목으로 가보라"는 말만 남긴 채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송 헤어샵은 주민센터 건너편 골목 어귀에 있는 미용실이다. 심씨는 "40대 후반쯤 되는 남자의 밝은 목소리였다"고 말했다.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한일수 동장(넥타이 차림) 등 주민센터 직원들이 28일 낮‘얼굴 없는 천사’가 주민센터 앞 골목에 두고 간 11년째 기탁금을 정리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이 전화는 주민센터 직원 17명 모두 크리스마스 전부터 기다려 왔다. 심씨가 "전화 왔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시민생활 담당 장덕현씨 등 두 명이 한걸음에 골목 어귀로 달려나갔다. 플라스틱 화분용기 위에 A4용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봤으나 행인 한 사람, 차량 한 대도 지나지 않고 있었다.

들려온 상자 안에는 황금색 돼지저금통과 고무줄로 묶은 5만원짜리 현금 다발들이 놓여 있었다. 주민센터 직원들이 달려들어 세어보니 5만원권 현금 다발 7개(3500만원)와 저금통에 든 동전(84만900원)을 합쳐 모두 3584만900원이었다.

작년에는 '어머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였으면 합니다'라는 메모가 A4용지에 인쇄돼 있었으나 올해는 어떤 메모도 없었다. 작년에는 5만원권·1만원권 다발, 저금통 동전까지 모두 합쳐 8026만5920원이 주민센터 뒤 세탁소 공터에 놓인 A4용지 상자에 들어 있었다.

11년 사이 12차례 노송동 주민센터에 이어진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액은 모두 1억9720만4020원에 이른다. 2000년 4월 3일 초등 남학생이 '어른 심부름'이라며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민원대에 놓고 간 다음 세밑만 되면 중·장년 남자의 전화가 주민센터에 걸려 왔다. 그때마다 동사무소 앞 공중전화 부스, 주차장 입구 화단 등엔 현금이 든 쇼핑백이나 종이상자가 놓여 있었다.

전주시 노송동은 전주시청 동쪽 구릉을 낀 구시가지 동네로 전주에서 세 번째로 기초생활보장 대상자(626가구)가 많은 곳이다. 시는 작년까지 얼굴 없는 천사가 기탁한 1억6000여만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명절 때마다 동네 차상위 계층까지 1401가구에 10만~30만원씩 전달해왔다.

한때 지역 언론사 등에선 기부된 현금 다발을 묶은 띠지의 출처를 추적해 '얼굴 없는 천사'를 찾아나서기도 했다. 천사가 2000년대 후반 이후 현금 다발을 고무줄로 묶게 된 연유다. 한일수 노송동장은 "그분을 초조히 기다리면서도 10년의 선행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울렸기에 이제 흔쾌히 짐을 벗으셔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주시는 '천사'를 찾는 대신 노송동 주민센터 앞 도로를 '얼굴 없는 천사의 길'로 이름 짓고 지난 1월 주민센터 화단에 가로 1.2m, 세로 1m의 기념비를 세웠다. 시민의 뜻을 모아 송하진 시장이 붓을 들었다. '얼굴 없는 천사여, 당신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참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
얼굴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주민자치센터에 28일 전화 한통과 함께 현금과 돼지저금통이 담긴 박스를 남겨놓고 갔다. 금액은 35,341,610원./김영근 기자

-조선일보, 2010/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