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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사망

하마사 2010. 10. 11. 09:23

황장엽북한 노동당 비서가 10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다. 1997년 2월 북한을 탈출한 황씨는 그가 그렇게 염원했던 북한 동포들이 자유를 되찾는 날, 김정일 세습 독재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황씨는 소련과 중국 간의 이념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던 김일성의 외교노선에 불과했던 '주체 사상'에 철학적 옷을 입혀 북한의 지도이념으로 만들어낸 북한을 대표하는 이론가였다. 김정일에게 직접 주체사상을 가르치기도 했다. 1965년부터 14년간 김일성대학 총장을, 1972년부터 11년간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1979년부터 18년간 노동당 비서를 맡는 등 북한 권력의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황씨는 망명 이유를 "전대미문의 독재에 시달리는 2300만 북한 동포를 구원하는 일이 나의 소임(所任)이기 때문"이라고 밝힌 대로 북한 권력의 거짓과 잔혹함 그리고 폭정(暴政)에 신음하는 북한 주민의 고통을 세계에 알리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올해 초 미국 강연에서 "김정일은 사생활이나 성격이 아니라 업적을 갖고 평가하면 된다"며 "(북한 주민) 300만명을 굶겨 죽인 게 누구냐"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나를 반역자라고 말하지만 (진짜) 반역자는 국민을 굶어 죽게 한 김정일"이라고 했다.

김정일은 황씨의 망명 후 직계 가족과 황씨와 공적(公的)·사적(私的)으로 관련을 맺었던 2000여명을 숙청한 다음 공개적으로 "아들·딸·손자를 내버린 자를 어떻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나. 개만도 못하다"고 황씨를 비난했다. 황씨 살해 지령을 받고 한국에 잠입했다가 올해 4월 체포된 북한 공작원들은 "김영철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장이 '황장엽이 당장 내일 죽더라도 자연사(自然死)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대한민국 일각의 북한에 대한 미망(迷妄)을 깨부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1980년대 대학가에 흘러넘치던 주사파(主思派)의 주도적 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황씨 망명 후 공개 전향해 황씨와 함께 북한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북한 민주화와 북한 주민 해방을 향한 황씨의 집념과 구상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좌절을 겪기도 했다. 황씨는 올해 인터뷰에서 "천안함 폭침(爆沈) 같은 끔찍한 일을 김정일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난 조사하지 않고 누워서도 김정일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아는데 남한에는 참 한심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며 "문제는 북한 인민들이 아니라 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황씨는 스물일곱 살 난 김정일의 3남(男) 정은의 3대(代) 세습에 대해 "그깟 어린 녀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며 "3대 세습이 (북한 내부) 권력 다툼의 명분이 돼 김씨 왕조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황씨가 숨진 10일 평양에선 황씨가 "그깟 어린 놈"이라고 불렀던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과 함께 사열대에 등장해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을 지켜봤다. 황씨는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김씨 세습 왕조가 무너지는 날과 북한 주민이 폭정에서 해방돼 자유를 되찾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황씨의 못다 이룬 꿈은 이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이 이뤄내야 할 꿈으로 넘겨졌다.

 

-조선일보 사설, 201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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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기자 강철환이 본 황장엽의 '마지막 나날'
"김정일 망하는 것 그것만은 보고 가야지…" 평소 잠꼬대처럼 되새겨
“김정일보다 한심한 놈 대한민국에 많아… 햇볕정책은 反逆정책”

"김정일이 망하는 것이 눈앞에 보인다. 그것만은 보고 가야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사람들이 건강이 어떤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그 희망을 이루지 못하고 10일 세상을 떠났다. 황 전 비서가 오래 소망했으나 하지 못한 일은 또 있다. 중국의 옛 친구들을 찾아가 "중국은 북한과 잡은 손을 놓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일이다. 그는 "아직 때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다"고 했었다.

北에서… 1987년 소련을 방문하기 위해 평양역을 출발하는 김일성을 환송하기 위해 나온 김정일과 황장엽(빨간 점선 안)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천리마 87년 1월호

지난 2007년 탈북자 중심단체인 북한민주화위원회가 설립돼 황 전 비서가 위원장을 맡은 후 그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지난 9월 말이다. 그때만 해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지난주 황 전 비서가 이끄는 철학 모임에 참석했던 학자와 탈북자들도 그가 평소보다 밝은 모습이라 더 건강해 보였다고 했다. 황 전 비서는 서울 논현동의 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철학을 강의하고 토론했다. 강의와 토론은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는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을 특히 좋아했다.

1991년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덩샤오핑 당시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만날 때 뒤에 서 있는 황장엽(빨간 점선 안) 전 비서. /연합뉴스

황 전 비서는 하루 두 번 반신욕을 하고 식사는 하루 한끼만 했다. 오리백숙 등 오리요리를 좋아했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 이야기만 나오면 분노했다. 삼남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했다는 소식에, "그놈(김정일)이 얼마나 후안무치한 도적놈인가. 세상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그깟 놈(김정은)이 올라간다고 뭐가 제대로 되겠소? 이제 망할 날이 다가오는 것이지"라고 했다. 황 전 비서는 김정일에 대해선 늘 '그깟 놈' '도적놈' '세상에 몹쓸 패륜아'라고 했다.

황장엽(맨 앞줄 가운데) 전 비서가 1994년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7차 회의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탈북자들이 북한 후계구도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세 아들놈 중 큰아들 김정남이 제일 낫고 그놈이 되면 북한은 조금 오래가겠지만 다른 것들은 별것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그깟 놈들에게 관심을 갖더라도 우리는 무시하자"고 했다. 지난 9월 28일 북한 당대표자회에 김정은이 등장한 걸 보고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깟 놈(김정은) 나타난 게 뭐 별거요? 우린 우리대로 북한 민주화를 위해 할 일을 하면 돼요"라고 했다.

그는 북한보다 남한을 더 걱정했다. "남한이 정신 못 차려서 큰일 났다"며 한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망하는 북한을 보며 대한민국과 통일을 논하러 왔는데 대한민국이 더 걱정된다"고 했다. "김정일보다 더 한심하고 못된 놈들이 대한민국에 많아 김정일에게 남한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걱정도 많이 했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하기 전 북한에 체류할 당시에 찍은 가족사진. /연합뉴스

그를 분노하게 만드는 또 다른 주제는 햇볕정책과 김대중·노무현 정권이었다. 그는 "김정일 체제가 지금껏 유지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문"이라면서, "햇볕정책은 북한 인민들을 더 큰 고통 속에 몰아넣고 김정일만 살린 반역정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그는 "이제 탈북자들이 대한민국 정부와 함께 북한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고 의욕을 보였다.

 

 

-조선일보, 201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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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위해 가족 희생…
"박해 속에 죽어갈 가족, 나를 가혹히 저주해주오"(1997년 아내에게 쓴 유서)
고달팠던 南생활 13년… '햇볕정책' 10년 손발 묶여 암살 위협에도 '北 비판'

10일 별세한 황장엽(87)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선군사상'과 함께 북한의 양대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 꼽힌다. 그는 1997년 2월 망명 이후 김정일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최근에는 3대 세습에 대해 날을 세웠다. 그러나 황 전 비서는 자신이 "그깟 놈"이라고 했던 후계자 김정은이 노동당 창건 65주년을 맞아 공식 등극하던 날 눈을 감았다.

南에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왼쪽)가 측근인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전 총사장과 함께 1997년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순탄치 않았던 남한 생활 13년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딸(1남3녀)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죽어가리라고 생각하니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반하였소.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 주기를 바라오.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소.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한 내가 얼마나 더 목숨을 부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여생은 오직 민족을 위해 바칠 생각이오.'

황 전 비서가 망명 직후인 1997년 2월 17일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에서 아내(박승옥)에게 쓴 유서(遺書) 중 일부다.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해 온 황장엽 전 비서가 그해 4월 안가에서 서류를 읽고 있다.

황 전 비서는 100만명 이상의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던 때 '민족'을 위해 가족의 희생을 알면서도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13년8개월에 걸친 그의 남한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망명 이후 다양한 국내·외 활동으로 북한 실상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내세운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사실상 손발이 묶인 채 지내야 했다. 황 전 비서가 그토록 원했던 미국 방문은 망명 6년이 지난 2003년 10월에야 이뤄졌다. 자유로운 외국 방문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2008년 들어서 가능해졌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2006년 10월)에서 "김대중씨는 김정일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민족적으로 공조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김정일은 수백만 동포들을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고 온갖 고통을 들씌운 민족 반역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족 반역자와 민족 공조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밝혔다. '햇볕정책'에 대해선 "적을 벗으로 보고 안심하게 되며 아픔을 잊어버리고 잠들게 하는 마취약이 과연 명약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지난해 9월 서울 논현동의 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실 개소식에 참석한 황장엽 전 비서. /연합뉴스

북한은 이런 황 전 비서를 계속 위협했다. 2006년엔 협박편지를 보냈고, 최근엔 '암살조'를 남파했다. 그러나 황 전 비서는 김정일 정권은 물론 후계자 김정은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 3월 방미(訪美) 중 강연에선 김정은에 대해 "그깟 놈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깟 놈 알아서 뭐하나"라고 말했다. 지난 8월 본지 인터뷰에선 "김정은인가 하는 어린아이가 후계자로 나선다고 하는데, 멸망을 재촉하는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또 지난 4월 암살조 구속 직후 본지 인터뷰에선 "내가 몇 살인데 그런 거(암살조) 신경 쓰겠느냐. 내 존재로 북한의 악랄함을 알리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했다.

올 3월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했던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워싱턴 D.C.의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AFP

김일성·김정일 측근에서 배신자로

황 전 비서는 1923년 1월 평남 강동군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평양상업학교와 일본 주오(中央)대 법대에서 공부했다.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가 1946년 조선노동당에 입당했으며, 모스크바대(철학부) 유학을 거쳐 1954년 김일성종합대 철학강좌장(학과장)이 됐다. 황 전 비서는 1958년 1월 김일성의 이론서기(비서)로 임명되면서 '김일성 사상'으로 통하는 주체사상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5년부터 김일성대 총장을 14년간 역임하고, 1979년부터 주체사상연구소장을 망명 직전까지 맡으면서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 초 김일성대에서 김정일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친 적도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는 정치색이 옅고 학자인 황 전 비서를 좋아했다. 김정일의 경우 황 전 비서 외아들의 결혼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황 전 비서 아들은 장성택의 조카와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장성택과 사이가 나빴던 아내 김경희(김정일 여동생)가 '장성택·황장엽 집안'의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김정일이 "젊은 것들이 떨어지지 않으려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라며 결혼을 성사시켜 줬다고 한다.

그러나 황 전 비서는 1990년대 중·후반 수백만명이 굶어 죽는데도 1인 독재 유지에만 급급한 김정일과는 같이 갈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주체사상은 '인간'이 중심이었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은 '김씨 왕조'가 중심이었다. 황 전 비서는 1997년 2월 망명 당시 "인민이 굶어 죽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라고 했다.

 

-조선일보, 201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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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황장엽(87)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북한의 암살(暗殺)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북한은 황씨를 '공화국의 적(敵)', '원수 황가놈'이라고 지칭하며 고정간첩 등을 통해 황씨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추적해 왔고, 올 초엔 암살임무를 띤 무장간첩을 남파해 직접 암살을 기도한 사실도 공안당국에 적발했다.

황씨 암살 임무를 띤 무장간첩은 북한의 대남(對南) 무력공작의 총책 격인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총국장 김영철(노동당 중앙군사위원)이 올 초 직접 남파했다.

탈북자를 가장해 국내로 들어왔다가 올해 4월 검거된 동명관(36) 등 공작원 2명은 김영철로부터 "황가놈이 자연사(自然死)하게 내버려둬선 안된다. 황장엽의 목을 따라"는 지령을 받았다.

북한에 군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지난 6월 기소된 전직 안기부 대북공작원 '흑금성'도 북측 공작원에게서 "황장엽의 주거지와 동선을 파악하라"는 임무를 받고 활동했다. 또 2006년 탈북자로 위장해 활동하다 검거된 고정간첩 원정화(36)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통해 황씨에게 접근하려 시도했던 사실을 검찰이 적발했다.

2006년 말에는 핏빛 페인트를 칠한 황씨의 사진, '배신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내용의 경고장과 손도끼가 담긴 소포가 황씨가 대표로 있던 자유북한방송에 배달됐다.

앞서 2004년에는 피로 추정되는 붉은색 물질을 칠한 흉기가 꽂혀 있는 황씨의 사진과 살해위협 유인물이 탈북자 동지회 사무실 앞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공안당국 관계자는 "황씨는 망명한 이후 고정간첩 등 북한 공작원들의 최우선 목표물이었다"고 말했다.

북한의 살해위협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황씨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동명관 등 이른바 '황장엽 암살조'가 검거됐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아마 어딘가에 나를 암살할 임무를 띤 공작원들이 더 있을 것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한편 황씨 암살조였던 동명관 등에겐 지난 7월 1일 1심에서 징역 10년이 선고됐고, '흑금성'의 공판은 현재 진행 중이다.
 

-조선일보, 201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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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씨 2년 전 자작시 처음 공개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이 세상 하직할 영이별 시간이라고…(중략)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정든 산천과 갈라진 겨레는 또 어떻게 하고(중략) 삶을 안겨준 조국의 거룩한 뜻 되새기며."

고(故) 황장엽북한노동당 비서가 2년 전 자기 운명을 예감한 듯 썼던 '이별'이란 제목의 시(詩)가 13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시는 지난 2008년 4월 23일 황씨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사무실에서 서정수(66) 민주주의정치철학연구소 이사에게 건넨 자작시다. 황씨는 당시 매주 수요일마다 사무실에서 서 이사를 비롯한 지인 7명과 함께 민주주의 철학에 대해 토론했다.

서 이사는 "평소 황 전 비서가 시를 잘 쓴다고 생각해 '시를 한번 써보는 게 어떠시냐'며 시집 출판을 권유했었는데, 세미나하던 날 '기억력도 감퇴해 더 이상 책 쓰기가 힘들다'고 하시면서 자작시를 내게 보여줬다"고 했다. 그때 서 이사가 "선생님, 왜 가신다고 쓰셨습니까? 가시더라도 김정일이 죽는 것 보신 후에 가셔야죠"라고 하자 황씨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고 한다. 서 이사는 그 자리에서 '이별'이란 제목을 붙여줬다고 했다. 1주일 뒤 서 이사가 시를 타이핑해서 전하자, 황씨는 "서 박사와 나만의 비밀로 합시다"며 시가 적힌 종이를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고 한다. 황씨는 평소 지인들에게 "아주 절박했을 때 시 몇 편을 썼었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 이사는 "고인이 자기 운명을 예상하고 쓴 시를 생전에 공개할 수 없었다"면서 "시 중간에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라는 부분을 읽으며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2008년 1월 1일에 쓴 것으로 돼 있는 이 시는 14일 고인의 영결식 때 상영되는 황씨 추모영상 첫 부분에 실린다.

 

-조선일보, 2010/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