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신(一身)은 염려들 마라. 나는 죽으나 사나 평양을 떠날 수 없다. 나만 먼저 살겠다고 나를 믿고 있는 이북의 동포들을 버릴 수야 있겠느냐."
평생을 민족주의자로 살면서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노력했던 '민족의 영원한 스승'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3~1950) 선생. 그는 광복 후 주위의 월남 권유를 마다하고 평양에 남아 공산정권에 저항하다 6·25전쟁 중인 1950년 10월 18일 후퇴하는 인민군에 의해 희생됐다.
고당의 60주기를 앞두고 그의 생애를 정리한 '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하겠소'(기파랑)가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에 의해 출간됐다. 1966년에 평남민보사가 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펴낸 '고당 조만식'을 비롯해 '고당 조만식 회상록'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편' '6·25와 이승만' 등 관련 서적들과 비밀 해제된 소련 문서 등을 참고해 엮은 이 책은 고당의 삶과 사상을 당시 시대 상황과 관련해 서술하고 있다.
고당은 민족주의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평생을 인재 양성과 경제진흥, 언론문화 발전에 힘썼다. 그의 민족운동은 1913년 일본 메이지대를 졸업하고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민족 부흥을 위해서는 교육사업이 근본"이라고 믿었던 그는 남강 이승훈이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지로 평북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에 부임한 지 2년 만에 교장이 됐다. 그는 직접 영어 등을 가르치는 교사이자 기숙사 사감, 교목(校牧) 그리고 사환 역할까지 1인 5역을 감당하며 민족의 동량(棟樑)을 길러냈다.
1919년 2월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한 고당은 3·1운동 직후 상해 망명 길에 올랐지만 일제에 발각돼 투옥됐다. 이듬해 출감한 그는 인재 양성과 경제력 증진을 통해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오산학교와 평양 숭인학교 교장으로 재임하고, 물산장려운동와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주도하며, 신간회 평양지회장을 맡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 무렵부터 고당은 그의 상징이 된 삭발한 머리, 한복 두루마기에 단화 차림을 시작했고,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을 얻었다.
고당은 1932년 평북 정주 출신으로 금광사업에 크게 성공한 방응모(方應謨)에게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사 인수를 권유했고, 자신이 1년여 사장을 맡아 조선일보가 민족지로 재도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일제 말기 병을 핑계로 평남 강서에 은둔했던 그는 광복 후 북한 지역의 민족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소련군과 김일성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려야 했고, 1946년 1월 마침내 연금됐다.
전기 출간에 맞춰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가 개최한 '한나라 강좌'와 '고당 추모 강연'의 강연문을 모은 '고당 정신과 나라의 앞날'(기파랑)도 함께 나왔다. 김재순·노재봉·신용하·김동길·신일철·박세일·김영호씨 등 각계 인사 19명의 강연문을 담았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기일(忌日)인 10월 18일 오후 3시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는 60주기 추도식 및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02)2265-7280, 0220
"어디 고당 같은 분 안 계십니까?" IMF 외환위기가 온 나라를 덮친 1998년 한 기독교 교단 신문에 이런 광고가 실렸다. 온 국민이 힘 모아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는 간절한 소망이 일제 때 물산장려운동을 일으켜 민족산업을 지키려 했던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선거철 망국병인 지역색이 판칠 때도 고당은 우리 곁에 되살아난다. 1908년 일본에 유학 간 고당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출신 지역별로 모임을 따로 갖고 반목하는 걸 보고 분개해서 외친다. "고향을 묻지 맙시다. 독립을 위해서도 단합해야 하지만 국권을 찾은 다음 화합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국민 가슴에 '영원한 스승'으로 새겨져 있는 고당이지만 어린 시절엔 술 마시고 길에서 하늘을 이불 삼아 잔 적도 많았던 모양이다. 고당은 러일전쟁에서 나라가 남의 전쟁터가 돼 쑥대밭이 되는 걸 보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밤새 술 마신 다음날 아침 갈지자걸음으로 숭실학교를 찾아가 입학한 이후 민족주의와 애국계몽의 길을 걷는다. 그제 출간된 고당의 전기 '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기파랑)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들을 통해 거인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이 나라의 존경받는 인사들을 전쟁협력자로 끌어들이려고 온갖 공갈 협박을 했다. 고향 평남 강서에 은거하던 고당에게도 학병 권유 연설을 하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고당은 "안사람한테 놋그릇을 빼앗아 갔으니 그만하면 협력한 것 아니오?" 한마디 하곤 대꾸도 안 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고당 이름으로 '학도에게 고한다'는 학병 지원 권유 논설을 날조해 실은 기자는 광복 후 자살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은 "신탁통치에 찬성만 하면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며 고당을 꾀었다. 북한 정권을 손에 넣을 수도 있는 순간에 고당은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며 거절했다. 주변에서 남한으로 탈출하라고 권했지만 고당은 "나마저 서울로 가면 자유를 동경하는 저 동포는 누굴 믿고 살겠는가"라며 사양했다. 김일성은 6·25전쟁 중 국군 평양 입성이 코앞에 닥친 1950년 10월 18일 고당을 처형했다. 며칠 있으면 고당의 60번째 기일(忌日)이다. 고당처럼 지조와 기개와 멸사(滅私)의 정신으로 민족을 이끌던,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그립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