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01년 3월 도쿄 소니 본사에서 이데이 노부유키 당시 회장을 인터뷰하고 나오면서 기자는 슬쩍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삼성전자?"
대답 대신 그는 `뭔 시답잖은 질문인가`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돌이켜보면 당시 삼성은 곧 수면 위로 머리를 드러낼 잠룡(潛龍)이었지만 그의 안중에는 없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05년, 소니는 글로벌 브랜드파워 순위에서 28위로 추락해 삼성(20위)의 뒷자리를 지킨다. 2006년에는 간판상품인 TV가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삼성에 내주는 수모를 겪는다. 곧이어 매출 규모도 삼성에 한참 뒤지게 된다. 어쩌면 기자가 이데이 회장을 만난 그때가 소니의 정점이었는지 모른다.
장면이 바뀌어 2010년 1월 초. 라스베이거스 가전쇼를 참관한 이건희 삼성 회장은 중국이 우리를 추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고, 소니나 파나소닉 같은 일본 기업도 신경은 쓰지만 무섭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의 자신감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먼저 머리를 스친 것은 `삼성도 웬만큼 올라갔구나`하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아이폰은 그때까지 골목대장이었던 삼성 휴대폰을 우습게 보며 고객의 마음을 훔쳐냈다. 천하무적 하드웨어 기업인 삼성도 전혀 다른 싸움의 방식에 속수무책이었다. 소니가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워크맨`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동안 해당 기술의 종주국인 미국이 눈만 껌벅일 수밖에 없었듯이, 삼성이 TV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로 일본기업을 농락하는 동안 그들이 넋놓고 바라만 봤듯이.
소니는 일본의 자존심이자 긍지였고 혁신과 창조경영의 교과서였다. 그러나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면서 창업정신이 쇠퇴하고 초심이 흐트러졌다. 세계 최고봉을 이룩한 하드웨어가 핵심역량이었지만 방만하게 소프트웨어에 경영자원을 쏟았다.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사내 문제 제기는 묵살당했고 브레이크는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 산업의 트렌드가 바뀌고 MSㆍ야후ㆍ구글 같은 거대 소프트웨어 기업이 부상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위기는 리더를 포함한 조직 구성원의 모럴이 무너지고 긴장이 끊어진 지점에 정확히 찾아왔다.
도요타도 그렇다. 세계 제조업의 전범이 된 간판방식(Just In Time)을 고안해낸 이후 너무 오랫동안 세계인의 칭송을 받아왔다. 근년에는 세계 자동차업계 1위라는 훈장까지 받았다. 그런 우등생의 방심과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이번 차량결함 사고가 나기 수개월 전부터 사내 `경고`가 있었지만 뭉개버렸다고 한다. 덕분에 어렵게 올라간 1등 자리를 누려보기도 전에 폭스바겐에 선두를 뺏길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GM과 포드는 한때 아무도 쓰러뜨릴 수 없는 제국이었다. GM 포드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았다. 포드는 근대적인 생산방식의 혁명을 이루었고, GM은 그 포드를 누르고 세계 1위가 된 기업이다. 하지만 일본 기업이 오일쇼크 이후 기름을 적게 먹는 소형차에 역량을 집중했을 때도 그들은 "니들이 미국에 대해서 뭘 알아"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두 공룡 역시 느리지만 착실하게 순위가 내려앉으며 쇠퇴해갔다.
경쟁에서 역전극은 이처럼 정점에 이른 기업의 방심과 오만이 득세할 때 이뤄진다. 하지만 그 짧은 틈새를 경쟁의 세계는 용납해주지 않는다.
남의 나라 걱정을 할 것도 없다. 이건희 회장이 지적한 중국의 경쟁력은 생각보다 바짝 우리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와 있고 일본 IT기업의 재반격도 무섭다. 한데 우리 기업은 너무 정상 가까이 가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잘나갈 때는 보이지 않는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는 고은의 시는 새삼 세상 이치의 오묘함을 깨닫게 한다.
[전호림 중소기업부장]
-매일경제, 20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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