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23일 국회에서 엄수됐다. 사회자는 영구차의 입장을 알리며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과거 국민을 언급할 때 늘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했었다. 이제 고인 스스로가 국민의 존경과 사랑 속에 생을 마감하고 영면(永眠)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을 보내며 그가 남긴 민주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김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그들과 함께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제도의 민주화는 이룩했다. 그러나 그 이후 20년이 지나도록 사회의 갈등을 수렴하고 국론을 원만하게 모아가는 민주주의의 실천에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여·야는 국회에서 육탄전을 벌였고 야당은 아직까지 장외투쟁을 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누구보다 확고한 의회주의자였다. 고인은 정당성 없는 권위주의 체제와 맞설 때에도 "국회가 가장 훌륭한 투쟁의 장(場)"이라는 주장을 굽힌 적이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도 다른 곳이 아닌 국회였다. 국회가 기능을 잃고 권위를 잃으면 머지않아 그 화(禍)가 나라와 사회 전체를 뒤흔든다. 여·야가 지금 당장이라도 의회주의 회복 방안을 놓고 마음 터놓고 대화하는 것이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뜻을 진정으로 기리는 길이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를 선·악의 대결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해(利害) 조정의 과정으로 보았다. 정치가 선·악의 대결이라면 타협은 불가능하다. 지금 민주화된 우리 사회에 선·악 대결이란 존재하지도 않는데도 갈등의 양상만은 선·악 대립의 격돌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아직도 자신은 선(善)으로, 상대는 악(惡)으로 보는 사람들은 김 전 대통령의 지혜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으면 한다.
김 전 대통령 서거로 우리 사회엔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화해 분위기는 뜻밖에 만들어진 만큼 쉽게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 어렵게 열린 이 문이 닫히지 않도록 붙잡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우리에게 화해란 단순히 서로 안 좋은 감정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상화와 직결된 일이다. 지금 지역·계층·세대 간 반목으로 마비된 국가 과제들이 한둘이 아니다. 얼마든지 순리로 풀릴 수 있는 문제들이 꼬여 있다. 그 해법은 화해밖에 없다. 지역, 여·야, 노·사, 보수·진보가 화해하고 나라가 정상화되는 길을 걷게 되는 것 이상으로 김 전 대통령이 바란 것은 없을 것이다. 거듭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2009/8/24, 조선일보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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