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85년간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또 한 장을 넘겼다. 이명박 대통령은 "큰 정치 지도자를 잃었다"며 "민주화와 민족화해를 향한 고인의 열망과 업적은 국민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고 애도했고, 민주당은 "진정한 이 시대의 위대한 스승이었다"고 했다. 민주화의 길에선 동지로, 정권을 향한 길에선 경쟁자로, 평생 동안 협력하고 평생 동안 경쟁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나라의 큰 거목이 쓰러졌다"며 "아쉽고도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을 향해 이런 찬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 못지않은 비판도 따를 것이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을 빼놓고서 1970년대 이후의 우리 역사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삶 자체가 넘어지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걸어온 우리의 역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가난의 옷을 벗고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해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경우도, 아무런 민주주의 경험도 없이 왕조시대와 식민지를 거쳐서 제도적 민주화를 달성한 경우도 대한민국 외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 나라가 불가능에 가까운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이룬 것은 기적이다. 대한민국이 이룩한 두 가지 기적 중의 하나인 민주화를 김 전 대통령을 빼놓고선 이야기할 수 없다. 민주화가 뒤따랐기에 산업화도 더 빛을 발하는 것이고 민주화의 토대가 깔렸기에 오늘날과 같은 첨단 글로벌 경쟁 시대에서 국민의 개성과 능력이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을 때 온 나라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떨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사실대로 쓸 수도 없었고, 정직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삭막한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중간에 쓰러져 흩어지고 말 위기를 수없이 맞았다. 실제로 세계 역사 속엔 미완(未完)으로 끝나버린 민주화 운동의 유산(流産)된 흔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우리가 탄압을 이겨내고 끝내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자유로운 국회를 갖고, 사실대로 쓰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김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란 꺾이지 않는 두 개의 구심점이 버티고 있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두 번에 걸쳐 6년간의 감옥살이와 10년에 걸친 연금 생활을 겪었고, 바다에서 수장(水葬)당할 뻔도 했으며,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아야 했다. 그의 한 아들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당해야 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는 김 전 대통령의 이런 희생과 고난에 굴하지 않는 용기에 힘입은 바 크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외환위기에 빠져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로 전락한 나라를 물려받았다. 살얼음 위를 걷는 듯했던 그때, 국민들이 지치고 불안해하던 그때에 김 전 대통령은 밖으로는 외화 차입, 안으로는 경제 구조조정에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우리는 2001년 8월 IMF에서 빌린 돈을 다 갚았다. 감격적이고 기록적인 일이었다. 이번 국제 금융위기에서 우리 기업과 은행들이 세계에서 가장 잘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그때 우리가 구조조정을 통해 체질을 바꾼 덕이 컸다.
김 전 대통령은 평소 "나는 정보(IT)산업을 일으킨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세계 유수의 IT 산업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엔 김 전 대통령의 이런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벤처산업을 육성해 새로운 기업과 기업인들을 키워내고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도 김 전 대통령 시대의 업적으로 남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외교 협상을 통해 남북문제를 해결하자던 평소 정치 소신의 연장선상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뒤 2000년 6월 필생의 사업이었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김 전 대통령에겐 김정일 위원장과 손을 맞잡은 순간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일로 김 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가 전략에서 그 노선에 선 사람들의 변함없는 중심이자 대부 역할을 해왔다.
김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대북 전략에서 새로운 지평(地平)을 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개성에서 4만명의 북한 근로자가 남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고, 많을 때는 한 해 2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북한을 왕래했다. 김대중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막대한 현금과 물자를 지원하고 나서도 북한이 두 번이나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계속하는 지금, 김 전 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은 북한의 핵개발에 도움을 주고 북한에 이용당한 일면(一面)이 있다는 비판의 바람을 맞고 있다. 김 전 대통령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대북 협상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고비에서 미국의 정권이 바뀌는 등 그의 입장에서 아쉬운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세계가 북한의 핵실험을 지켜본 오늘 김 전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집념을 오판했을 수 있다는 역사적 논란을 비켜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김 전 대통령은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올랐으나 두 아들이 부패 문제로 사법 처리되고 국민의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임기를 마쳐야 했다. 그는 재임 중 언론의 비판을 인내하지 못하고 햇볕정책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가혹한 세무사찰로 막아보려 했다. 그리고 언론을 향한 그런 태도는 그의 정치적 계승자인 다음 정권으로 이어져 정치와 언론 모두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 시대와 대통령 김대중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김 전 대통령은 한편의 절대적 추앙을 받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증오의 대상이 되는 포폄(褒貶)의 운명을 비켜가지 못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은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지역 갈등의 한가운데에 있어야 했다. 모든 사람이 그의 대통령 취임으로 지역 갈등이라는 국가적 병폐가 치유되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바랐지만 실망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금 그를 떠나 보내며 지역 갈등이라는 이 한국 사회의 풍토병(風土病)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역 문제가 국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은 지는 이미 오래다. 국가 대사(大事)마저도 지역 갈등이란 병균에 감염되는 순간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해지고 만다. 이제 그것이 누구의 탓이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 국가적 덫에서 어떻게 빠져나와 서로 다시 손을 잡을 날을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대통령들의 업적을 기념하고 기리는 데에 너무나 인색했다. 우리의 현대사가 그만큼 곡절 많고 치열했던 탓일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들의 공(功)과 과(過)를 가리고 그들이 나라를 위해 남긴 업적들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은 대통령들을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김 전 대통령도 공과 과를 모두 남겼고 그 공과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어제 오늘 내일을 오가며 출렁거릴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 어느 누구도 싫든 좋든 그가 이룩한 공(功)과 그가 남긴 과(過)의 울타리 밖에서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이 대한민국 성공 역사의 한 부분이듯이 그의 실패 역시 우리가 껴안고 넘어서야 할 유산(遺産)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그가 남긴 숙제를 치유하는 길도 열린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많은 사람을 다양한 상념에 젖게 만들고 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평가가 다르고 감회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모두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 거인을 떠나 보내며 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우리 역사의 한 장이 이렇게 펼쳐졌다 다시 이렇게 닫히고 있다.
2009/8/19, 조선일보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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