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이희옥 "파라과이에 2억7000만평… 더 넓은 땅 가질래요"
설치미술가 강익중 "美 지하철서 그린 3인치 그림… 백남준 넘고 싶어"
홍익대 교환학생으로 첫 인연 남편 위해 변호사 돼 본격 사업
아내는 세계를, 남편은 미래를 꿈꾼다
■ 대지(大地)의 여신(女神)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에서 승용차로 2시간 거리에 광활한 대지가 있다. 현지인들이 '악(惡)이 없는 땅(Land of No Evil)'이라 부르는 곳이다. 가도 가도 끝없는 9만 헥타르(2억7000만평)의 농장이 이희옥(미국명 마거릿 리·48)이 일하는 부동산 개발회사 YWA 소유다.
변호사 이희옥은 창업주 우영식과 함께 1998년부터 농장을 차례로 15개 사들였다. 농장 한복판에는 활주로가 있다. 경(輕)비행기 없이는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근의 CNN 오너 테드 터너 농장(4억평)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유기농 공법으로 생산되는 콩, 옥수수, 해바라기가 미국으로 수출된다. 가격이 시카고산(産) 곡물과 똑같다. 미국 본토와 견줘 인건비가 10분의 1, 땅값이 8분의 1이다. 미국에선 불가능한 한 해 이모작(二毛作) 반을 할 수 있다. 운송비를 빼도 수익성이 꽤 높다.
미국 뉴욕 맨해튼 11번가에 16층 아파트가 2007년 완공됐다. 허드슨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아파트는 착공 때부터 관심을 모았다. 승용차가 응접실 바로 옆까지 올라갈 수 있는 혁신적인 설계에 디자인도 빼어나기 때문이다.
'스카이개라지(Sky Garage)'라 불리는 아파트의 평당 가격은 미화 21만3480달러(한화 2억7752만원)다. 가장 맨 위 2개 층이 명품업체 돌체 앤 가바나에게 팔렸다. 파파라치의 접근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발상이 보기 좋게 적중한 것이다.
고가의 토지를 헐값에 횡재했을 때 미국인들은 '플럼 프라이스(plumb price)'라는 표현을 쓴다. 수도관 가격 정도만 주고 금싸라기 땅을 거저 주웠다는 뜻이다. 이희옥이 금호종금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매입한 맨해튼 AIG 본사가 딱 거기 맞는 경우다.
뉴욕의 한 부두에서는 개발사업이 한창이다. 여기서 유명 배우 로버트 드니로가 개최하는 '트리베카 영화제'가 열릴 예정이다. 출품작 시사회는 최첨단 워터프런트의 지붕에서 열린다. 이 발상도 이희옥의 머리에서 나왔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 창조(創造)의 예인(藝人)
과천 현대미술관 1층에 TV를 쌓아올린 탑 모양의 작품이 있다. 고(故)백남준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그 주위를 가로세로 3인치 타일이 감싸고 있다. 무려 6만2000개나 된다. '제2의 백남준'이라는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강익중(姜益中·49)의 작품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는 이름처럼 타일 하나하나가 모두 그림이다. 부처부터 인물, 한글과 도형을 형상화한 뒤 투명 플라스틱을 입혀놓았다. 모두 그의 손길이 닿은 것들이다. 사이사이 강익중이 공방(工房)에 주문한 앙증맞은 토기와 장난감이 놓여 있다.
- ▲ 과천 현대미술관 1층에 있는 강익중의 작품은 고 백남준의 작품을 둘러싸듯 품고 있다. 탑돌이를 하 듯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그의 작품 6만2000점이 한눈에 들어온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세계를 걷노라면 강익중의 작품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뉴저지주 프린스턴시 공립 도서관 로비에 나무판 그림 5000개로 만든 벽화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담배 파이프가 있고 노벨상과 퓰리처상 수상자 20명이 보낸 메모와 서명이 있다. '해피월드'란 작품이다.
1994년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은 청사 복판에 그의 벽화를 걸었다. 설계자 크레이그 하트만은 강익중에게 "이 공항은 당신을 위해 지은 것"이라는 헌사(獻辭)를 보냈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는 수필가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볼 수 있다. 강익중의 상설 전시작 '청춘'이다.
한창 복원 중인 서울 광화문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광화문 전체를 덮은 가림막 '광화문에 뜬 달'은 폭 41m, 높이 27m다. 달항아리를 그려넣은 가로세로 60㎝인 베니어합판 2611개가 모자이크처럼 엮여 있다. 이 작품 때문에 그는 6개월간 밤을 새웠다.
강익중은 내년 5월부터 10월까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리는 엑스포 한국관 건설을 의뢰받았다. 건축가 조민석이 구조물을 지으면 그는 광화문의 20배 크기인 이 파빌리언을 가로세로 30㎝크기의 알루미늄 4만2000점으로 덮을 예정이다.
6개월 뒤 엑스포가 끝나면 4만2000점 하나하나가 모두 개개의 작품이 된다. 예술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리사이클링 미술'이 강익중에 의해 처음 시도되고 있다. 작품 하나를 보통 수만개의 또 다른 작품으로 구성하는…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 시라소니와 강세황
이희옥은 대한항공 관리직으로 일한 아버지의 세 딸 중 둘째다. 서울 혜화초교 3학년 1학기를 마친 희옥은 베트남 사이공을 시작으로 아버지와 세계를 방랑했다. 지금까지 다닌 학교 수만 19개다. 아버지가 서울로 돌아온 이후 그는 시애틀 부근 빌링햄에서 살았다.
강익중에 따르면 이희옥의 집안에는 '유명한 인물'이 있었다. 1940~50년대를 풍미한 주먹 시라소니(본명 이성순)가 그의 작은 외할아버지다. 강익중은 "아내가 체구는 자그마하지만 배포가 크다"며 "그분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강익중은 약사(藥師) 아버지의 3형제 중 둘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가 그린 할머니 초상화를 보고 식구들이 외쳤다. "마침내 우리 집안에 그분이 현신(現身)하셨구나!" '그분'이 조상 강세황(姜世晃·1712~1791)이다. 강세황은 조선 진경산수화의 대가다.
그때부터 강익중에게 '미술'이외의 길이 없었다. 용산중, 장충고를 거치며 학원 한번 안 다녔던 그는 홍익대 서양화과에 합격했다. 그런데 막상 입학한 뒤 미술에 흥미를 잃게 됐다. 친구들 재주가 놀라웠던 것이다. 그는 수업에 자주 빠지고 딴짓만 하는 아웃사이더가 됐다.
저 멀리서 포물선을 그려온 두 사람이 1983년 마침내 접점(接點)을 찾았다. 미국 웨스턴 워싱턴주립대 3학년이던 이희옥이 6개월간 홍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것이다. 둘은 미술과는 무관한 'UFO클럽'을 만들어 시간을 보냈다. 이희옥이 돌아간 뒤 펜팔이 시작됐다.
1984년 초 강익중은 졸업식도 마치지 않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낮에는 뉴욕 프랫(Pratt)대 석사과정을 밟고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청과상에서 일했다. 그즈음 시애틀에 있던 이희옥도 미술로 유명한 헌터칼리지에서 학위과정을 밟기 위해 뉴욕으로 왔다.
다시 만난 지 1년 뒤인 1985년 둘은 결혼했다. 약혼식부터 하려 했지만 이희옥의 아버지가 강익중을 본 뒤 "밥을 세 공기나 먹는 게 믿음직스러우니 번거로운 절차 거치지 말고 그냥 혼인하라"고 한 것이다.
강익중의 증언은 전혀 다르다. "장인이 너무 무서웠다. 식탁에서 반찬을 집어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고개 푹 숙이고 밥만 세 그릇을 먹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서울 광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다시 미국으로 갔다.
■ 갈림길
결혼은 가난한 청춘(靑春)에 결단을 요구한다. 변변한 벌이 없이 예술만 찾다가는 굶어죽기 딱 알맞다. 누가 미술을 계속할 것이며 누가 포기할 것인가? 포기는 곧 돈을 버는 것을 뜻했다. 부부가 결론을 낸 것은 1년이 지난 뒤였다. 이희옥에게 물었다.
―왜 미술을 포기했습니까. 재능이 남편보다 없었나요?
"둘 다 예술의 길을 걷길 원했어요.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었습니다. 남편은 '나는 미술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그 고집에 진 겁니까.
"저도 고집을 부리긴 했지요. '내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당신만큼 나도 예술을 사랑한다'고. 남편은 제게 '당신이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지 않느냐'고 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치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법한데요.
"남편은 심지어 제가 사람을 잘 웃기니 코미디언이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어요. 제가 어려서부터 학생회장을 했고 토론을 좋아했거든요. 사실 저는 처음부터 강익중이 저보다 더 나은 예술가가 될 것이라는 걸 알았어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아 1년이 흘러간 겁니다."
―처음 직장이 YWA였지요.
"영우앤 어소시에이츠(Youngwoo&Associates)였어요. 말단 사원으로 일했어요. 일을 하면서도 계속 미술이 생각나는 겁니다. 보스인 우영식씨에게 '나는 풀타임 헝그리 예술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사표를 냈지요."
―그런데요.
"우영식씨가 저희 부부에게 밥을 샀어요. 식사하면서 '예술은 강익중이 하고 당신은 돈을 벌어 서포트해주라'고 저를 설득했어요. 승낙할 수밖에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당시 결정이 현명했습니다."
―로스쿨 입학은 본격적인 사업가가 되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습니까.
"미술대 학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YWA에서 변호사들과 일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고 흥미를 느꼈어요."
―밤에 로스쿨을 다니며 변호사 자격증을 땄지요?
"브루클린 로스쿨이라고, 야간(夜間)코스가 있었습니다. 4년 동안 새벽 2~3시까지 공부하고 아침에 출근했습니다. 남편은 매일 저녁 학교로 저를 데리러왔고요. 제가 새벽 2시 이전에 잠들면 남편은 '공부 다 했느냐'며 저를 깨웠어요."
―남편이 학비는 도와주던가요?
"그런 돈이 어디 있겠어요. 당시만 해도 남편은 유명하지 않았으니까요. 저리(低利)로 대출을 받아 해결했어요."
―저런, 강익중이 얼마나 매력적이기에 조선시대 열녀(烈女)도 아닌데 남편을 위해 돈을 벌 생각을 한 겁니까.
"그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펜팔이 처음에는 우정(友情)이었는데 나중에 사랑이 됐지요. 그는 한국어로, 저는 영어로 썼는데 남편의 글솜씨가 좋았어요. "
―누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나요.
"특별한 프러포즈는 없었어요. 하지만 저희는 언젠가 서로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강익중은 '장인이 밥 세 그릇 먹는 모습에 반해 결혼을 앞당기자고 했다'더군요. 그게 말이 되나요.
"제가 미국에 혼자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게다가 뉴욕이니. 저는 제 어머니가 시부모님께 제안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등 떠밀려 결혼하게 돼 우리도 놀랐어요."
―그런 부부들도 싸움을 합니까?
"하지요. 다만 5분 이상 싸워본 적은 없어요."
―남편의 작품에 대해서도 평(評)을 합니까.
"그의 작품을 제일 먼저 평하는 게 접니다. 저는 항상 솔직하게 말해줘요. 남편은 너무 많은 정성을 들이기 때문에 자기 작품을 스스로 평가하기가 어렵지요."
―세계적인 예술가인데, 혹시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며 벌컥 화를 내지는 않나요.
"미술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종종 코멘트를 하면 그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저는 미술이건 사업이건 200%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 ▲ 2억7000만평에 이르는 파라과이 농장의 전경. / 강익중씨 제공
■ '백남준 특급열차'
아내가 돈을 벌어오는 동안 강익중도 미술계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지하철 안에서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가 고안한 게 3인치짜리 정사각형 캔버스였다. 청과상(靑果商)으로 가는 도중 그는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그렸다. 강익중에게 물었다.
―세계에 이름을 알린 게 1994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과의 2인전을 제안받은 것이었지요.
"그 제안을 받고 오히려 어리둥절했어요. '왜 내게 연락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데이비드 로스 휘트니 미술관장이 어디선가 제 작품을 봤대요. 큐레이터 유지니 사이가 제게 '한국의 비빔밥처럼 갖가지 재료를 섞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공통점을 두 사람이 지닌 것 같아 함께 소개하고 싶다'고 했어요."
―예술이 비빔밥입니까?
"비빔밥에는 밥과 고기와 나물이 들어가잖아요. 예술도 유연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당신과 백남준은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백 선생님은 TV 수상기를 여러 대 설치해 비디오로 표현하고 저는 캔버스를 사용하지요. 다만 같은 것을 반복하고 연결시키는 건 비슷한 점일 겁니다."
―휘트니 미술관 2인전 때 백남준이 좋은 자리를 강익중에게 주라고 했다던데, 무슨 사연입니까.
"당시 저는 34세, 백 선생님은 62세였어요. 그때 백 선생님은 독일에 있었는데 '더 좋은 자리를 익중에게 주라'는 팩시밀리를 보내왔어요. 솔로몬앤 브러더스라는 회사의 초대를 받아 회의하던 자리였어요.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후배 사랑에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백남준을 처음 만난 게 언젭니까.
"1990년 뉴욕 소호의 화랑에서 그룹전 때였어요. 중국 천안문사태 기금마련 전시회였습니다. 그분이 제가 한국인인 걸 알고 세 가지 충고를 해줬어요. 그 이야기를 한 후 그가 '빠이빠이'하면서 자리를 떠나자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몰려들었습니다."
―무슨 얘기였습니까.
"그림을 싸게 팔아라, 여행을 많이 다녀라, 파티에 많이 다녀라."
―가난한 화가가 어떻게 여행을 많이 다니고 파티에 많이 다닙니까?
"여행을 많이 다니라는 건 전시를 많이 하라는 뜻입니다. 미국이 파티 중심의 사회잖아요. 한국에서는 파티를 거창하게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않아요."
―그 뒤에도 인연이 이어졌습니까.
"제 작업실이 차이나타운에 있고 집은 첼시쪽입니다. 걸어가다 보면 백 선생님이 집밖 휠체어에 앉아 계세요. 저를 보면 그분은 항상 '야! 강익중' 하고 부른 뒤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러고 보니 얼굴이 백남준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독일에 가면 저보고 '미스터 백 아들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정말 비슷하죠? 그분은 제게 딜러(畵商)도 소개해주셨어요. 칼 솔로웨이라고 지금도 함께 일합니다."
―제2의 백남준이란 별명이 좋습니까.
"저는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특급열차에 무임승차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백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비로소 제 발로 걷는 거죠. 하지만 저는 접니다."
―첫 전시회는 언제 했나요.
"대학원 시절 룸메이트가 케냐의 축구 대표선수 출신이었어요. 그의 특기가 저글링인데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특이한 재주를 가졌습니다. 이름이 '난종'이라고. 그는 로지스랜드대에 다녔는데 제 그림을 그 학교 미술교수에게 보여준 겁니다. 그걸 본 교수가 '강의실 복도에서 전시해보라'고 해 그때까지 그린 그림을 가방에 싸 갔지요."
―왜 프랫대학원에서 첫 전시회를 안 하고 남의 학교에서 한 겁니까.
"홍대에서 그랬지만 미국 와서도 나서는 걸 싫어했거든요. 오죽했으면 저를 가르친 선생님들이 저를 기억하지 못했겠어요."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그림이 그려집니까.
"빠르면 한 호흡에 그려요."
―맨 먼저 팔린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압니까.
"일본인 딜러에게 처음 작품을 팔았는데 홍콩의 한 호텔 이발소에 걸려 있다더군요. 당시 몇백달러를 받은 것 같은데…."
■ 뉴욕의 '짠순이'
남편이 도약하는 사이 이희옥도 뛰어올랐다. 1996년 로스쿨을 졸업한 뒤 그는 회사의 파트너가 됐다. YWA의 파트너는 창업자 우영식과 이희옥, 2년 전 초빙한 그렉 카니 등 세 명이다.
―부동산개발이라는 게 뭘 개발하는 겁니까.
"신디케이트를 조합해 상업용이나 주거용 빌딩을 사는 겁니다. 90년대 데이터센터라는 사업이 우리 회사에 큰 원동력이 됐어요. 구체적으로 텔레커뮤니케이션 회사라고 합니다. 건물을 사 초대형 텔레커뮤니케이션 회사가 사용할 서버와 루터를 들여놓은 뒤 파는 거죠."
―그 사업이 왜 돈이 됩니까.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침수 위험지역도 안 되고 비행기의 항로를 가로막아도 안됩니다. 발전기를 설치해야 하고 바닥은 두터워야죠. 지붕은 넉넉해야 하고요. 월가의 스타우드 캐피털, 앤절로 고든&컴퍼니 같은 회사들이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했지요. 많은 텔레커뮤니케이션 시설을 지었는데 세계적으로 이런 회사가 5개밖에 없어요."
―부동산개발사업이 한국에서도 험하다고 하던데.
"미국도 부동산은 남성 중심입니다. 24년간 일하면서 변호사나 브로커 말고 저 같은 택지개발업자는 한명도 못 봤어요. 대형 미팅에 나가면 동양여자라며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죠."
―여성차별은 한국도 마찬가지죠.
"한국이 미국보다 더 심하더군요. 한번은 미국 남자 부하직원과 한국 공무원을 만났어요. 그가 헬리콥터에 우릴 태웠는데 부하직원을 앞에 앉히고 저보고는 뒷자리에 앉으래요. 소음 때문에 아무 설명도 못 들었어요. 분명히 제가 명함을 줬는데도요."
―왜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다 파라과이에 땅을 산 겁니까.
"미국의 부동산이 내리막길을 걸을 걸 예상했지요. 회사 내부적으로 파라과이 토지 매입을 '기분 좋은 프로젝트(The Feel Good project)'라며 자랑스러워 합니다. 독특하고 거대한 농업생산모델이죠."
―뭐가 독특합니까.
"우리는 '트리플 보톰 라인(Triple- bottom-line)'이라는 접근법으로 농업을 합니다. 전체 농지의 3분의 1은 남겨놓는 거죠. 법으로 규정된 것보다 훨씬 큰 면적의 숲을 유지하고 물을 오염시키지 않는 공법입니다. 현지의 집과 물탱크도 저희가 지어줍니다."
―남미국가들은 독재가 많다던데.
"오해예요. 파라과이 정부는 친기업적이고 외국자본에도 우호적입니다. 외환 유입에 제한이 없고 세율도 남미에서 가장 낮아요. 법인세도 10%밖에 안 돼요. 내각회의에서 파라과이 부통령이 우리 농장이 모든 외국 투자가가 따라야 할 모델이라고 소개했을 정도입니다."
―1년에 3~4회 현장에 간다는데 가서 뭘 합니까.
"농업은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의 파트너들이 하기 때문에 제가 간여할 게 없어요. 전체적인 사업현황과 방향을 논의하는 정도입니다."
―미국과 남미는 꽤 먼데 파트너들이 사기칠 위험은 없나요.
"그분들은 능력 있고 좋은 사람들입니다. 농장 근로자와 매니저들이 전체 소득의 일부를 받기 때문에 모두 자기 농장처럼 열심히 일해요."
―부동산 폭락을 예측했으면서 왜 '스카이 개리지' 사업은 시작한 겁니까.
"경제위기일수록 최상위층 바이어들은 이제껏 갖지 못한 것을 갖기를 바란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승용차가 거실까지 간다는 것은 파파라치를 피하고 싶은 유명인들에게 최고 아니겠어요? 장바구니를 꺼낼 필요도 없지요. 그 아파트는 최고급 차를 사랑하는 분들께도 좋아요. 주차요원이 차에 흠집을 낼 걱정을 안 해도 되잖아요."
―화재라도 나면 차가 어떻게 빠져나옵니까.
"화재방지벽을 사이에 둔 2개의 방을 생각하면 됩니다. 아파트와 차고빌딩은 문으로 연결된 거예요. 문 하나 사이를 둔 빌딩이지요."
―미술을 하던 분이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미술과 마찬가지로 시공간(時空間)을 앞서서 내다봐야 합니다. 부동산 업계의 원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이 바닥은 최소한 30년은 있어봐야 이해할 수 있다'고요.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돈을 많이 벌면서 매번 이코노미석을 탄다면서요.
"제가 짠순이거든요(Because I'm cheap)."
■ 미래를 꿈꾸다
아내가 미국과 파라과이의 토지 시장을 주무르는 사이 강익중은 역사와 철학이 가미된 세계로 자신의 경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는 남북으로 갈린 분단된 조국을 예술로 이을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 ▲ 강익중씨 제공
―어떻게 남북을 잇겠다는 겁니까.
"제가 가장 듣고 싶은 긴급뉴스가 이런 겁니다. '남북한 군인들이 임진강에 다리를 놓기 위해 총을 놓고 삽을 들었습니다' 같은 거요. 파주 북쪽 임진강에 철제 빔으로 뼈대를 만들고 벽돌 100만개로 다리를 놓아보려 했었죠. 벽돌엔 세계 어린이 100만명이 그린 '꿈'을 주제로 한 그림을 새기고요."
―황당해 보입니다.
"그걸 실현해보려고 북한에도 2번이나 들어갔어요. 좌절됐지만요."
―왜요?
"돈을 요구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그 꿈을 실현해보려 했는데 그것도 안 됐어요."
―뭡니까.
"2001년 9월 11일 130개국 어린이가 보내온 그림 3만5000장을 모아 뉴욕 UN본부에서 전시회를 열 예정이었어요. 그날이 무슨 날인지 아시죠?"
―1999년에 파주 통일동산에서 남북을 잇는 '10만의 꿈'이란 작품을 선보인 적이 있죠.
"작년에 이라크에서 한 '이라크 친구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도 비슷한 콘셉트입니다. 일산 호수공원에서 2004년에 한 '꿈의 달'이나 미국 켄터키 무하마드 알리센터에서 2005년에 한 '놀라운 세상'도 같은 성격이지요."
―2007년에 나온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라는 책 서문이 인상적이더군요. '백 선생님, 30세기에 봬요!'라는 말로 끝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월스트리트의 금융계 인사들과 저녁식사를 할 때 백남준 선생님이 갑자기 '30세기에는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하고 묻는 겁니다. 모두 놀랐지요. 남들은 겨우 백년 뒤를 내다볼 때 그분은 천년을 앞서본 겁니다."
―백남준은 한때 '예술은 사기다'라고 했는데.
"그 사기가 사기(詐欺)가 아니라 사기(史記)입니다. 그 말을 하실 때 사마천의 '사기'에 푹 빠져있었거든요. 늘 이중적 해독이 가능한 표현을 즐기셨죠."
―작품에 보면 영어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제가 미국에 올 때 들고왔던 'Vocabulary 22000'이라는 책에 나오는 단어들입니다. 그걸 새겨놓은 겁니다."
―그럼 문장은요.
"아! 제가 한때 매일 뉴욕타임스 2면을 외웠거든요. 두뇌훈련도 되고 괜찮은 거 같아요."
―백남준처럼 당신도 철학적이 돼가는 것 같습니다.
"문화가 뭡니까, 잠자는 저를 깨우는 거잖아요. 철학은 자기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깨우는 거지요."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습니까.
"반쯤 눈을 감고, 가능하면 왼손으로. 못 그려도 그리고 기뻐도 그리고 배고파도 그리고 졸려도 그립니다. 옆에 있는 걸 그리고 누워서도 그리고 뛰면서도 그리고…."
―아내는 세계의 땅을 주무릅니다.
"저는 미래를 꿈꾸지요."
―부부가 버는 돈이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 당신만 해도 작품값이 어마어마할 텐데.
"요즘은 에너지를 모으는 중입니다. 이거 비밀인데…, 그림은 남발하면 안 돼요. 안 팔리면 금세 망해요."
■ 이 부부가 사는 법
부부는 한쪽이 넘치면 한쪽은 모자라야 조화롭게 산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다이내믹한 부부는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에 대한 증언을 기자는 아내 이희옥에게 듣기로 했다.
―천재와 살면 힘들지 않나요.
"남편은 친구들에게 직접 요리해 대접하는 것을 좋아해요. 11살 난 아들에게 아침을 만들어주는 것도요. 저는 늦잠꾸러기지만 남편은 잠이 별로 없거든요!"
―강익중의 갤러리는 직접 꾸며줬습니까.
"100평(330㎡)쯤 되는데요. 문고리부터 타일을 고르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건 제게 특별한 프로젝트였어요. 맨땅에서 완공까지 제가 간여했어요. 일꾼들과 일하는 게 힘들 때도 있었지만 눈앞에서 제 아이디어와 콘셉트가 현실화되는 게 너무 만족스러웠어요."
―참 대단한 것 같은데 사는 건 힘들 것 같은 가족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 가족의 모토는 3H입니다. 행복, 건강, 겸손(Humble)이지요."
―부부가 세계를 헤매고 다니면 만날 시간은 있나요.
"저는 남편만큼 유명인이 아니에요. 같이 있을 때 좋은 시간을 가지려 노력하죠. 여행도 함께 다니고요."
―한국말을 얼마나 합니까.
"말하고 이해하는 것은 80%, 읽기는 60% 정도 되는데 쓰기와 타이핑은 못해요. 그래서 아들을 매주 토요일 3시간씩 한국어학원에 보내요."
―미술에의 꿈은 완전히 접은 겁니까.
"한번 예술가는 영원히 예술에서 멀어지지 않는다고 믿어요. 제가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요. 게다가 저는 퀸스 미술관의 이사로 미술업계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2009/6/18,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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